《382》2부 19권 - 10화
제4장. 아니면 내가 저렇게 되거나.
부산에 도착해서 병원에 들어선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다.
병원 건물 앞에 족히 이백 명은 넘는 덩치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중에는 박배근도 있었다.
박배근이 열어주는 문으로 조태완과 조수석의 박노익이 내리는 동안, 강성태는 진용도가 열어주는 운전석 뒷좌석을 통해 밖으로 나섰다.
강성태가 몸을 돌린 직후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재킷을 매만진 박배근을 시작으로 이백여 명에 달하는 덩치들이 줄줄이 고개를 숙였다.
박배근에게 눈인사를 전했던 강성태는 그의 뒤에 있는 고룡동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존에 있던 경상도와 부산의 인원에 박배근이 대전과 전주에서 데려온 숫자가 이미 이백 명을 넘었다. 거기에 강남 덩치들이 합류한 상황이었다.
강성태 혼자 온 것도 아니고, 조태완과 박노익이 있었고, 나름 이름을 떨치는 박배근과 정소국, 그 아래로 문기주, 진용도까지 있어서 고룡동은 따로 인사할 서열이 아니었다.
강성태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떨군 고룡동의 앞으로 움직였다.
무슨 일이지?
조태완을 시작으로 박노익, 박배근까지 궁금한 표정으로 강성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잘 지냈어?”
“배근이 형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새롭게 업장도 준비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형님.”
“이리와 봐.”
강성태는 고룡동을 불러서 조태완 앞으로 데려갔다.
“형님. 광주 고룡동입니다. 지난번 부산에서 가장 앞에 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광주 고룡동입니다, 형님.”
강성태가 이렇게까지 소개할 줄 몰랐던 고룡동은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이었다. 반대로 조태완은 그런 그를 이해한다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세상이 바뀐다. 깡패도 마찬가지야. 땀을 안 흘린다고 해서 불한당이라고 불리던 시절 다 지났어. 힘들고 어려울 때면 우리 보스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래도 어려우면 언제고 연락해.”
“감사합니다, 형님.”
조태완이 내미는 손을 두 손으로 잡은 고룡동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그가 몸을 세운 다음이었다.
“노익이 형님께는 그때 인사했지? 아! 충일이 깨어났다는 소식은 들었어?”
“예, 형님. 그렇지 않아도 그 소식 듣고서 광주 식구들 모두 좋아라 했었습니다, 형님.”
“태완이 형님 말씀대로 깡패라고 함부로 굴지 마라. 우리끼리는 연장 들 수 있어도 일반인들을 만나면 먼저 고개 숙여. 그런 자세를 몸에 담아. 반드시 좋은 일 있을 거다. 알았어?”
“감사합니다, 형님.”
강성태는 옅게 웃으며 고룡동의 팔뚝을 가볍게 다독였다.
신강남파에서 최근 가장 오르내린 이름은 최치곤과 유충일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동생들을 당부한다던 유충일의 절규, 그런 그를 빼내기 위해 미친놈처럼 칼을 휘둘렀다는 최치곤, 거기에 더해 당장 내일 아침부터 고룡동의 이름이 떠돌 장면이었다.
인사를 마무리한 강성태는 조태완, 박노익과 함께 병실로 향했다.
징그럽다, 이런 모습은.
온몸에서 닭살이 돋아날 것만 같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병렬, 아르윈과 함께 홀가분하게 들르고 싶었다.
깡패에게도 쇼맨십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라면 말이다.
강성태는 어둑한 주차장을 지나 병원 건물로 향했다.
야쿠자, 이교창의 일을 아는 다른 조직, 그리고 이왕이면 차웅진과 인천 함태준이 이 장면을 보았으면 싶었다.
어둑한 로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엘리베이터를 지키고 있던 덩치들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그나마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일반인이 없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병원 건물이고, 워낙 신강남파 숫자가 많아서 내부 배신자가 아니라면 아무리 야쿠자 조직원들이라 해도 당장 강성태를 노리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엘리베이터로 올라간 강성태는 덩치들의 안내를 받아 병실로 들어섰다.
목덜미에 커다란 거즈, 왼쪽 어깨에서 시작해 상체 절반을 감싼 붕대, 그 위에 큼지막한 환자복을 걸친 이교창이 걸터앉아 있던 침대에서 몸을 세웠다.
힘든 모양이었다.
핼쑥한 안색과 함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이교창이 상체를 숙이자 침대 뒤편에 서 있던 다섯 명이 순서에 따라 고개를 깊게 숙였다.
“오랜만이다. 먼저 인사부터 하자. 동생? 여기가 부산을 맡겼던 경상도 이교창이다.”
박노익이 먼저 나서서 이교창을 소개했고,
“안녕하십니까, 형님? 경상도 이교창입니다, 형님.”
그가 고개 숙이며 내민 손을 강성태가 묵직하게 잡았다.
“태완이 형님은 알지?”
“나야 전에 여러 번 봤었지. 그래도 경상도 일빳다를 꼽으라면 이교창이었거든.”
고개를 숙이는 이교창을 보며 조태완이 이전에 있었던 인연을 설명한 다음이었다.
정소국과 이교창이 짧게 인사를 나눌 때, 강성태는 침대 뒤편에 있던 덩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휠체어가 있을까? 잠시 다녀올 곳이 있는데?”
“여기 있습니다, 형님.”
멀리 갈 것도 없이 침대 안쪽에 있었다.
한 명은 휠체어를 끌고 나섰고, 다른 한 명은 침대에 걸린 링거대를 옮겼으며, 그 직후에 둘이서 이교창을 부축해 앉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형님?’
‘나도 모르겠다.’
이교창이 돌아보자 박노익이 먼저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그만큼 강성태의 제안이 이교창에게는 당황스러운 느낌이었다.
“잠시 주차장에 다녀올까 합니다.”
“함께 가도 되지?”
“피곤하실까 봐 그렇지, 함께 가주시면 더 좋습니다.”
“소국이까지 가면 되겠다.”
확실히 조태완만큼은 강성태의 의도를 알아챈 눈치였다.
선을 그은 그는 길을 열라는 의미로 정소국에게 문 쪽을 가리켰다.
다 함께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
“부산 업장 가리마 하고 호텔에 들어갔다가, 형님. 적적하기도 하고, 출출해서 포장마차에 다녀왔습니다, 형님.”
휠체어에 붙어 선 박노익이 나직한 질문에 이교창이 쇳소리 가득한 음성으로 답을 내놓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정소국이 나서서 덩치들 대신 휠체어를 붙들었다.
안에 타는 건 정소국까지라는 의미였다.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형님.”
이교창이 믿는 심복이었는지,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병실에 있던 다섯 명이 고개를 숙였다. 말하지 않아도 부리나케 계단을 달려 아래에서 이교창을 기다릴 게 분명한 몸짓이었다.
누군가 엘리베이터를 떨어트리거나, 폭탄이라도 터트리면 신강남파 보스와 고문 둘, 강남 클럽 책임자, 경상도와 부산 책임자, 대전과 전주 책임자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득을 얻을 정도로 굵직한 인물만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적당하게 배 채우고 나왔을 때였습니다, 형님. 차로 걸어가는데 퀵서비스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겁니다, 형님. 그 새끼가 칼잡이였습니다, 형님.”
“야쿠자라면서?”
“칼잡이 새끼를 제가 막는 동안, 숨어 있던 두 새끼가 더 나왔는데, 형님. 동생들이 달려오니까 옆에 승용차에서 고함이 버럭 나왔습니다, 형님.”
엘리베이터가 6층을 내려가고 있었다.
“일본말이었습니다. 얼굴도 봤는데 일본놈들 머리 스타일이 워낙 우리랑 달라서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포장마차 주차장에서 그 난리가 났었는데 여태 경찰이 꼼짝도 안 합니다, 형님.”
“찾아봤어?”
“형님께 말씀드리고 동생들 있는 대로 풀었는데 승용차도 그렇고, 칼잡이 새끼들도 아직 못 찾았습니다, 형님.”
이교창의 말이 끝나는 순간에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벨 소리를 울렸다.
“오셨습니까, 형님?”
분명 위에서 인사했던 덩치 다섯 명이었다.
예상대로 죽어라 계단을 달려 내려왔을 텐데도 재킷의 앞을 왼손으로 감싸며 상체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저런 열정과 노력이라면 어떤 일을 했어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땀 흘리기 싫어서, 혹은 으스대는 모습에 빠져서 깡패로 고개 숙이는 현실에 저 다섯 명은 정말 만족하고 있을까?
“일이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려.”
강성태는 다섯 명을 만류한 뒤에 곧장 주차장으로 나섰다.
필리핀 조직원들은 바로 찾았다.
한쪽에 세워둔 승용차와 승합차 앞에서 양손을 앞으로 잡고 있어서였다.
“박배근. 승합차 안을 못 보게 앞 좀 막아.”
“예, 형님. 야! 여기부터 저기까지 형님들 말씀 나누실 게 있으니까 뒤로 돌아서 지켜!”
박배근의 지시에 주르륵 달려온 덩치들이 멀찍이서 뒤로 돌아 공간을 만들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고속도로나 병원으로 오는 길에 트럭으로 들이받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 오토바이를 타고 온 놈도 그렇고, 나머지 두 놈도 배달원처럼 꾸미고 있었습니다, 형님.”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들은 이교창의 말이 자꾸만 뇌리에 맴돌았다.
거기에 야쿠자들이 해결하지 못하면 인천 쪽에서 작업하게 해놓았다는 녹취록도 떠올랐다.
“잠시만.”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이병렬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쯤 울린 뒤였다.
- 여보세요?
치료를 받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유헌우에게 잔소리를 잔뜩 먹어서 약이 올랐는지도 모르고.
독이 오른 이병렬의 대꾸가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부산에 도착했는데 급한 거라서 일단 짧게 말하고 다시 전화할게. 부산 이교창을 노린 게 퀵서비스로 변장한 칼잡이라니까 주차장에 있는 식구들한테 배달원이 들어오면 무조건 따라붙으라고 해.”
- 뭐?
이병렬의 반문이 당황하는 것처럼 들렸다.
혹시?
“야식시켰어?”
- 치료도 끝났고 해서 응급실이랑 여기 데스크까지 싹 족발 돌리라고 주문했다.
젠장. 어쩐지 찜찜하더라니.
“병렬아. 한 명이 아니라 셋이란다. 너야 진용이랑 종환이 있다고 쳐도, 그런 놈들이 일단 응급실에 들어가면 막을 사람은 조성호밖에 없어.”
- 이런 씨발! 올 때 다 됐는데? 일단 끊어!
급한 음성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이렇게 알려줬으니 이병렬이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응급실을 막아주리란 기대쯤 있었다.
대강 내용을 짐작한 눈치였다.
통화를 지켜본 일행들 모두 무거운 얼굴이었다.
병원을 이병렬에게 맡겼으니 이제는 강성태가 부산에서 하려던 일을 처리해야 할 차례였다.
“문 좀 열어. 그리고 잡아 온 놈들 상체만 꺼내줘.”
강성태의 지시를 받은 필리핀 조직원들이 승합차의 뒤편 슬라이딩 도어를 열었다. 그런 뒤에 승합차 안으로 뛰어들어 자루를 안쪽 벽에 기댔고, 이어 위를 열었다.
네 놈 모두 피투성이였고, 주차장 가로등에 의지한 불빛 탓에 단숨에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휠체어의 팔걸이를 양손으로 붙든 이교창이 힘겹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기울여서 네 놈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두 번째 놈 얼굴 좀 닦아주십시오, 형님.”
강성태도 아는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올림픽 도로에 들어설 때의 그 거만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강성태의 눈짓을 받은 필리핀 조직원이 세차할 때 쓰는 듯한 수건으로 두 번째 놈의 얼굴을 두어 차례 문질렀다.
“이 씨발 새끼…. 죄송합니다, 형님.”
욱해서 욕을 뱉었던 이교창이 강성태와 조태완, 박노익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새끼는 확실히 기억합니다. 눈꼬리에 붙였던 거만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형님. 어디에서 달으셨습니까?”
“태완이 형님과 나를 노리고 호텔까지 따라왔길래 잡았다.”
“별것도 아닌 새끼들이….”
강성태를 돌아보는 이교창의 눈이 이전과 다르게 독하게 변해 있었다.
사실은 서울에서 이렇게 싸우고 있으니까 긴장 풀지 말고 부산을 더욱 단단하게 지키라며 부탁하려고 했었다.
“저 새끼들 제가 챙겨도 됩니까, 형님?”
호텔에서 붙잡은 놈들이 이교창을 작업했던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칼잡이 새끼들 막다가 셋이 망가졌습니다. 원래 저랑 함께 다니는 동생들이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그날 포장마차 앞에서 셋이 망가져서 아까 보셨던 것처럼 다섯만 남았습니다, 형님.”
강성태는 고개를 돌려 조태완을 보았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이었다.
“이왕 보여준 건데 교창이에게 맡겨주지?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보스에게 불똥 튀게 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동생은 아니니까.”
“형님 뜻이 그러시면 넘기고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이따가 다섯 놈 보면 넘겨받겠습니다, 형님.”
대강 정리가 끝났다.
이교창이 당했는데 신강남파가 꼬리를 감췄다는 소문도 거창한 이 방문을 통해 눌렀을 게 틀림없었다.
“부산을 틀어막으면서 야쿠자 놈들의 숨통이 꽉 막힌 모양이다. 깡패 뭐 있겠어? 숨통 막히면 일단 들이받는 거지. 그것까지야 이해한다. 하지만 일본놈들이 우리 땅에서 부산을 책임진 이교창을 작업하고도 곧바로 나랑 태완이 형님을 노릴 만큼 설치는 건 곤란해.”
힐끔 주차장을 돌아본 강성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칼잡이 놈들도 잡을 거 같은데, 그놈들을 욕하기 전에 우리를 먼저 돌아봐.”
고개를 든 이교창은 물론이고, 신강남파 고문 두 명, 박배근, 정소국마저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강성태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돈 때문에 일본놈 밑에서 칼질해대는 놈이나, 일반인들 목줄 졸라서 피를 빠는 놈들, 마약, 고리대금업, 누구든 욕망에 물들어서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나랑 마주 서게 돼. 결과는 깡패답게 둘 중 하나지. 저렇게 되거나….”
강성태는 승합차 안에 피범벅으로 쓰러진 네 놈을 돌아본 뒤에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아니면 내가 저렇게 되거나.”
이교창의 시선이 강성태의 오른손 아래로 내려갔다가 그보다 빨리 돌아왔다. 분위기가 워낙 묵직해서 혹시 지난 잘못을 따져서 주먹을 한 방 날리는 건 아닌가 염려한 눈치였다.
“진짜 목표로 했던 일은 아직 시작도 못 했다. 그전에 욕망에 사로잡히면 조만간 올 기회에서 밀려나는 거고, 그보다 더 타락하면 나랑 마주 선다. 부산을 분명하게 지킬 자신이 없다면 지금 말해.”
강성태의 의도를 이제야 알아챈 모양이었다.
“이번 실수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모실 기회를 주십시오, 형님.”
이교창이 독한 눈을 하고 각오를 내놓았다.
이 정도라면 받아들이지.
강성태가 픽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는 순간이었다.
경상도 이교창을 추천했던 박노익이 입술을 둥글게 말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방심했다가 당했던 일이 이 정도로 넘어가는 게 다행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부산은 됐고.
승합차 앞에 선 강성태는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돌아보았다.
‘부탁한다.’
몸은 부산의 병원 주차장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방지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