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2부 21권 - 12화
자정이 다 됐을 때쯤 이종환에게서 전화가 있었다.
- 지방에 내려간 놈이 둘 있는데 통화로 분명하게 답을 들었고, 서울에 올라가 있던 세 놈은 강서구로 불러서 생활 접는 거 확인했습니다, 형님.
“고생했다. 다친 사람은?”
- 아무도 없습니다, 형님.
이어서 이종환은 업장 사장 둘이 왔었다는 말과 함께 그들이 남겼다는 당부를 강성태에게 전해주었다.
“그건 병렬이랑 의논해서 처리하는 거로 하자. 야식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 올라가서 제가 챙기겠습니다, 형님.
이병렬이나 주변 손님들, 가게 주인은 믿지 않겠지만, 혹시 일이 있을지 몰라 강성태는 술을 조절하던 참이었다.
다행히 더는 큰 사고 없이 천안이 정리되었으니 이제는 강성태 일행도 서울로 향할 시간이었다.
“그럼 운전할 사람 한 명만 여기로 보내 줘.”
위치를 설명한 강성태는 통화를 마쳤다.
잠시 후에 가게 앞으로 승용차 한 대가 달려왔고, 덩치 한 명이 들어와 자동차 열쇠를 받아서 갔다.
술을 한 잔 더 마신 뒤였다.
강성태와 이병렬이 타고 왔던 승용차까지 두 대가 다시 가게 앞에 멈췄다.
“이제 일어나자.”
강성태의 말에 이병렬이 테이블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옆에서 김진용이 조봉진을 세워 그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
참 오랜만에 강성태만큼이나 술을 잘 이기는 사람을 봤는데 그가 김진용이었고, 존경스러울 만큼 악과 깡으로 버티는 인간도 있었는데 그건 또 조봉진이었다.
앉은 채 입적했다는 스님은 들어봤는데 술 마시다가 앉아서 기절한 인간은 조봉진이 처음이었다.
김진용이 조봉진을 차로 데려가는 사이에 강성태는 계산을 마쳤다.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가시고 다음에 또 오세요.”
깡패들이란 사실을 눈치채고 조심하던 아주머니와 사장이 연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주변 손님들은 물론이고, 사장과 직원들이 놀랄 정도로 소주와 맥주를 마셨지만, 큰 소리 한 번 안 냈고, 하다못해 당근 썰어놓은 걸 가져다줄 때마다 고맙다며 인사한 게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눈치였다.
훈훈하게 인사를 마친 강성태는 앞에 세워둔 승용차로 움직였다.
강성태와 이병렬, 김진용이 한 차, 기절한 조봉진은 조금이나마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덩치들이 가져온 차에 태웠다.
승용차가 움직인 다음이었다.
더는 버티기 어려운 것처럼 이병렬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잠에 빠졌다.
이병렬에게는 힘들었을 하루였다. 그리고 그의 노고 덕분에 천안 등의 하부조직과 그들이 관리하는 숙소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해결 방법이 거칠기는 했으나 큰 어려움 없이 천안의 정리가 끝났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 밤 천안에서 있었던 일들은 앞으로 강성태와 이병렬의 지시를 어겼다가 걸리면 어떤 꼴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로 남을 게 분명했다.
이 정도면 됐다.
고속도로에 들어서 속도를 높인 승용차 안에서 강성태는 이병렬을 돌아보았다.
‘고맙다.’
술에 취한 이병렬은 강성태의 시선을 알지 못했고, 그에 상관없이 승용차는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신월동에 도착한 승용차가 프리 스테이션 앞에서 멈췄다.
“오셨습니까, 형님?”
잠시 들르겠노라 전화했고, 기다리지 말라고 전했었다. 그런데도 입구에서 기다리던 아르윈이 필리핀 조직원들과 다가와 문을 열었다.
“병렬이 절대 혼자 두지 말고 진용이 네가 챙겨.”
“알겠습니다, 형님.”
조수석에서 내려 인사한 김진용이 차를 타고 출발한 다음이었다.
“모시겠습니다, 형님.”
아르윈이 프리 스테이션을 향해 몸을 돌렸다.
손님이 노래를 부르는 모양이었다.
계단을 타고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남자의 음성과 밴드의 연주, 코러스를 넣는 필리핀 가수의 음성이 복잡한 거리를 향해 달려 나왔다. 게다가 연주와 코러스를 넣는 필리핀 가수들의 음성에 흥겨움과 기쁨이 묻어 있는 거로 봐서 영업이 잘되는 느낌이었다.
의논할 게 있어 들렀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꾸려가는 업장에 굳이 들어가서 영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들어가서 손님들 기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 앞에 커피전문점으로 가자.”
“무대에 오른 연주자와 가수는 다른 지시가 없는 한, 누가 오더라도 따로 인사하지 않습니다, 형님. 제가 룸으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강성태의 배려를 알아차린 모양으로 아르윈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야.
강성태는 아르윈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홀에 놓인 테이블에 손님이 가득했다.
무대는 말할 것 없고, 서빙을 하는 직원들에게 강성태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뒤에 시선으로 손님들을 가리켰다.
이 시간에 젊은 친구가 라이브 카페에 혼자 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몇 명이 돌아본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술기운이 많이 올라 있어서 손님들 역시 강성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홀을 지나 복도를 걸은 아르윈이 가장 안쪽 룸을 열었다.
강성태가 상석을 비우고 오른편에 앉았고,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하며 인사한 아르윈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 직후에 필리핀 조직원이 들어와 시원한 음료와 향이 괜찮은 커피를 앞에 놓아주었다.
“키란은?”
“오늘 밤은 남양주에 있겠다고 들었습니다, 형님. 고룡동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눈치였습니다.”
어쩐지 키란도 점점 더 깡패가 돼 간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안부는 여기까지가 좋았다.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연락이 있었습니다.”
문을 돌아본 아르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필리핀 보스께서 30명을 추가로 더 보냈고, 이번 작업에 목숨 걸고 협조하라는 지시를 마카오에 있는 필리핀 직원들 전체에 내렸습니다.”
이건 강성태가 바라던 내용이 아니었다.
“덕분에 호텔마다 조직을 따로 구성해서 정보를 캐고 있습니다, 형님.”
어쩐지 러시아의 히트맨을 처리할 때 모텔 종업원들의 협조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평소에도 필리핀 조직은 호텔 직원들을 이용해 정보를 얻는 모양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마카오에 있는 호텔 직원들이 한국의 모텔 직원들만큼만 협조해준다면 더 바랄 것 없는 상황이었다.
“직원이 없는 호텔은 없지?”
“은선곤 씨에게서 받은 리스트에 있는 호텔에는 모두 우리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형님. 혹시 몰라서 근무일정표까지 확인해두었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흠잡을 것 없는 처리였다.
“부탁한 약물은?”
“마카오로 출발하는 30명이 나눠서 소지했다고 들었습니다.”
왜 인원을 더 보냈나 했더니 검색에 걸릴 때를 대비해 강성태가 부탁했던 약물을 나눠 지닌 모양이었다.
됐다. 이 정도면.
강성태는 꼼꼼하게 지시를 이행한 아르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안팎의 환상적인 조화라고 해야 하나, 신강남파의 내부를 이병렬이 다져주었고, 마카오 회의에 필요한 준비를 아르윈이 거의 해결해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 손목을 부러트렸거나, 아예 짓이겨 놓았다면 지금 어떤 관계로 남았을까?
강성태는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잠시 떠올랐던 지난날을 흘려보냈다.
“지금부터 출국할 때까지 방심하는 일 없도록 하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해.”
“알겠습니다, 형님.”
“항공편과 숙박 관련해서는 은선곤과 의논해서 해결하고, 내일부터 바빠서 어쩌면 마카오에서 보게 될지 몰라. 그렇게 알고 움직여.”
“예, 형님.”
지시와 당부를 전한 강성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가 차로 모시겠습니다.”
말릴 틈도 없이 아르윈이 몸을 세웠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마카오 회의를 앞둔 시점이었다.
전에 모터사이클에 당할 뻔한 일도 있어서 강성태는 다른 말 없이 아르윈의 뜻을 받아들였다.
**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난 강성태는 가벼운 운동으로 땀을 흘렸고, 이어서 후련하게 씻었다.
이렇게 운동하고 씻는 일이 좋긴 좋다. 그러나 강성태가 보기에도 믿기지 않는 회복력이어서 은근히 염려되는 점도 없지 않았다.
‘진짜 괴물이 돼가나?’
이런 건 나중에 안다미와 의논하기로 하고.
아직 시간이 남아서 강성태는 커피를 내려 식탁에 앉았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시간이 빨라서 여유를 부렸는데 그 틈을 파고든 전화가 있었다.
“강성태입니다.”
- 너무 일찍 전화한 건가?
“아닙니다. 샤워하고 커피 마시고 있었습니다.”
- 전화를 걸고 보니까 아차 싶더라고.
분명 밤새 지방의 일들을 챙기다가 아침을 맞았을 조태완이었다. 급한 마음에도 나름으로 아침을 기다렸다가 걸었을 전화여서, 잠을 깨웠다 한들 불평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 경상도와 부산은 교창이가 어느 정도 단속했고, 충청도와 호남은 배근이가 조금 전에 마지막 숙소를 확인했다고 연락했었다.
“형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 나야 경찰 단도리한 게 전부였으니까 고생이랄 것도 없지. 아무튼, 밤사이에 천안 일이 소문 나면서 숙소 생활하는 애들이 연락한 것도 있고, 돈을 빼돌렸던 놈들이 먼저 찾아와 고개 조아린 것도 꽤 있어서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게 아닌가 싶다.
조태완의 말대로라면 고작 하룻밤 사이에 신강남파 내부 단속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성과가 있었다.
물론, 애꿎게 돈을 뺏긴 천안의 숙소 덩치들마저 생활을 접게 한 것만큼은 가혹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대신 이미 썩은 물이 든 천안을 털어낸 파장과 효과가 대단해서 최소한 돈을 빼앗는 일만큼은 확실하게 잡혔다고 볼 수 있었다.
- 내가 보기에는 이 정도면 적당한 거 같은데 보스는 어디까지 생각하는 거야?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계속 잘못된 일이 없는지를 살필 거고, 일반인들을 상대로 협박이나 폭력, 내려준 돈을 부당하게 독차지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천안처럼 해결할 생각입니다.”
강성태의 의지가 건너가고 나자 조태완의 나직한 숨소리가 들렸다.
- 내부 단속은 어느 정도 된 거 같은데, 갑자기 너무 누르면 다른 쪽이 터지니까 그 점도 조금은 고려해 줘.
“형님 말씀 잊지 않고 살피겠습니다.”
- 그래. 하여간 계속 살펴보고 일이 있으면 연락할게. 몸 좀 챙겨. 알았지?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누룽지를 끓여 아침을 해결한 강성태는 정장을 꺼내 입은 뒤에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곤잘레스와 바르지오가 머무는 호텔로 향하는 길이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이번에는 이병렬의 전화가 있었다.
어제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이 시간에 전화를 해?
어지간히 독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강성태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침은 어떻게 했어?
“간단하게 해결했고, 곤잘레스 회장에게 가는 길이다.”
- 태완이 형님과 통화했다며?
“지금 택시 안이라서 나중에 말하려고 했었지.”
- 그래서 내가 동생들 불러서 타고 다니라잖아. 하여간 참, 말 안 듣는 보스라니까. 그건 그렇고.
아쉽다는 투로 툴툴대던 이병렬이 은근하게 음성을 낮췄다.
- 속 괜찮냐?
“어제 적당히 마셔서 나는 괜찮아.”
- 아, 진짜. 뭐 하나 인간적인 면도 있어야지, 그렇게 멀쩡하면 내가 뭐가 돼?
“진용이도 멀쩡하잖아?”
- 그놈이 독해서 버틴 거지, 지금도 힘들어서 낑낑대는데 뭐. 봉진이 새끼는 나 모르게 토하느라 난리고.
그게 독해서 버틴 거라고?
강성태는 신월동에 도착할 때까지 멀쩡한 태도로 버텼던 김진용을 떠올렸다.
- 종환이랑 섭우 만나보고 남양주 모텔에 가 있을 테니까 그리 연락 주라.
이병렬과 통화를 마친 덕분에 좀 더 홀가분해진 심정으로 강성태는 호텔에 도착했다. 그런 뒤에 곧장 바르지오의 객실로 올라갔다.
마카오 회의가 다가오면서 바르지오 역시 피곤에 절은 몰골로 강성태를 맞았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그는 십여 장의 A4 용지를 건넸다.
“이게 가장 최근에 업데이트된 내용이다, 미스터 강.”
호텔마다 계획한 공연의 일정표였다.
강성태는 꼼꼼하게 장소와 시간, 내용을 확인했다.
“러시아 대원들의 움직임은?”
“여기. 한국처럼 CCTV가 잘 돼 있지 않아서 영상이 없는 부분은 카드 사용 내역, 움직인 거리를 바탕으로 추정했고, 그런 부분은 밑줄로 표시했다. 이건 삼합회, 그리고 이건 야쿠자.”
그가 건네주는 자료를 순서대로 받아든 강성태는 확인처럼 시선을 들었다.
“물론 자네의 지시대로 아르윈에게도 전송했다.”
“고생했어. 멕시코에서 오는 경호팀에 관한 자료는?”
꼼꼼하기도 하지.
지친다는 얼굴로 몸을 돌렸던 바르지오가 이력서처럼 보이는 서류를 가져왔다.
“아무리 바로 잡으려 해도 썩은 인간들을 모두 솎아내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지? 아직도 가페 출신이 돈에 팔려 곤잘레스 회장을 노린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심지어 이쪽에서 건넨 돈을 받은 뒤에 말이지.”
대강이나마 자료를 살핀 강성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위로 가나?”
“그래야지. 경호팀이 오기 전에 존 보스만과 의논할 게 있거든.”
강성태를 배웅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바르지오가 오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뭘?”
“언제고 미스터 강, 자네가 지휘관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 같아서.”
말을 마친 그는 문고리를 잡아당긴 뒤에 생각난 게 있다는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놈은 몰라도 삼합회 섭충명만큼은 분명한 처리를 부탁해.”
“그 인간을 놓치면 이번 작전의 절반이 실패로 돌아가는 건데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이래서 내가 미스터 강과 한편에 서는 거지.”
강성태의 답을 들은 바르지오가 더 할 수 없이 만족한 미소를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