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2부 19권 - 15화
아침을 먹은 이병렬은 침대에 길게 누워 TV를 보았다.
“너는 출근 안 하냐?”
“예? 형님?”
“하기는. 대표이사란 놈이 머리통 깨져서 들어가기도 뭐하겠지. 그렇더라도 짬짬이 관리해. 회사에서 엉뚱한 일 벌어지면 보스는 웃어넘길지 몰라도 나는 아냐.”
“하루에 한 번은 챙기고 있습니다, 형님.”
김진용을 돌아보며 픽 웃은 이병렬은 다시 TV에 시선을 주었다.
“분명 가만있지는 않을 텐데 어쩌려고 그러지?”
“성태 형님 말씀이십니까?”
이병렬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조봉진이 들어왔다.
“오상율 형님이 찾아왔습니다, 형님.”
“누구?”
“논현동 호텔 지하에서 단란주점 운영하는 오상율 형님입니다, 형님.”
“오상율 형님이면 강서구 이광준 사장 또래잖아? 이광준, 이 인간이 또 뒤에서 모사를 쳤나?”
김진용을 돌아보았던 이병렬이 조봉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혼자 왔냐?”
“아닙니다, 형님. 전에 우리 가게에 들렀던 박중달이라고 제 또래와 함께 왔습니다. 형님께 직접 드릴 말씀이 있다고 꼭 뵙게 해달랍니다, 형님.”
지금은 누구도 믿지 못하는 시기였다.
잠시 고민하던 이병렬이 고개를 들었다.
“가서 모시고 와. 너는 TV 끄고.”
상체를 숙인 조봉진이 몸을 돌려 나갔고, 그 사이에 김진용은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혹시 모르니까 긴장 풀지 말고 있어.”
이병렬이 짧게 지시한 다음이었다.
병실 문이 열리고 조봉진이 두 명과 함께 들어왔다.
어쨌든, 오상율은 생활하는 깡패고, 이광준과 나이가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침대에서 내려선 이병렬이 짧게 고개를 숙였고, 김진용은 좀 더 고개를 숙였는데, 마지막으로 병실에 들어선 박중달은 아예 허리가 90도로 꺾일 만큼 깊게 인사했다.
“앉으십시오, 형님. 봉진아. 차 좀 줘.”
침대에서 내려선 이병렬이 앞쪽 테이블로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동생. 앉기 전에 할 말이 있다. 이거저거 다 자르고 시원하게 말할 테니까 나 한 번만 살려주라.”
오상율이 이해하지 못할 청을 내놓고는 아쉬운 얼굴로 이병렬을 바라보았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전개여서 이병렬은 의아한 표정으로 오상율과 곁에 서 있는 박중달을 보았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여기 이놈이 내 숙소에 있는데 뒤를 봐주던 친구가 있거든. 그 친구가 말이지. 이 앞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데….”
고개를 갸웃하던 이병렬의 눈꼬리가 바싹 올라가자 오상율은 내놓던 말을 삼켰다.
“야, 박중달이? 너 혹시 이 앞에 있는 커피숍 말하는 거냐? 우리 보스한테 눈알 부라리며 시비 턴 새끼가 네 친구야?”
“죄송합니다, 형님!”
이병렬의 질책이 떨어지기 무섭게 박중달이 테이블 옆으로 나섰다.
홱, 표정이 바뀐 김진용이 이병렬의 곁으로 다가서며 재킷 안쪽에 손을 넣었고, 뒤에서 지켜보던 조봉진은 커피포트를 움켜쥐었다.
털썩.
염려와 달리 김진용과 조봉진이 인상을 찌푸렸을 정도로 박중달은 병실 바닥에 제대로 무릎을 꿇었다.
“뭐야? 네가 우리 보스에게 시비 털라고 시켰어?”
“아닙니다, 형님.”
“그럼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무릎을 꿇고 이래?”
“그게, 형님.”
이번에는 박중달이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뭐냐고?”
“그게 형님. 카페에 있는 우장기라는 놈하고 소년원 동기여서 친하게 됐는데, 형님. 그놈이 원래 텀블이나 아자에서 여자애들 꼬드겨 야동 찍거나 여고생 치마 속 몰카랑 여자 화장실 영상, 그리고 관계 갖는 영상을 팔아먹는 놈이었습니다, 형님.”
무슨 전개가 또 이렇게 급하게 방향을 틀어?
묘한 침묵의 틈에서 김진용을 돌아보았던 이병렬이 시선을 가져왔다.
“그걸 너도 했어?”
“뒤 봐줬습니다, 형님.”
“몰카라면서? 그런 일에 뒤 봐줄 게 뭐가 있어? 말할 거면 빨리해, 이 새끼야!”
맞은편에 앉아 이병렬의 반응을 살피던 오상율의 목젖이 꿀렁였는데 소리는 나지 않았다. 긴장하는 바람에 올라온 헛기침을 악착같이 삼키는 눈치였다.
“그게 형님. 동영상 사 간다면서 사기 치는 놈들도 있고, 형님. 우장기가 찍은 영상을 자기 이름으로 다시 파는 놈도 있고, 형님….”
“커피숍 여자는 어떻게 된 거야? 어젯밤에도 두들겨 맞았다던데?”
머뭇대던 박중달의 정수리를 향해 이병렬이 질문을 던진 직후였다.
“동생은 그걸 어떻게 알아? 여자애가 맞는다는 거?”
“우리 보스에게 눈알 부라렸다기에 여기 병원에 있는 동생들 다섯 명 붙였습니다. 확인해보고 여차하면 파묻어 버리려고요.”
원래는 강성태가 지시했던 일이었다. 그저 어떤 관계인지 알아보라던 일을 이병렬은 돌아가는 상황에 맞춰 답했다.
김진용과 조봉진이 파리 먹은 두꺼비처럼 지켜보는 앞이었다.
“오늘 안 왔으면 정말 죽을 뻔했던 거구나.”
오상율이 탄식처럼 들리는 혼잣말을 내놓았다.
“봐, 이 새끼야! 여기 병렬이 동생 안 찾아왔으면 너랑 나는 그냥 죽은 목숨이었어! 그러니까 머뭇거리지 말고 있는 대로 말해, 얼른. 내가 병렬이 동생한테 따귀를 맞더라도 오늘 털고 갈라니까.”
이거 진짜 이상한데?
이병렬은 입을 다물고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김진용과 조봉진이 보기에는 의도적으로 만든 표정이었다. 그러나 함께 지내던 두 사람이라서 알아챈 거지, 오상율에게는 박중달을 죽일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빨리 말 안 해?”
이병렬의 눈치를 살핀 오상율이 재차 독촉한 다음이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형님.”
꿇은 무릎에 양손을 얹은 박중달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회원들을 모집해서, 형님. 여자애 불러낸 다음 관계 갖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내보냈습니다.”
이병렬은 미간을 좁히며 박중달을 내려다보았다.
“회원제는 또 뭐야?”
“한 달에 골드 회원 100만 원, 실버 회원 60만 원, 일반 회원 40만 원을 받고, 형님. 여자애 데려와서 원하는 자세로 관계 갖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잠깐.”
이병렬은 손까지 들어가며 박중달의 말을 막았다.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해. 너도 그 짓에 가담했어?”
“죄송합니다, 형님.”
박중달의 답이 나온 직후였다.
휘익! 쩌걱!
이병렬은 정말 죽이려고 그런 것처럼 박중달의 턱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끄윽. 끅.”
철퍼덕, 소리와 함께 널브러졌던 박중달이 버둥대는 몸짓으로 겨우 일어나서 악착같이 무릎을 꿇었다.
“그럼 그 여자는 뭐야? 왜 그런 놈하고 함께 지내?”
“약을 먹입니다, 형님.”
“그럼 그 뭐냐, 관계 갖는 장면을 찍히는 여자애들도 다 약을 먹였어?”
“거의 다 그랬습니다.”
이병렬이 발을 움찔하자 답을 하던 박중달이 양팔로 얼굴을 가리며 상체를 움츠렸다.
“하아, 이 씨발 놈.”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눈이 반쯤 뒤집힌 이병렬이 숨을 길게 내쉴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이병렬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동생을 마약 때문에 잃었던 이병렬이라서 어지간하면 전화 받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성태 형님이십니다, 형님.”
그러나 김진용의 보고에 이병렬은 이를 악물어가며 손을 내밀었다.
이 상황을 알고 전화한 건 아니겠지만, 솔직히 강성태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병실에서 박중달을 죽였을지도 모를 만큼 위험한 순간이었다.
“이병렬입니다, 형님.”
오상율 앞이라 예의를 갖춘 대꾸, 그리고 화를 악착같이 누르는 음성이었다.
-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병원에 갈 생각이었으니까 지금 바로 출발할게. 아니면 내가 다른 걸 해 주는 게 좋아?
이병렬의 상태를 알아챘는지 강성태의 질문이 무겁게 달려왔다.
“병원에서 뵙겠습니다, 형님. 조심해서 오십시오.”
통화를 마친 이병렬이 숨을 길게 내쉴 때였다.
“동생. 진짜 나 한 번만 살려주라.”
강성태가 온다는 사실을 눈치챈 오상율이 울기 직전의 얼굴로 매달렸다.
**
은선곤은 정세원의 앞으로 움직여 깍듯하게 인사했다.
“아침은?”
“예? 아, 먹었습니다.”
정세원은 이렇게 인간적인 질문을 건네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그룹 차원에서 경계해야 할 일들이 많은 시점이라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했던 은선곤은 짧게나마 당황한 뒤에 답을 내놓았다.
“지경그룹 곽 부회장이 입국한 사실을 알고 있지?”
“예, 회장님.”
“흐음.”
나직하게 숨을 내쉰 정세원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예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할 때 사용하는 방으로 움직였다.
비서실 정보망에 있는 내용까지는 집무실에서 대화한다. 그러나 그 이상 은밀한 대화는 항상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장소이자, 도청을 막아놓은 방을 이용했다.
“앉아.”
상석에 앉은 정세원이 지시하자 은선곤은 왼편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
“5조, 10조 원에 달하는 인수합병도 하루 전날 무산되는 세상이다. 멕시코 공사? 우리의 확정되는 손실이 예상되는 수익보다 크다고 판단되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어.”
시선을 떨군 은선곤에게 정세원은 아침을 먹었냐는 질문과 달리 냉정한 말을 쏟아냈다.
“네가 홍콩에서 곤잘레스 회장과 함께 인터뷰한 건 좋았다. 반대로 홍콩에서의 불미스러운 일이 사건화된다면 우리는 빠져나가기 어렵지. 거기까지 계산해서 했던 인터뷰냐?”
“말씀드렸던 대로 공사 발주자인 곤잘레스 회장의 권유에 따랐을 뿐입니다. 공사를 확정하는 데 도움 되리라고 판단했습니다.”
‘대답은 잘도 한다.’
은선곤을 바라보는 정세원의 눈과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에 대해서는 들었지? 한때 망나니로 소문났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각성하더니 대한민국 경제를 거머쥐었다. 심지어 중국 시장을 휘젓더니 지금은 아프리카에 집중하고 있다.”
“자료는 보았습니다.”
“천중명 회장의 심복 중 심복인 곽 부회장이 은밀하게 입국했다면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뭔가 하려던 말을 중단한 듯 침묵한 정세원은 잠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은선곤을 바라보았다.
고구마를 삼키게 하고, 물을 못 마시게 한 듯한 뻑뻑함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른 뒤였다.
“강성태 회장이 지시한 일이 있냐?”
“클럽과 카지노를 시작으로 신강남파가 지닌 업장의 회계 관리와 합법적 운영을 도와달라 해서 준비 중이었습니다.”
“폭력 조직은 업장이란 표현을 쓰나?”
“죄송합니다, 회장님.”
정세원의 엉뚱한 질문에 은선곤의 빠른 사죄가 있었다.
“오늘 너를 부른 건, 발목까지만 적시려던 일이 허리까지 잠기게 생겨서 그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무슨 뜻인지는 알 테니, 의견을 말해 봐.”
“도와주십시오.”
“허어!”
“멕시코 공사를 시작으로 반드시 그룹의 십 년을 책임지겠습니다. 지경그룹에 뺏기지 않겠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사람에게 투자해주십시오.”
숨도 쉬지 않고 오간 대화 끝에서 정세원은 입술에 힘을 준 채 눈가를 좁혔다.
“요구가 있다면 그에 따른 대가도 있어야지.”
“제가 받은 상속 지분을 내놓겠습니다.”
이 정도까지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티 내지 않으려 애썼으나 정세원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분명하게 올라와 있었다.
잠깐 사이에 정세원은 복잡한 느낌의 웃음을 그려냈다.
“내가 멕시코 공사를 지원해 주는 걸 끝으로 그룹의 도움을 바라지 말라고 했으니, 지분을 내놓게 되면 이익도 모두 네가 가지겠다는 뜻이구나.”
아니라고 할 줄 알았던 은선곤은 시선을 떨군 채 답을 내놓지 않았다. 의사는 분명했다. 정세원의 예측대로 지분을 내놓을 테니 도와주되 이익이 생긴다면 은선곤이 가지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뭘 해주길 바라냐?”
“차웅진 회장과 분쟁이 일어난다면 강성태 회장을 지원해 주십시오.”
기도 안 차는지 정세원은 탄식조차 내놓지 못했다.
“차 회장과 연결된 고리가 침묵하도록 무마해 주시면 됩니다. 제가 드린 지분이면 그 정도 비용을 감당하고 남으리라 짐작합니다.”
“무서운 놈. 내가 어떤 소리를 할지 짐작해 놓고도 말이 나올 때까지 눈빛 하나 바뀌지 않고 기다리다니? 하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정세원이 손을 들어 밖으로 휘저었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으니 밖으로 나가라는 의미였다.
조용하게 몸을 세운 은선곤이 깍듯하게 몸을 숙인 뒤에 방을 나섰다.
그가 나서기 무섭게 정세원은 팔걸이에 올린 손에 이마를 걸쳤다.
“천중명 회장이 저놈을 본다면 분명 데려가려 하겠지? 멕시코 공사까지 조건 없이 밀어줄 테고. 저놈은 그것마저 계산했겠지? 금으로 된 족쇄를 벗어던지고 훨훨 날겠다?”
혼잣말을 뱉은 정세원은 은선곤이 앉아 있던 1인용 소파를 매섭게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