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0권 - 12화 (405/513)

《405》2부 20권 - 12화

제5장. 그래야 공평하지.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차웅진의 머릿속과 심장에서 맹렬하게 날뛰었다.

승용차의 뒷자리에 앉아 앞에 세운 지팡이에 양손을 얹은 차웅진은 늘어진 눈꺼풀 속의 눈동자를 날카롭게 움직였다.

야쿠자는 태생부터 강성태 같은 깡패놈들과 다르다.

이들은 명예를 알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주군을 향한 무한한 충성심을 지닌 진정한 남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고작 강성태가 부리는 깡패들에게 수모를 당했다.

무엇보다 더할 수 없이 분할 테고, 다음으로 아카시 회장에게 죽음을 각오한 복수를 하게 해달라며 청할 게 분명했다.

계산은 섰다.

입술을 꿈틀거린 차웅진은 조수석에 앉은 야쿠자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잘 참았다. 이제부터 방심한 강성태에게 복수할 시간이다. 아카시 회장께 전화를 연결해 다오.”

쇠파이프에 제대로 얻어맞았는지 귀와 목덜미, 볼이 얼룩덜룩하게 물든 야쿠자가 고개를 숙인 뒤에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번호를 누른 그가 얻어맞은 자리를 가리듯 귀에 스마트폰을 붙인 다음이었다.

“사카모토입니다. 차웅진 회장께서 아카시 회장님과 통화를 원하십니다. 예. 예.”

고개를 조아린 야쿠자가 상체를 돌린 뒤에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그나마 아직은 공손함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태도였다.

- 모시모시.

“차웅진입니다.”

스마트폰을 들고 기다리던 차웅진은 아카시 회장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 지쳐 구부러졌던 등을 반듯하게 폈다.

- 개처럼 당했다고 들었다. 자결했다는 소식을 기다렸는데 전화를 하다니? 조센징의 천박한 본질은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질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카시 회장의 분노를 피해 살 방법을 얻어야 할 때였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실패하면 아예 자결할 생각으로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고, 그 바람에 함께 움직였던 아이들마저 수모를 당했으나 다행히 뜻을 어느 정도는 이룰 수 있었습니다.”

- 흐음.

못마땅한 반응이 먼저 넘어왔다.

여기에서 전화가 툭 끊기면 차웅진은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죽는다.

만약 살아보겠다고 어설프게 수를 쓰다가는 지금 타고 있는 승용차에서 죽임을 당해 시체로 집에 들어가게 된다.

나이도 많아서 노환 때문이라는 사망진단서 하나 만들면 뒤처리까지 말끔할 일이었다.

‘제발! 제발!’

차웅진이 간절한 심정으로 스마트폰에 집중할 때였다.

- 그 계획이란 걸 말해 봐.

하늘이 차웅진을 향해 내려주는 동아줄처럼 굵직한 아카시 회장의 음성이 넘어왔다.

“오늘 강성태를 혼자 만났습니다. 놈이 비겁하게 일행을 불렀는데 조태완도 있었습니다.”

대꾸 대신 인내하는 아카시의 숨소리만 넘어왔다.

“짐작했던 대로 강성태는 제게 무조건 항복과 전 재산을 요구했습니다.”

- 역시! 결국은 돈이었구나. 한국의 깡패 놈들은 다 같아. 그저 돈! 돈! 돈!

“권총을 사용할 수 있는 장소로 강성태를 부르겠습니다. 그 일까지만 도움을 주십시오. 오늘 당한 수모는 강성태를 죽인 뒤에 죽음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말끝에서 차웅진은 고개마저 숙였다.

조수석에 있던 야쿠자가 힐끔 룸미러를 들여다보았는데 권총을 사용할 수 있다는 차웅진의 말에 흥분한 눈치였다.

- 한국에서 권총을 사용했다가 문제가 되면 돌이키지 못해.

“그러시면 아이들은 닛폰 도를 들게 하고, 권총은 제가 직접 사용하겠습니다.”

- 기합이 좋군!

죽음으로 수모를 대신하겠다는 각오, 권총을 직접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들어서인지 아카시 회장이 만족한 느낌의 감탄을 던졌다.

- 강성태란 놈이 나오는 건 분명하겠지?

“오늘도 제가 가진 모든 재산을 요구하기 위해 시간을 냈던 놈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 반드시 나올 겁니다.”

- 요오시!

길게 끄는 아카시의 답에 차웅진은 들리지 않게 숨을 내쉬었다.

- 혹시 모르니 부산과 인천에 있는 아이들을 모두 보내마. 바닥에 떨어진 아카시 구미의 명예를 되찾는 건 물론이고, 너의 능력을 보일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좋은 소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차웅진은 주름이 길게 늘어진 눈꺼풀 아래에서 작은 눈알을 돌렸다.

‘강성태, 니폰 도로 팔과 다리, 목을 모조리 잘라주마.’

소파의 상석에 앉아 거침없이 꾸짖던 젊은 강성태를 떠올리며 차웅진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시샘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일본의 힘에 숙이지 않고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는 놈이라니, 심지어 놈은 야쿠자를 두들겨놓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의 적수가 되기는커녕 절대 상대가 되지 않는다. 혹여 일부 능력이 뛰어난 부분이 생기더라도 그건 모두 과거 일본이 내려준 가르침 덕분이란 점을 절대 잊어서도 안 된다.

늘 일본의 위대함을 가슴에 품었던 차웅진에게 강성태는 평생 지니며 살아온 그의 신념과 믿음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존재였다.

강성태가 살아 숨 쉬는 한 차웅진의 삶은 정말 일본 놈에게 매달린 매국노의 꼴이 된다.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제2, 제3의 강성태가 태어나는 일이었다.

놈이 죽어야 할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강성태가 죽어야만 차웅진은 마카오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결론은 강성태가 반드시 죽어야 했다. 그것도 차웅진이 마카오로 출발하기 전에 말이다.

**

강성태와 육개장을 함께 먹는 것만 해도 좋은 데 장소마저 신월동의 나이트 사무실이었고, 김진용까지 함께한 참이었다.

이병렬은 더할 수 없이 만족한 얼굴로 숟가락을 움직였다.

셋이서 시원하게 육개장을 먹고 났을 때, 바깥에서 작게나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영업 준비하는 애들 나온 모양이네.”

숟가락을 내려놓은 이병렬이 만족한 듯 티슈를 뽑아 입을 닦았다. 적당하게 먹은 강성태도 비슷하게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상처만 아니면 아르윈 가게에 가서 시원하게 한잔 마셔주는 건데 존나리 아쉽다.”

강성태는 웃는 얼굴로 이병렬의 아쉬움을 받았다.

“지금껏 달려온 거 후회한다는 뜻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누가 뭐랬어?”

“웃음이 묘하잖아?”

정말이지 이런 모습은 처음이지 싶을 정도로 이병렬은 속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식당용 넓은 사각 쟁반에 그릇을 담아 밖으로 내놓은 김진용이 책상 옆으로 움직였다.

얼핏 봐도 커피를 준비하는 눈치였다.

상처를 덕지덕지 붙인 남자 셋이서 밥을 먹었는데 그중 체격이 가장 크고, 인상도 제일 험악한 김진용이 뒷정리와 커피를 준비하는 걸 보면 삶이라는 건 보이는 것과 다른 면이 많은 게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짓을 더럽게 많이 한 거야. 그중에서도 특히 부산 강치 형님 깬 건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소파의 팔걸이에 팔을 걸친 이병렬이 당시를 떠올린 듯 고개를 저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테이블에 올려둔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강성태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누가 전화한 건지 보이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이병렬은 괜스레 책상 쪽으로 시선을 돌려 액정을 외면했다.

“차웅진이다.”

그러나 강성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병렬이 테이블에 올려둔 스마트폰에 집중했고, 커피를 준비하던 김진용은 움직임을 멈춘 채 소파 곁에 몸을 세웠다.

어차피 함께 있던 참이었다.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둔 채 스피커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다. 차웅진.

이거 봐? 뭔가 자신이 생겼는데?

이병렬을 돌아보았던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바쁘니까 용건만 말해.”

- 내 전 재산을 요구했었지?

“얼마 살지도 못할 인간이 말 참 많네. 어차피 내놓지도 않을 거 괜히 시간 끌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해.”

- 주마. 네가 말했던 내 재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병렬이 놀란 감정을 담은 눈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작업이지?’

그가 입술만 움직여 건넨 질문에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 나는 명예를 아는 사람이다.

“차웅진. 개에게 가장 큰 명예는 주인을 위해 꼬리 치다 죽는 거다. 그걸 알고서 하는 소리냐?”

- 끄응.

차웅진의 신음이 들리자 이병렬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터지려는 웃음을 막는 모습이었는데 확실히 과장된 동작이었다.

- 오늘 밤에….

“오늘은 바빠. 그리고 재산을 넘기는 데는 준비할 게 많아. 그러니까 내일 저녁으로 해.”

- 내일은 내가 비행기를 타야 한다.

“내가 그 시간을 고집한다면 비행기 시간을 늦춰줄 만도 한데? 아니면 출국 날짜를 하루 미루던가?”

‘그렇게 대놓고 말해도 돼?’

이병렬의 시선에 강성태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알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일 밤 9시가 어떠냐?

“좋아. 대신 낮에 회사로 변호사를 보낼 테니까 필요한 서류를 모두 준비해 둬. 나는 그 변호사가 서류에 이상 없다고 하면 움직일 거니까.”

- 그렇게 하면 낮에 일이 모두 끝나는 게 아니냐?

평소의 차웅진이라면 절대 내놓지 않을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건 또 그가 정말이지 최악의 궁지에 몰렸다는 자백과 같았다.

“사람을 부리기만 하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서류를 모두 준비해 놓고, 서명만큼은 만나서 하면 되지 않나? 서명이 없다면 기껏 만든 서류도 모두 허사가 될 테니까 나는 무조건 나가지.”

- 그렇구나. 그렇다면 나도 조건이 있다. 내가 오늘 갔었던 것처럼 너도 혼자 와라. 더는 수모를 당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

전 재산을 내놓는다는 차웅진의 상태가 어쩐지 모자란 사람처럼 느껴져서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장소는?”

- 내일 알려 주마. 그런데 네가 반드시 온다는 걸 어떻게 보장하지?

“나와 태완이 형님 일을 봐주는 변호사를 보낼 테니까 서류를 먼저 정리해. 변호사가 서류의 작성이 완료됐다고 알려 주면 나도 움직이겠다. 그리고 네가 그 변호사와 함께 약속 장소로 오면 되겠지?”

- 네가 안 나타나면 변호사가 몹시 곤란해질 거다.

“나는 내 사람을 함부로 두지 않아.”

- 알았다. 잠시 뒤에 문자로 번호를 보내 주마. 네가 말한 변호사가 그리 연락하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숨 가쁘게 오간 대화였다.

“내가 보낸 변호사는 이런 내막을 모른다. 알게 되면 일을 거절할 수도 있고. 그러니 눈치채지 않게 주의해. 하나 더. 내가 도착하면 먼저 변호사를 내보내.”

- 알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명예를….

차웅진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강성태는 바로 종료버튼을 눌렀다.

“햐! 이게 진짜 예상했던 그대로 되네!”

감탄했던 이병렬이 정신이 번쩍 든 눈으로 입을 열었다.

“변호사는?”

“이미 있잖아?”

“정말 태완이 형님과 먼 친척이라는 그 양반을 보낼 거냐? 부장판사 출신이라는?”

강성태는 고개를 저었다.

“공익 신고자가 살해당한 사건을 적당하게 무마해 덮어버린 검사가 변호사가 돼서 압구정동 비싼 아파트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거든. 그 양반이 애써줘야지.”

“아! 그 인간! 이야, 씨발!”

확실히 이병렬의 감탄사는 강성태와 많이 달랐다.

“검사 출신 변호사라면 당연히 차웅진을 알겠지. 그 인간의 재산을 넘기는 일을 부탁하면 수수료 욕심은 말할 것 없고, 차웅진과 인연을 맺고 싶어서라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하려고?”

“죽어야지. 조강치처럼. 그래야 공평하지.”

‘어떻게?’라고 물으려던 이병렬이 질문을 꿀꺽 삼켰다.

지금껏 편하게 이야기하던 강성태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어서였다.

“잠시만.”

이병렬에게 양해를 구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집어 번호를 찾았다.

통화버튼을 누른 다음이었다.

- 깡패! 너 진짜 이렇게 연락 안 하기 있냐?

이병렬이 알아들을 정도로 강선영의 음성이 스마트폰 밖으로 튀어나왔다.

- 여보세요? 깡패야?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런데 잠깐 보자.”

-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전화했나 싶었다. 어디로 가면 돼?

“지금 막 신월동에서 저녁 먹었거든.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까 장소만 정해.”

- 흠. 그럼 방배동에서 보자. 위치는 내가 문자로 보낼게.

“알았어. 지금 출발할 테니까 바로 문자 보내.”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검사라는 인간이 조강치의 돈을 처먹고 억울한 죽음을 덮은 사건이었다.

이런 복수가 맞는 걸까?

이미 공소시효마저 끝난 과거의 일이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염병할 검사들은 절대 손대지 않을 사건이었다.

“너도 똑같이 당해 봐.”

스마트폰을 향해 혼잣말을 내뱉는 강성태를 이병렬이 무거운 얼굴로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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