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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21권 - 20화 (433/513)

《433》2부 21권 - 20화

섭충명은 가뜩이나 퀭한 얼굴에 황당함과 분노, 독기, 좌절의 감정이 있는 대로 뒤섞여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 새끼는 미쳤어. 진짜 미친놈이야.”

지시를 기다리며 앞에 서 있던 조직원들이 보기에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섭충명이 미친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하기는, 마카오에 도착한 날, 그것도 아침 식사를 하기도 전인 식전 댓바람에 태국 조직을 완전히 궤멸시키고, 베트남 조직은 대가리만 겨우 살아남는 수준으로 몰살시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물론, 윈팰리스 호텔에서 강성태를 감시하던 태국 조직원 셋, 베트남 조직원 셋, 합해서 여섯이 살아남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 그 숫자를 따지는 건 그야말로 의미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진짜 황당한 건 따로 있었다.

이 사건으로 강성태와 신강남파를 걸고넘어지기도 어렵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윈팰리스 마카오를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의 호텔을 감시하던 놈들은 아예 시체마저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러니 사건을 시끌시끌하게 만들어봐야 필리핀 조직원 놈들만 잡아들이는 선에서 마무리될 확률이 높았다.

삼합회가 곤잘레스 이두안을 난사한 뒤에 내놓으려던 변명, 그 방식을 섭충명이 먼저 얻어맞은 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그 짝이었다.

“왜 그랬어?”

“노동자를 더 고용하게 하려는 조직 간의 다툼이었습니다.”

마치 곤잘레스 이두안을 사살하고 나서 내놓을 핑계를 알고 있다는 듯이 강성태는 깔끔하게 태국과 베트남 조직을 정리해버렸다.

이대로 가면 섭충명은 조직에 의해 제거당한다.

체면과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삼합회의 특성상, 홍콩에서 바르지오 만시니를 놓친 이후에 또다시 마카오에서 이런 실패를 거듭한 섭충명을 그대로 둘 리는 없었다.

그나저나 강성태도 대단하기는 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마카오에서 이렇게까지 시원하게 총질을 해댈 거라고는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했다.

아무튼, 오늘 식전 댓바람에 있었던 총질로 동남아 조직을 이용해 곤잘레스 이두안을 난사하려던 계획은 완벽하게 박살 나 버렸다.

과연 섭충명은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떤 결정을 내릴까?

반쯤은 걱정되는 심정으로, 또 나머지 반은 궁금한 얼굴로 조직원들이 바라보는 앞이었다.

“미친놈은 몽둥이로 다스려야지.”

악착같이 혼을 부여잡은 섭충명이 고개를 들었다.

“유리 마고첸프에게 연락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강성태를 제거하라고 전해.”

“예.”

“그리고 아카시 미키야토 회장에게 연락해서 오전 중에 만날 수 있는지 물어봐.”

“알겠습니다.”

섭충명의 지시를 들은 조직원이 고개를 짧게 숙이고 밖으로 움직였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몸을 숨기던 러시아 특수부대원들을 동원하는 게 첫 번째, 지금껏 슬며시 외면했던 일본 야쿠자들을 이용하는 게 두 번째, 섭충명은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버둥대고 있었다.

**

객실로 돌아온 강성태는 가장 먼저 바르지오 만시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떻게 됐어?

“태국과 베트남 조직은 해결했다. 우리 쪽은 가벼운 부상 한 명이 전부다.”

- 하아.

어떤 예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안도와 함께 기가 막혀 하는 바르지오의 탄성이 넘어왔다.

“섭충명과 유리 마고첸프, 아카시 미키야토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방법이 필요해.”

- 내가 기다리던 시간이지. 섭충명, 그 개자식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내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원하는 정보를 넘겨주지.

강성태의 요구에 바르지오 만시니는 섭충명을 향한 적개심을 먼저 드러냈다.

- 잠시 뒤에 어플을 설치하겠냐는 질문이 떠오르면 오케이 버튼을 눌러. 어플을 실행하면 위쪽에 세 가지 항목이 뜰 거다. 삼합회, 러시아 특수부대, 다른 하나는 일본 야쿠자들의 움직임이다. 혹시 스마트폰을 다른 놈이 들고 다닐 수 있으니까 그 점을 조심해.

“고맙다, 화이트 테일.”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테이블로 움직인 뒤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키란. 저격용 총을 가져다줘.”

“예, 형님.”

문 앞을 지키는 것처럼 서 있던 키란이 거실 구석에 모로 세워두었던 하드 케이스를 가져와 강성태 앞의 테이블에 올렸다.

은선곤이 정말이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철컥! 철커덕. 철컥.

맥밀란 Tac-50 저격용 소총을 꺼낸 강성태는 노리쇠를 당긴 뒤에 방아쇠를 당겨 반동을 확인했고, 이어 레이저 포인트 조준경을 포함한 액세서리를 장착한 뒤에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조준경을 들여다본 강성태가 단단한 표정으로 소총을 내렸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테이블에 올려둔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아르윈입니다, 형님. 식사 마치고 병렬이 형님을 객실에 모셨습니다.

아르윈은 홀가분한 음성이었다.

“고생했다. 이제부터 다음 단계로 넘어갈까 하는데, 호텔 직원들에게 섭충명과 유리 마고첸프, 아카시 미키야토가 움직이면 바로 연락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나?”

- 이미 지시해 놓은 일입니다. 다시 한번 연락해서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형님.

답을 한 아르윈이 강성태를 붙들었다.

- 본국의 보스에게서 연락이 있었습니다. 오늘 오전의 일에 크게 만족하신다면서 혹시 문제가 될 것 같으면 작업했던 히트맨들을 자수시키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눈짓으로 키란에게 저격용 소총을 가리킨 강성태는 좀 더 여유 있는 자세로 통화에 집중했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냐. 만에 하나, 검거에 나선다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빠져나가고 혹시 체포되는 히트맨이 있다면 내가 알아서 작업할 거니까, 그 점을 분명하게 전해줘.”

- 알겠습니다, 형님. 먼저 호텔 직원에게 지시하고 보스와 통화한 뒤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직후였다.

우우웅.

짧은 진동과 함께 바르지오 만시니가 말했던 애플리케이션의 설치 질문이 스마트폰에 떠올랐다.

저격용 소총의 액세서리를 하나씩 분해해 하드 케이스에 담는 키란의 앞에서 강성태는 OK 버튼을 눌렀다.

강성태가 다음 타깃을 정했다는 사실을 키란은 확실히 알아챈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타깃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은선곤은 저격용 소총이 주는 위압감과 ‘저런 걸 마카오에서 사용한다고?’ 하는 얼굴로 멍하니 바라볼 뿐, 다음 타깃은 아예 생각조차 못 하는 얼굴이었다.

**

아치형 받침대 위로 2차선 넓이의 다리가 하늘을 가로지르듯 걸려 있고, 그 아래로 지나가는 도로의 중간에 둥그런 화단을 조성해 로터리를 형성한 공원이었다.

화단을 타고 빙 돌아 방향을 바꾸거나 한쪽으로 차를 세울 수 있도록 공간이 확보된 곳에 검은색 승용차가 잔뜩 몰렸다.

평소에도 한적한 장소인 데다, 삼합회와 야쿠자의 조직원들이 양쪽에서 올라오는 차량을 막아버린 바람에 로터리 근처는 완벽하게 조직원들의 세상이었다.

초대한 사람이 차를 대접하는 게 세상의 평범한 이치인 터라, 삼합회 조직원들은 둥그런 화단의 한쪽에 호텔에서 가져온 듯한 테이블과 의자, 하얀 식탁보를 깔고서 아카시 미키야토를 맞이했다.

하늘에 걸린 다리, 둥그런 화단, 테이블 옆의 산에 가득한 나무들, 분위기며 날씨는 마카오의 현재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화창했다.

“좋은 장소군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상체를 숙인 삼합회 조직원이 아카시 미키야토의 말을 섭충명에게 전해주었다.

“차를 드십시오. 본토에서 칠십 년을 숙성한 차입니다.”

이번에는 야쿠자의 조직원이 섭충명의 말을 아카시 미키야토에게 전해주었다.

약간은 거만한 표정으로 아카시 미키야토가 찻잔을 들었다. 그는 먼저 찻잔을 좌우로 움직여 향을 음미했고, 이어 고개를 기울여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찻물을 머금은 그가 고개를 들어 섭충명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이런…?”

섭충명은 마치 시체나 귀신을 보는 듯이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놀란 소리를 내놓았다.

섭충명만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 서서 아카시 미키야토의 말을 전해주던 삼합회의 조직원마저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무엇 때문에?

이유를 알지 못해서 바라보는 아카시 미키야토의 이마 정중앙에 붉은색 점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아카시 미키야토가 설마 찻잔에 벌레라도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다보는 순간이었다.

타아아아-앙!

섬뜩한 총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허공을 뚫고 기다란 선을 그려낸 투명한 궤적이 보였으며,

퍼으으으윽.

곧바로 찻잔에서 시선을 든 아카시 미키야토의 이마 위쪽이 배트에 맞은 수박처럼 요란하게 터져나갔다.

쨍그랑.

찻잔이 먼저 떨어졌고,

콰등. 콰드등. 철퍼덕.

탁자에 걸쳤다가 의자와 함께 넘어간 아카시 미키야토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삼합회 조직원들이 고함을 지르며 섭충명을 있는 대로 둘러쌌고, 야쿠자 조직원들이 널브러진 아카시 미키야토의 상체를 붙잡으며 테이블 주변이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권총을 꺼내 든 삼합회 조직원들이 사방을 겨누었는데 보이는 건 하늘을 가로지른 다리와 주변에 빼곡한 나무들이 전부였다.

“부산주?”

섭충명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던 조직원이 불렀을 때, 그는 오전보다 더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나를 쏠 수 있었는데 왜?”

듣고 보니 그렇다.

아카시 미키야토의 이마를 뚫을 수 있는 상황에서 왜 섭충명의 뒤통수를 노리지 않았을까?

너 따위 언제고 죽일 수 있다는 여유일까?

“주변을 뒤져! 아래에 전화해서 이곳에서 나가는 차들과 사람을 모조리 붙잡아! 누구도 못 나가게 해!”

그나마 생각이 돌아가는 삼합회 조직원이 부하를 향해 고함을 버럭버럭 지르고 있었다.

**

아르윈은 그의 객실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 살다 보면 행운을 만날 때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너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을 만났다.

“감사합니다, 보스.”

- 내게 감사할 일은 아니지.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너에게 감사해야지. 이로써 우리 가디언스파가 태국이나 베트남 놈들보다 한 수 위라는 게 증명됐으니 말이다.

필리핀 보스는 더할 수 없이 만족한 음성이었다.

- 믿을 수가 없어. 일본의 삼대 조직 중 하나인 아카시 구미의 보스 아카시 미키야토의 머리를 날려버리다니. 그것도 증거 하나 없이. 저격용 총을 보내면서도 이런 소식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성태에 대한 칭찬을 듣는 동안, 아르윈은 묘하게 올라온 감동에 가슴이 울컥했다.

- 게다가 히트맨들을 절대 자수시키지 말고 알아서 빠져나가라는 지시를 내리다니.

필리핀 보스가 연달아 감탄을 쏟아낸 다음이었다.

- 아르윈.

“예, 보스.”

그가 나직하게 불러서 아르윈은 얼른 감정을 정리한 뒤에 답을 내놓았다.

- 네가 우리 조직 2인자인 건 알고 있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스.”

- 한국의 보스께서 지시하는 일이 있다면 내 허락을 받지 않고 먼저 움직인 뒤에 나중에 보고하도록 해.

이번에도 아르윈은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이전에 이런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 네가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을 잡은 만큼, 나와 우리 조직 역시 비슷한 기회를 맞았다. 이럴 때 머뭇거리면 행운이란 놈이 불행이란 친구를 부르지. 믿겠다, 아르윈.

“보스께서 실망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흠하하하하.

지난번보다 더 통쾌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후우.”

아르윈은 테이블로 움직여 자리에 앉았다. 그와 함께 방에 있던 조직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앞이었다.

“러시아 놈들은?”

“조금 전에 한 놈이 로비로 나와 차량 렌트를 알아본 걸 제외하고는 아직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르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마카오를 잘 아는 필리핀 조직원 두 명과 함께 움직인 강성태에게서 아직 연락이 없었다.

‘무사하시겠지?’

하기는, 키란과 함께인데 그깟 놈들이 강성태를 어떻게 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성태 형님께서 감시를 당부하셨다. 혹시라도 실수가 있으면 안 되니까 다시 한번 연락해서 단도리 해.”

“예, 형님.”

아르윈이 다부진 표정으로 내린 지시에 필리핀 조직원이 단단한 얼굴로 답을 내놓았다.

이미 경험했다. 강성태의 놀랍고 대단한 능력을.

물론, 총질은 필리핀 히트맨들이 주도했지만, 막말로 무식하게 느껴질 만한 계획을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지시하고, 또 아카시 미키야토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능력과 배짱이라니.

게다가 히트맨들을 자수시키겠다는 제안마저 거절하고 빠져나가게 하라는 그 넓은 배포까지.

또한, 한국에서 온 필리핀 조직원들은 안내와 심부름만 하고도 한 사람당 1억 원씩을 받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1억 원조차 본토의 조직에서 전혀 손대지 않겠다는 언질도 있었다.

아마 지금 강성태가 전화해서 러시아 특수부대 놈들에게 권총을 난사하라고 지시하면, 필리핀 조직원들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일제히 달려갈 게 분명했다.

생각이 달려가던 아르윈은 바람 빠지는 사람처럼 웃었다.

아니, 아카시 미키야토의 머리를 날렸는데 도대체 왜 섭충명을 살려두었을까?

이럴 때 보면 강성태도 참 잔인한 구석이 있구나 싶어서 나온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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