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2권 - 17화 (450/513)

《450》2부 22권 - 17화

제6장. 제 뜻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기가 막힌 전개에 강성태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소파 주변에 쓰러졌던 두 놈이 꿈틀대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둬요.”

건방진 건 관두고라도, 요청이 아니라 아랫사람에 지시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게 진짜, 끝까지?

강성태가 고개를 틀며 노려보자 이제야 위험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눈치를 살핀 아카시 마오가 다리를 풀었다.

“말로 하면 되잖아요?”

마치 폭력의 피해자인 양 강성태에게 건넨 항의였다.

도대체 어떤 드라마를 보면 이 장면에서 저런 해석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먼저 시작한 건 누가 뭐래도 아카시 마오였다.

그녀의 항의가 나온 직후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김진용의 스마트폰이 적막한 스위트룸에서 요란하게 울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여보세요? 예, 형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형님.”

스마트폰을 내린 김진용이 시선을 돌렸다.

“종환이 형님이 대림동 식구들하고 로비에 계신답니다. 앞뒤 출입구와 주차장은 강남 식구들이 맡았고, 고룡동이 광주 식구들하고 계단으로 올라오겠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형님?”

통화 내용을 알려준 김진용이 버적대며 몸을 세우는 야쿠자 두 놈을 탐욕스럽게 노려보았다. 당장 놈들의 얼굴을 세게 걷어차고 싶은 욕망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일단 대기하라고 해.”

김진용에게 지시한 강성태는 아카시 마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카시 미키야토, 네 선친은 차웅진을 시켜서 내 목숨을 두 번이나 노렸어.”

“선친이요?”

“살아있는 아버지는 부친, 죽은 아버지는 선친. 그러고도 모자라서 마카오까지 달려와 삼합회와 손잡고 다시 나를 노렸다. 우리가 만만하게 보인 모양인데 내일 정오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다음은 여기 병렬이나 진용이가 너를 상대할 거다.”

“정오요?”

이게 알고 이러는 거야, 진짜 모르는 거야?

“낮 열두 시는 정오. 밤 열두 시는 자정.”

“아….”

지금이 단어를 깨닫고 익힐 상황은 아니었는데 바로 이런 모습이 아카시 마오가 철부지란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더 말을 나누기 싫어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일본에 근거가 있으면 좋지 않나요? 우리 아카시 조직을 신강남파가 인수하면 어때요?”

“일본이다. 우리가 가서 지켜줄 수도 없을뿐더러 아카시 조직을 인수해서 얻을 것도 없어.”

“관동 연합 모임이 있어요. 관동 삼대 야쿠자와 하부 조직들이 모두 모여요. 그 자리에 강 회장님이 참석해서 아카시 조직과 함께한다고 발표하면 돼요.”

“그래서 내가 얻는 게 뭐냐고?”

“막대한 자금, 파칭코 영업권, 유흥업소 운영, 더 필요해요?”

“그런 건 멕시코 공사의 일부분도 안 돼. 거기에 기억이 흐릿한 모양인데 네 아버지가 나를 노렸고, 마카오에서 네 아버지를 죽인 사람도 나다. 엉뚱한 수작 부리지 말고 내일 정오까지 한국을 떠나.”

더는 말을 섞을 이유가 없어서 강성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입구를 향해 몸을 돌린 뒤에 시선으로 장기봉을 가리켰다.

이병렬은 강성태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아보았다.

“진용아. 저 새끼 챙겨라. 가자.”

“예, 형님.”

답을 한 김진용이 바로 움직여 벽 모서리에 기절한 척 기대 있는 장기봉의 뒷덜미를 비틀 듯이 움켜쥐었다.

김진용은 체격이 크고, 힘이 좋았다. 그는 버티는 개를 끌듯 장기봉의 뒷덜미를 붙들고 복도로 나섰다.

더는 안 되겠다고 계산한 모양이었다.

“살려주십시오, 형님!”

뒤늦게 장기봉이 누구에게인지 모를 애원과 함께 악착스럽게 김진용의 손목을 붙들고 매달렸다.

“괜찮으니까 더 크게 소리 질러. 경찰을 부르든, 호텔 보안 요원이 달려오든,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 보고. 서면 식구들이 네 모가지 자르는 조건으로 우리 신강남파에 들어온다던데 결과가 궁금하기는 하다.”

고개를 돌린 이병렬의 냉정한 말이 있고 나서 거짓말처럼 장기봉의 애원이 뚝 끊겼다.

“진용아. 나는 보스랑 로비에서 내릴 테니까 저 새끼 데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시끄럽게 굴면 바로 연장 주고.”

“알겠습니다, 형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는 거라면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로비나 지하 주차장에서 살려달라고 고함이라도 지르는 게 현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살벌한 지시를 눈도 깜짝 않고 내린 이병렬이나 쇳소리 가득한 음성으로 답하는 김진용, 목을 자르겠다는 서면 식구파의 소식에 장기봉은 완전히 얼어붙은 눈치였다.

어쩌면 손가락 하나 자르고 용서할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비 맞은 개처럼 축 늘어진 장기봉의 눈에 어려 있었다.

로비에 도착한 강성태와 이병렬이 엘리베이터를 나서자 이종환이 다가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고작 며칠 못 봤다. 그런데도 이종환은 이렇게나마 다시 보게 된 게 반갑다는 얼굴이었다. 그만 그런 게 아니라 대림동 식구들 모두 비슷한 표정으로 강성태와 이병렬을 향해 고개 숙였다.

“고생들 했는데 이만 돌아가야 할 거 같다. 오늘은 시간이 그렇고, 천안 일도 들을 겸 봐서 밥이나 먹자.”

“예, 형님.”

강성태가 보기에 비장하게 달려온 것치고는 너무도 허무한 결말이었다.

“괜히 불렀나?”

입구를 나서며 강성태가 물었고,

“위에 있는 여자가 확인할 거야. 이 정도 수고로 우리가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됐다면 나쁘지 않지. 병원으로 갈 거지? 봉진이 차로 데려다줄 테니까 가자.”

이병렬이 분명하게 답을 주었다.

확실히 마카오에 다녀오고 나서 이병렬은 순간적인 판단이 냉정해진 느낌도 들었다.

강성태는 이병렬과 함께 호텔 앞에서 승용차에 올랐다.

“들어가십시오, 형님.”

이종환을 비롯한 대림동과 강남 덩치들이 줄줄이 고개 숙였는데 이병렬도 있고 해서 뭐라 할 건 아니었다.

승용차가 막 출발하고 나서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혹시 병원 근무가 일찍 끝났을까?

스마트폰을 꺼낸 강성태는 이름을 확인하고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야. 통화 좀 돼?

김민재는 장난기를 쏙 뺀 음성이었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 민정이가 알아버린 거 같아. 지금 막 네가 깡패 두목인 거 알고 있었냐고 전화했었어. TV에 나온 보도를 보며 함께 근무하는 선배 경찰들이 알려줬다는데 여기저기 확인해 보니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더래.

그야말로 절로 한숨이 나오는 내용이었다.

- 신월동 사는 강성태고, 연예인 뺨치게 잘 생겼고, 경호원으로 마카오 갔다는 말에 일단 끝난 거지. 지구대 출동 나갔을 때, 깡패들이 민정이를 알아본 거랑 중고차 살 때도 이상했었다는데 뭐라고 할 말이 있어야지. 일단 내가 지구대로 간다고 했거든. 여차하면 엄마한테 말할 거 같은데 뭐라고 하지?

강성태는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자정까지는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내가 지구대로 갈게. 오늘은 그냥 있어.”

- 괜찮겠어? 민정이가 말은 안 해도 너 정말 많이 의지했잖아? 충격이 꽤 큰 모양이야. 부산 사건이랑 몇 가지는 나도 모르는 걸 물어보더라고.

“알았어. 내가 가볼 테니까 일단 집에 있어.”

- 그래. 그리고 다들 괜찮은 거 선물하면서 나는 왜 열쇠고리야?

원래 성격은 어디 안 가는지 이 상황에서도 김민재는 뻔뻔한 항의를 내놓았다.

“너는 멕시코 다녀올 때 제대로 하나 해줄게.”

강성태의 답을 들은 김민재가 가볍게 웃었다.

- 피곤할 텐데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아무튼, 내가 만나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어.”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먼저 승용차의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는 지금 통화한 내용에 관해 이병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 씨발. 어쩌냐? 다른 것도 아니고 경찰이면 서로 입장 졸라리 뻑뻑할 텐데.”

“만나서 솔직하게 말해야지, 뭐.”

“그걸 받아들이겠어?”

“방법이 없잖아. 그리고 이럴 땐 솔직한 게 최고더라고.”

강성태의 말을 들은 이병렬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다른 거 없다.

이세종이 덜컥 특종을 내버리면서 ‘언젠가’라고 생각했던 날이 오늘이 되었을 뿐이다.

안다미를 만나기 전에 참 일 많다.

화려하게 꾸민 서울의 밤을 보며 강성태는 씁쓸하게 웃었다.

**

은선곤은 밤 10시가 돼서야 정세원의 집무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종일 기다렸는데 비서실에서 연락을 준 건 고작 30분 전이었다.

은선곤은 정세원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왜 이 늦은 시간에 면담을 허락했는지도 충분히 짐작했다.

“늦게 죄송합니다.”

“회의는 원하는 대로 된 거 아냐? 굳이 나한테 보고할 게 있어?”

삐딱하게 맞이하는 정세원을 향해 은선곤은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런 뒤에 책상으로 다가가 세 종류의 서류철을 올려놓았다.

서류철을 내려다본 정세원이 이게 뭐냐는 투로 고개를 든 다음이었다.

“마카오 회의록 한 부, 컨소시엄 지분에 따른 공사 배분 계획서 한 부, 그리고 출자금과 경비 신청서입니다.”

“다른 건 알겠는데 경비 신청은 뭐냐? 컨소시엄에 이미 확보된 자금이 있으니까 대표인 네가 알아서 결재하면 되는 거로 아는데?”

“컨소시엄의 최고 지분을 강명그룹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회장님께 결재를 받아야 다른 그룹에서 더는 욕심 내지 않을 테고, 또 강명그룹이 이 사업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

“후우-.”

왼손을 책상에 올린 정세원이 의자에 상체를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뭐냐? 깡패 아래에서 일하더니 그쪽 방식으로 내게 충성하겠다, 그런 거냐?”

“저는 처음부터 강명그룹의 비서실 직원으로 컨소시엄에 참여했습니다. 한 번도 형님이라고 불러본 적 없지만, 회장님을 넘어서거나 배신할 마음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가 막혀 하는 그의 심정이 얼굴과 눈빛에 고스란히 올라와 있었다.

“이번 공사로 강명그룹을 떠나라고 분명하게 말했던 거로 기억한다만.”

“그런 각오로 강성태 회장님을 모시고 공사를 가져오란 뜻으로 받았었습니다.”

“원하는 게 뭐냐?”

“회장님.”

숨도 쉬지 않은 듯 오간 대화의 끝에서 은선곤이 처음으로 시선을 똑바로 들었다.

“이 공사를 시작으로 턴키 방식의 신도시 건설 수주가 몰려들 겁니다. 저는 욕심 없습니다. 강성태 회장님 역시 신도시 관리에 집중하실 뿐, 공사 자체는 제게 일임해 주셨습니다. 저는 공사만큼은 강명그룹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걸 물었어.”

“강성태 회장님을 지원해주십시오.”

“허어!”

탄식을 뱉어내는 정세원의 눈에 질투라는 감정이 담뿍 올라왔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다. 이런저런 사건을 뒤에서 수습했고, 검찰, JBC 회장에게까지 손써가며 깡패 두목 회장을 지원해 줬어. 더 뭘 바라?”

“보도가 나갔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나올 테고, 분명 말이 돌 겁니다.”

“나더러 그룹들을 이끌어서 언론을 통제해 달라?”

“강명그룹의 사업을 위해서입니다.”

“네가 모신다는 강성태 회장을 위한 게 아니고?”

“저는 강명그룹의 사람이고, 회장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직원입니다.”

정세원은 폐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미소를 툭 던졌다.

“내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강명그룹의 명예가 실추될 수 있습니다.”

“알아! 그 정도는!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잖아!”

“도움을 청할 생각입니다.”

“도움? 도움이라면…?”

설마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던 정세원이 볼을 씰룩이며 입을 꽉 다물었다.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을 내세워서 나를 협박해?”

“제가 컨소시엄의 대표를 사임할 뿐입니다.”

“네놈이 사임하면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공사를 다른 컨소시엄에 맡기겠다고 할 테고, 둘 중 하나 아니냐! 지경그룹이 달려들든가, 다른 그룹들이 새로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너를 대표로 세우겠지!”

“저는 회장님의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적은 없었다.

은선곤이 정세원의 시선에 끝까지 맞서며 뜻을 굽히지 않은 적은 정말이지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공사를 포기하거나 강성태 회장을 지켜주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거구나? 그래서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이런 결재 서류를 올린 거고?”

“강명그룹의 이익을 위해서….”

“그따위 되지도 않는 변명 그만하고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 도대체 뭐냐? 뭐가 있기에 얼마 되지도 않은 기간에 깡패 두목에게 그렇게 충성하는 거냐고!”

정세원의 음성이 높았다. 심지어 그의 얼굴이 붉어져 있을 만큼 분노하고 있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어떤 경우에도 저를 지켜줄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허허허.”

“회장님께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진짜 형님을 얻었다고 생각해주십시오.”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내던 정세원이 손을 들어서 바깥을 향해 저었다. 어쩔 수 없이 뜻을 받아들일 때 그가 보이는 특유의 행동이었다.

“제 뜻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선곤은 깍듯하게 인사한 뒤에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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