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2부 23권 - 12화
제5장. 얼굴은 보고 가야지?
강성태를 만난 이후로 신월동 오거리에 ‘프리 스테이션’이라는 주점을 얻었고, 출연할 무대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
아르윈과 필리핀 가디언스파가 얻은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서울과 지방 가릴 것 없이 무대에 올랐던 여자 출연자들의 만족도는 두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여자 출연자들의 전화를 받느라 아르윈의 부인이 집안일조차 제대로 못 하겠나.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마카오에 다녀온 조직원들은 꿈에서나 만져보는 한화 1억 원을 며칠 고생 끝에 손에 쥐었다.
부산에서 야쿠자들을 시원하게 두들긴 일도 마찬가지였다.
지방 조직의 눈치를 보며 출연자들을 무대에 올리던 필리핀 가디언스파가 부산에서 야쿠자들을 개 패듯 두들겼다.
모두 강성태가 지켜준 덕분이어서 이 일로 모조리 유치장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불만을 품을 조직원은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일이 터지고 유치장에 들어가도 된다고 생각했었던 바로 그때, 한 무리의 덩치들이 할머니 횟집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먼발치에서 한두 번 보았지만, 아르윈은 이교창을 바로 알아보았다.
“부산인데 동생이 애썼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식구들 데리고 먼저 나가. 참! 병원에 말해 놨으니까 다친 동생들도 치료해.”
듬직한 얼굴로 아르윈을 다독인 이교창이 벽에 기댄 자세로 늘어졌거나 혹은 바닥에 널브러진 야쿠자 놈들을 돌아보았다. 그런 뒤에 그는 또 피가 나는 머리 한쪽을 손으로 누르고 있는 필리핀 조직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필리핀 조직원이 상체를 숙이자 이교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들 가. 성태 형님께 전화 드리는 거 잊지 말고.”
말을 한 이교창이 주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 나와 봐요!”
여주인이 쭈뼛대며 주방 앞쪽까지 나왔다.
“가게 싹 고치고, 수리하는 기간 수입까지 물어드릴게. 그럼 되지?”
여주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야! 얼른 드려.”
“예, 형님.”
이교창이 지시하자 덩치 한 명이 다가가 5만 원 다발 여러 개를 여주인 앞의 주방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돈다발을 내려다본 여주인이 이번에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5천만 원이니까 우선 원하는 대로 수리하고 장사 못 해서 생긴 손해는 따로 변상해 드릴게. 우리가 거래하는 곳에 여기에서 회 먹으라고 말해 두고. 그럼 됐지?”
이제야 여주인은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내가요. 신강남파라는 말 들어서 신고도 안 했어요.”
“잘하셨어. 얼른 돈부터 넣어요.”
능숙하게 가게 여주인을 달랜 이교창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라니까 뭐 해?”
“그럼 형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아르윈을 시작으로 필리핀 조직원들이 줄줄이 상체를 깊게 숙였다.
아르윈이 가게를 나서려는 참이었다.
“동생?”
문 앞으로 움직인 아르윈을 이교창이 불렀다.
“필리핀 출연자들을 동생이 관리한다면서? 이렇게 얼굴 봤으니까, 앞으로 경상도나 부산에서 서운한 일이 생기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 나도 업장 알아봐서 출연할 곳이 있으면 동생 챙길 테니까.”
야쿠자 놈들이 필리핀을 무시한 뒤라서 그랬을까?
이교창의 따듯한 말을 듣는 순간, 아르윈은 그동안 지방에서 당했던 수모를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 가슴이 울컥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말이 길었다. 얼른 가. 나중에 기회 봐서 밥이라도 한번 먹자.”
아르윈의 감정을 알아본 듯 이교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은선곤의 회사를 나선 강성태는 택시를 이용해 칼리안 호텔로 움직였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이어서 택시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도롯가에 잔뜩 몰려 있었고, 출퇴근 시간만큼은 아니어도 도로는 제법 혼잡했다.
일이 늦게 끝난 사람들도 있겠지만, 하루의 피곤함을 술 한잔에 털어낸 이들도 많을 게 분명했다.
내일을 이겨낼 힘을 얻기 위해, 힘겨웠던 오늘을 위로받기 위해 즐기는 수준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거기까지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싶었다.
사방에서 똬리를 틀고 한 걸음 더 뻗기를 바라는 유혹에 휘청이지 않을 정도여야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받아들인다는 그 단순한 사실을 잊으면 결국 욕망에 사로잡혀 인생 망가지는 길만 남는다.
‘집으로 가세요.’
휘청이는 이들을 바라보며 강성태가 당부를 떠올렸을 때였다.
우우웅.
[갑자기 큰 수술이 잡혔어요. 새벽에 끝날 거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아요. 아침에 연락할게요.]
안다미가 보낸 문자가 스마트폰 액정에 올라왔다.
카페에 출근하며 평화롭게 지내던 강성태에게 느닷없이 달려든 긴 하루였다. 희한하게 이런 날, 안다미마저 힘겨운 근무를 마치는 순간에 언제 끝날지 모를 수술방 호출이 있는 모양이었다.
강성태는 기운 내라는 문자와 함께 존경하는 눈으로 양손을 앞으로 잡은 이모티콘을 보냈다.
이미 수술방에 들어갔다면 새벽녘에나 볼 메시지였다.
문자를 보낸 직후에 택시가 칼리안 호텔 앞에 멈추었다.
요금을 계산한 강성태가 택시에서 내려 입구로 들어선 뒤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간편하게 차려입은 고룡동이 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고, 바로 뒤에서 따라온 유충일이 상체를 깊숙하게 기울였다.
“이러고 다녀도 돼?”
“괜찮습니다, 형님.”
답을 하는 유충일을 고룡동이 불편하게 노려보았다. 틀림없이 들어가라고 권유했는데 유충일이 말을 듣지 않은 눈치였다.
“삼합회 여자들은?”
“9층에 들어갔습니다. 동생들 셋이 올라가서 9층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데, 형님. 룸에 들어가서 꼼작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형님.”
이 정도면 훌륭한 대처였다.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로비를 돌아보았다.
뒤늦게 투숙을 위해 들어오는 손님들과 내부에 있는 바에서 술을 마시는 손님들이 전부일 정도로 로비는 한가했다.
“잠깐 저쪽으로 가자.”
강성태는 고룡동과 유충일을 데리고 로비 구석으로 움직였다.
고룡동과 유충일은 누가 봐도 깡패였다.
거기에 로비 입구와 계단, 엘리베이터 앞에 광주 식구들이 깔려 있어서 리셉션에 있던 호텔 직원이 불편한 눈매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남자는 뭐지?’
강성태의 외모, 고룡동과 유충일이 양손을 앞으로 마주 잡은 채 공손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며 궁금한 눈치도 보였는데 거기까지였다.
“객실 번호 확인했어?”
“예, 형님. 제가 직접 객실 앞까지 따라갔었습니다. 호텔 직원이 뭐라 하길래 객실도 하나 잡았습니다, 형님.”
강성태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식하게 느껴질 만큼 우직했던 고룡동이 제법 머리를 굴렸기 때문이었다. 삼합회 여자들이 있는 층에 덩치 셋이 있을 수 있는 이유도 객실을 잡았기 때문이겠다.
“객실 번호 말해 봐.”
“907, 908, 9113, 이렇게 세 개입니다. 9113이 907과 마주 보는 방입니다, 형님.”
스마트폰을 꺼낸 강성태의 요구에 고룡동이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이럴 때 도움을 청할 곳이 있으니까.
강성태는 주저하지 않고 바르지오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일이 계속 생겨서 그런데 칼리안 호텔 907, 908, 9113, 세 개의 객실에 들어간 여자 다섯 명이 있는데 자세한 정보를 알았으면 싶다. 객실에서 나오게 할 방법이 있으면 더 좋겠고.”
- 칼리안이면 호텔 체인인 그 칼리안 말하는 건가, 미스터 강?
“로고를 보면 그런 거 같아.”
- 일단 현금으로 디파짓한 건지, 아니면 카드인지 알아볼게. 잠시만 기다려.
영어로 통화하는 강성태를 고룡동과 유충일이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 혹시 미스터 강, 지금 칼리안 호텔에 있어?
“로비.”
- 여권을 제시한 게 있어서 확인해봤는데 아무래도 위조 여권 같아. 그건 일단 놔두고, 대신 여자들이 사용한 카드를 도난 카드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준비해. 카드사에서 호텔에 통보가 가면 분명 객실에서 쫓겨날 거다.
“재미있겠는데? 고생했어.”
- 이 정도야 취미 수준이지. 미스터 강이 그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면 좀 더 서비스를 해볼까?
“뭐가 더 있어?”
- 잠시만.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에 재미있다는 듯한 킬킬대는 바르지오의 웃음이 건너왔다.
- 투숙할 때 기록한 이동전화 번호가 있거든. 그 전화로 어떤 번호를 입력하든 첫 번째 통화는 미스터 강의 스마트폰으로 연결되게 해놨어.
“그런 게 가능해?”
- 보이스 피싱 조직이 만든 프로그램이라서 성능은 확실하지. 미스터 강의 스마트폰에 엉뚱한 번호가 뜨면 일단 받아. 나머지는 알지?
“고마워.”
- 별말씀을. 야쿠자 조직을 파는 도중에 머리 식히고 좋았다. 재미있는 시간 보내.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고룡동과 유충일은 아직 강성태의 앞에 서 있었다.
“앉아.”
강성태는 눈짓으로 리셉션을 가리켰다.
직원들이 바라보는 앞이니까 앉으라는 의미여서 두 명 모두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하고는 공손하게 자리에 앉았다.
강성태는 방금 했던 통화에 관해 두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그럼 형님. 그년들이 쫓겨나는 거 아닙니까, 형님?”
“현금을 얼마나 들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도난 카드 신고가 들어가면 우선 쫓겨나겠지. 만약 현금으로 해결한다면 위조 여권 소지자로 경찰에 신고해도 되고.”
여자들을 잡을 수 있다고 기대했는지 고룡동이 볼을 씰룩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벌써 전화했나?
리셉션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던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아르윈인데 잠깐 통화 좀 하고.”
강성태는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아르윈입니다, 형님.
“편하게 말해. 다친 사람은?”
- 머리가 조금 찢어진 동생 두 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주먹 주고받은 거라 치료할 것도 없습니다, 형님. 지금 가게를 나와서 교창이 형님이 잡아준 병원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쩐지 아르윈은 살짝 흥분한 느낌이었다.
특히, 키란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카구치 소우타 한 명을 붙들어서 아예 묵사발을 만들었다는 내용을 전할 때는 평소보다 톤이 약간 높았다.
- 감사합니다, 형님.
상황을 전한 아르윈은 말끝에 밑도 끝도 없는 고마움을 표시했다.
“올라올 수 있겠어?”
- 병원에 들렀다가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형님.
“그래. 서울에서 보자.”
통화를 마친 강성태가 픽 웃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손에 든 스마트폰이 또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어쩐지 눈을 치켜뜨고 있을 거 같은 이병렬의 이름이 선명하게 액정에 올라와 있었다.
“여보세요?”
- 뭐야? 부산에서 야쿠자 새끼들 조지라고 시켰어? 그런 게 있으면 말을 해줬어야지. 괜히 속 끓였잖아.
“상황에 따라 바뀌는 거라서 말할 틈이 없었어.”
- 그럼 삼합회 년들은? 그것도 뭔가 있는 거지?
굳이 숨길 필요도 없어서 강성태는 조금 전의 통화와 지금 상황을 빠르고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 이 쌍년들! 내가 갈게! 절대 나 없이 그년들 어떻게 하지 마! 특히, 고룡동 그 새끼한테 넘기지 마!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삼합회 여자들을 반드시 구해야 하는 사람으로 오해하기 좋을 만큼 강렬한 요청이었다.
아마도 식당에서 당차게 마주 보던 여자들의 태도 때문에 감정이 상했고, 그만큼 더 분통이 터진 모양이었다.
“움직이게 되면 전화할게.”
- 바로 간다. 지금.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고개를 들었다.
“병렬이가 이리 온단다.”
“예, 형님.”
답을 하는 고룡동의 눈에 아쉬움이 스쳤다.
이거야 원. 삼합회가 동네 모임도 아니고.
삼합회의 칼잡이를 상대하는 일을 두고, 마치 버릇없이 설치던 하이에나를 발견한 사자 떼처럼 서로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모양새라니.
저녁에 했던 이병렬의 말이 떠올라 강성태는 가볍게 웃었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리셉션에서 움직일 때가 됐는데?
강성태가 리셉션을 바라볼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고룡동의 재킷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동생들인지 모르니까 얼른 받아봐.”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한 고룡동이, “그 동생 맞습니다, 형님.” 하고는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래? 잠시만.”
손으로 스마트폰을 내린 고룡동이 반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호텔 직원이 올라와서 여자애들 나오라고 한답니다, 형님.”
위쪽을 올려다본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바로 전화하라고 해.”
“예, 형님.”
답을 한 고룡동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야! 엘리베이터에 타면…. 뭐? 지금?”
고룡동은 다시 스마트폰을 내렸다.
“지금 두 명은 복도로 나왔답니다, 형님.”
“그럼 엘리베이터로 가자. 우리가 1층 버튼을 누르고 있을 거니까 함께 내려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형님.”
지시를 전한 강성태는 기다릴 거 없이 몸을 일으켰다.
객실에서 쫓겨났다면 무조건 로비, 아니면 지하층으로 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지하층을 선택해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라고 해도 함께 탄 덩치들이 1층을 눌러놓으면 기다리던 강성태와 마주치게 된다. 그게 아니어도 1층에서 강성태가 버튼을 누르면 멈추지 않고 내려갈 방법 또한 없는 상황이었다.
“이쪽입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고룡동이 혹시나 놓칠까 봐 조바심 나는 사람처럼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강성태를 안내했다.
“올라가는 버튼과 내려가는 버튼 모두 눌러 놔.”
“예, 형님.”
얼굴은 보고 가야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버튼을 누르는 고룡동과 유충일 뒤에서 강성태는 차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