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2부 23권 - 11화
은선곤이 안경테 너머에서 반짝이는 눈을 하고 집중하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말했던 모든 계획을 실행해도 야쿠자 놈들을 확실하게 끌어들이기는 부족해. 어설프게 수십 명 보냈다가 카르텔에 의해 죽고 나면 그 핑계로 손 떼기 좋거든.”
강성태는 생각하고 있던 문제를 은선곤에게 내놓았다.
“부산에 아르윈과 키란만 보낸 이유도 관동 연합의 중간 간부 정도 수준에서 레벨을 맞추겠다는 뜻이었고.”
“아카시 마오의 재산을 욕심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은선곤의 질문에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조직은 목숨을 걸고 달려들 정도로 엄청난 돈이지. 하지만 놈들에게는 그만한 규모의 조직이 다섯 개가 더 있다. 관동 연합이 도쿄를 비롯해 네 곳의 근거지를 포기하고 달려들 정도로 큰 금액은 아냐.”
뭔가를 생각했던 은선곤이 다시 시선을 들었다.
“요코하마 조직의 우두머리를 제거해도 그렇습니까?”
“그놈들이 흔히 하는 말 알지? 분하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다, 언젠가 반드시 갚겠다, 한국인들은 비열하다.”
늘 접하던 일본의 반응을 떠올렸는지 은선곤이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내가 원하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저녁에 있었던 일로 삼합회 칼잡이를 모두 해결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고.”
집중하는 은선곤을 향해 강성태는 말을 이었다.
“야쿠자와 카르텔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이를 갈아대며 싸울 확실한 방아쇠.”
“회장님. 저는 아직 그런 면에서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 쫓긴다는 여자 다섯 명이 어떻게 할 거 같아?”
대화의 끝에서 질문을 받은 은선곤이 숨을 골랐다.
“경찰서나 지구대에 들어가 봐야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 저 같으면 특급 호텔에 들어가 일단 투숙하겠습니다. 그곳에서 공항으로 바로 가버리면 우리가 손쓸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강성태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웃었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이 울었다.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가볍게 웃었다.
“답이 온 거 같은데? 잠시만.”
은선곤에게 양해를 구한 강성태는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통화돼?
걸쭉한 이병렬의 음성이 고즈넉한 은선곤의 사무실에 거친 회오리를 일으키듯 튀어나왔다.
“은선곤 대표 사무실이니까 편하게 말해.”
- 이 쌍년들이 자기들끼리 연락했는지 칼리안 호텔로 들어갔다네. 일단 로비하고 지하 주차장에 강남이랑 광주 동생들 깔았는데 어떻게 하지?
“그 정도면 됐어. 아마 밤에는 움직이지 않을 텐데 혹시 모르니까 일단 빠져나가지 못하게만 지켜봐.”
- 그래?
억울한 음성이었는데 강성태의 결정에 이병렬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이나 행동은 편하게 대하지만, 이런 순간에 토를 달지 않는 게 이병렬이 강성태를 따르는 방식이었다.
- 부산은?
“몇 가지 확인한 뒤에 전화하려고.”
- 보스의 결정이니까 따르기는 하는데 삼합회 쌍년들하고, 야쿠자 새끼들을 지켜보기만 하려니까 저녁에 먹은 차돌박이랑 육개장이 목구멍을 틀어막은 느낌이다. 그건 알지?
“알아. 일본에 가서 갚아주고 오자.”
- 일본에는 언제 출발해?
“비행기로 갈 거니까 오전에 확인해도 충분해.”
- 알았어. 그럼 우선 호텔을 지켜보고 있을게. 참! 병원하고 형님들 쪽에 가 있는 동생들은 어떻게 하지?
“아침까지 놔둬.”
- 알았어.
답을 한 이병렬이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이번에도 붙잡아간 삼합회 칼잡이 다섯에 관한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않았다. 이 또한 이병렬이 강성태를 위하는 방식이었다.
“은 대표의 생각대로 호텔에 들어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
“되도록 눈에 띄게 해야겠군요?”
은선곤의 답을 들은 강성태가 시원한 미소를 그려냈다.
강성태가 원하는 게 무언지 정확하게 짚어낼 만큼 빠른 머리 회전, 냉철한 상황 판단, 이런 능력을 강명그룹 정세원은 시샘했고, 지경그룹 천중명 회장은 탐낸다고 들었다.
단적으로 두 그룹 회장의 능력 차이를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반응이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회장님. 삼합회에서 보낸 여자들이 호텔로 피할 거라고 처음부터 짐작하셨던 겁니까, 아니면 상황에 맞춰서 판단하고 결정하신 겁니까?”
“어느 쪽 같아?”
“후자여야 좀 더 능력 있어 보입니다.”
“그럼 그거로 하지, 뭐.”
“예?”
당황하는 은선곤을 향해 강성태는 느긋하게 말을 덧붙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나 역시 목표를 먼저 정해. 그런 다음, 직접 주먹을 휘두르든, 지켜보든,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계획을 수정해.”
짐작했던 답을 들었다는 듯 은선곤은 만족한 눈빛이었다.
“이제 야쿠자 놈들 버릇을 고쳐줘야지?”
옅게 웃은 강성태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
자정까지라던 영업시간이 30분쯤 남았다.
아르윈 일행이 들어설 때부터 그랬지만, 음식을 앞에 깔아둔 지금도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앞에 둔 것처럼 팽팽한 긴장이 할머니 횟집 안을 맴돌았다.
특히, 마주 앉은 아르윈과 사카구치 소우타는 고개만 들어도 시선이 마주쳤는데, 더러워 보일 정도로 잔인한 표정을 긁어대는 사카구치 소우타, 굵직한 눈매로 ‘그런 눈깔은 일본에 가서나 치켜떠.’라며 비웃는 아르윈, 두 사람 모두 양보 따위는 없었다.
어서 영업이 끝나기를 바라는 여주인과 종업원 아줌마 두 명은 주방에 들어가서 몸을 숨겼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분위기만 보면 할머니 횟집 내부는 이미 박살 났을 테고,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들이 길 위에서 펄떡이고 남았는데, 아르윈과 사카구치 소우타 모두 마지막 한 방을 당기지 않았다.
‘한국인에게 빌붙어 먹고 사는 더러운 필리핀 새끼.’
‘자신 있으면 눈알만 부라리지 말고 덤비라니까?’
의도가 분명한 시선을 주고받는 가운데서도 사카구치 소우타는 뭔가를 기다리며 꾹꾹 참는 눈치였다.
안다미나 조태완이 삼합회 칼잡이들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기다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소식을 들은 뒤에 아르윈을 비웃어주려고 말이다.
‘서울에서 삼합회 칼잡이가 잡혔다는 말을 해볼까?’
막장에 회를 찍으며 아르윈은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하면 사카구치 소우타가 어떻게 나올까?
아르윈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부산에서 놈들이 설치지 못하게 해. 달려들면 밀리지 말고.”
강성태의 지시는 짧았고, 그만큼 분명했다.
설치지 못하게 막아서고, 달려들면 거기에 맞추라는 의미이지, 먼저 두들기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
아르윈이 회를 삼키며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이었다.
“여자들은 몸 팔고, 남자라는 것들은 관광객에게 집안 여자를 소개하며 사는 것들이 세상 좋아져서 인상을 다 쓰네.”
사카구치 소우타가 같잖다는 투로 말을 던졌다.
한국말이었다. 그렇다면 야쿠자 조직원들이 아니라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이 들으라고 던진 모욕이었다.
‘형님.’
강성태의 지시를 떠올리며 아르윈은 이를 악물었다.
“야! 거기 인상 더러운 놈!”
그러나 아르윈의 인내와는 다르게 불쑥 대꾸가 튀어 나갔다.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린 아르윈의 시선 앞에서 지금껏 얌전하게 튀김, 구이, 콘치즈를 먹고 있던 키란이 고개를 똑바로 들고 사카구치 소우타를 향해 입을 열고 있었다.
“네팔 사람에게 맞고 싶어?”
한국말이 늘었다고 해도 이런 분위기에서 하기에는 웃음이 나올 만큼 서투른 경고였다. 그러나 그런 어설픈 한국말이 오히려 사카구치 소우타의 성질에 불을 제대로 지른 느낌이었다.
“이것들이 진짜 죽고 싶은가?”
빠직, 이마에 핏줄이 오른 사카구치 소우타가 이를 갈아대며 분노를 씹었을 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이번에는 테이블에 올려둔 아르윈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액정을 내려다본 아르윈은 빠르게 스마트폰을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르윈입니다, 형님.”
- 아직 함께 있지?
“예, 형님.”
- 태완이 형님과 교창이에게 연락해서 근처 경찰서에 어느 정도 언질은 해뒀다. 수고스럽겠지만, 야쿠자 놈들 버릇을 고쳐줘.
강성태의 지시가 들린 직후에 아르윈은 묶였던 족쇄를 푼 맹수처럼 고개를 좌우로 비틀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 교창이 식구들을 보내줄까?
“그렇게 하시면 키란이 많이 서운해할 겁니다.”
- 어지간히 참았던 모양이네? 끝나고 연락해줘.
“알겠습니다, 형님. 들어가십시오, 형님.”
통화를 마친 아르윈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에 앞에 놓인 소주병을 움켜쥐었다.
“죽고 싶냐고 했었지?”
이게 진짜 미쳤나?
아르윈의 눈과 소주를 쥐고 있는 손을 빠르게 훑은 사카구치 소우타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는 순간,
휘이익!
아르윈이 병을 힘껏 던졌고, 사카구치 소우타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상체를 숙였다.
퍼석!
벽에 부딪힌 소주병이 깨지는 것과 동시에 키란이 스프링에 튕긴 사람처럼 튀어 올라서 앞에 놓인 상을 훌쩍 넘었다.
“난데요!”
줄줄이 앉은 야쿠자들이 몸을 일으켰는데 키란이 워낙 빨랐다.
퍼윽! 퍽! 퍽!
앞을 막아선 두 놈의 목과 명치를 두들긴 키란이 정면에 앉은 사카구치 소우타를 노리며 달려들었고,
휙! 휘이익!
앞에 두었던 맥주병과 접시를 던진 사카구치 소우타가 급하게 주먹을 뻗었다.
콰득! 과악!
사카구치 소우타가 뿜어내는 독기는 인정할 만했다.
그만큼 주먹도 매서웠고, 키란의 미간을 노리고 들이받는 이마 역시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상대가 키란이었다.
퍼석! 퍽!
왼편에 있던 야쿠자 조직원이 내리찍은 접시가 머리에서 터졌고, 오른쪽 조직원의 주먹이 턱에 꽂혔는데도 키란의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콰작!
몸을 던진 키란은 사카구치 소우타의 턱에 오른손 팔꿈치를 세차게 찍어 넣었다.
콰악.
휘청하는 사카구치 소우타의 머리칼을 키란이 움켜쥐는 순간,
콰다당! 콰등! 콰다당!
야쿠자 놈이 뒤엎은 상이 요란한 소리를 냈고, 그 위에 있던 요리들이 바닥에 튀었다.
숫자는 아르윈 일행이 다섯 명 정도 적었다.
“키란을 지켜!”
퍼석! 퍼으윽!
맥주병을 집어 야쿠자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던 아르윈이 동시에 턱을 세차게 얻어맞았다.
별이 사방으로 튀는 순간에도 아르윈은 주저하지 않았다.
“이 개새끼!”
강성태에 대한 충성심, 필리핀을 비하한 데 대한 분노, 키란을 지키겠다는 사명감, 아르윈은 완전히 눈이 뒤집힌 맹수였다.
퍼윽! 퍽! 콰작!
주먹을 야쿠자의 얼굴에 꽂아 넣은 그는 놈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벽에 세차게 찍어 넣었다.
바닥을 기며 살았다.
업소에 나간 여자 출연자가 지역 깡패들에게 당했다며 울 때마다 미친 듯이 달려갔었다.
찌그러진 나라 출신이라는 설움, 먹고 살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가족들을 위해 삼켜야 했던 수모, 필리핀 조직원들의 분노 역시 아르윈과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리 와!”
양손으로 야쿠자의 머리통을 움켜쥔 필리핀 조직원이 중앙 통로를 따라 끌고 가, 술병이 든 냉장고에 세차게 찍어 넣었다.
콰자작!
유리가 깨지며 얼굴에서 피를 뿜어내는 야쿠자 놈이 바닥에 널브러졌는데 필리핀 조직원은 분이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수족관에서 받아온 듯한 물받이 항아리를 높게 든 필리핀 조직원이 아예 뒈지란 듯이 세차게 내리쳤다.
퍼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짠 내 나는 수족관 물이 튀었고, 이어 쓰러진 야쿠자 놈의 머리통에서 뿜어진 피가 물을 타고 넓게 퍼졌다.
퍼윽! 퍼윽! 퍼윽!
주변을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에게 맡긴 키란은 처음부터 지금껏 사카구치 소우타만 두들겼다.
왼손으로 머리칼을 잡아 누른 상태에서 오른손을 연달아 올려 친 탓에 이미 사카구치 소우타는 무릎을 꿇다시피 늘어져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퍼윽! 퍼윽! 퍼윽!
키란이 손을 올려 칠 때마다 엉망으로 망가진 사카구치 소우타의 얼굴에서 터진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퍼서석!
마지막으로 버티던 야쿠자 놈의 머리를 필리핀 조직원이 맥주병으로 내리치면서 상황이 끝났다.
“키란! 야!”
주변을 확인한 아르윈은 키란의 상체를 안다시피 붙들었다.
“형님?”
“그만하자. 성태 형님이 원하시는 게 아마 여기까지일 거다.”
아르윈은 키란의 눈에 담긴 분노와 서글픔을 보았다. 그러나 죽이지 않을 거라면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는 게 현명한 행동이었다.
“성태 형님 말씀을 따를 거지?”
“한 방만 더 치겠습니다.”
이것까지야, 뭐.
슬며시 뒤로 물러나는 아르윈 앞에서 양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쥔 키란이 무릎을 세차게 들어 올렸다.
콰직!
이건 예상했던 한 방이 아닌데?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거칠게 마무리 지은 키란이 양손을 놓자,
철퍼덕.
더러운 인상은 고사하고, 원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사카구치 소우타가 사방에 흐트러진 음식들 사이로 처참하게 널브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