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2부 24권 - 17화
조봉진은 이병렬의 병실에 있었다.
- 차는 신월동 나이트 주차장에 세워뒀습니다, 형님. 제가 지금 출발해서 빌라로 가져가겠습니다.
“그럴 거 없어. 치곤이더러 찾아오라고 해서 바로 출발할 거니까 병렬이 챙겨.”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형님.
이병렬이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 여보세요?
스마트폰을 건네주는 소리가 들린 뒤에 이병렬의 음성이 넘어왔다.
“몸은 좀 어때?”
- 부산까지는 못 가도 천안은 다녀올 정도 돼.
물론 안심하라고 건넨 소리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회복한 음성이라 강성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보스도 아직 힘들 텐데 부산까지 괜찮겠어? 그러지 말고 그 여자를 서울로 가져오라고 하지?
아카시 마오를 가져오라고 표현했다.
확실히 이병렬의 저런 표현은 강성태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경지였다.
“서울로 데려오면 편할 거 같은데, 아직은 그곳에 두는 게 더 좋아.”
- 그러면 진용이랑 봉진이 보낼 테니까 함께 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병실을 지켜야 마음 편하게 다녀오지. 봐서 일찍 올라오게 되면 병원으로 갈게.”
- 당장은 신강남파에 대들 조직이 없기는 한데, 언제, 어디에서 미친놈이 나올지 몰라. 항상 조심해.
이병렬의 당부를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강성태는 바로 최치곤에게 전화를 넣어서 신월동 나이트 주차장에 승용차가 있다는 사실과 키를 보관한 덩치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다음으로 강성태는 강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시간 어때?”
- 괜찮아. 무슨 일이야?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강성태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김삼문이 저지른 짓과 어제까지의 일을 강선영에게 들려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귀국하면 대략 어느 정도 처벌받지?”
- 피해 금액이 크고 피해자가 다수라고 해도 아직 피해자들이 전부 고소하지 않은 상태고, 대부분 피해 변제가 이뤄진 거라서 변호사 선임하는 조건으로 집행유예라고 봐야 해.
“결국, 그렇게 되는 거구나.”
- 누군데 그래? 고검장님이나 부장 검사님이 나서면 해외로 도주한 이력이 있어서 우선 구속영장은 떨어질 거야. 그래 봐야 구치소에서 두어 달 고생한 뒤에 집행유예로 나오는 건 다르지 않을 거고.
강선영이 아는 선에서 의견을 내놓은 뒤였다.
- 그건 그렇고, 네가 조사하라는 사건 있잖아? 이거 사건 크다. 당장 현행법으로 걸기 어려운 데다, 저쪽이 가진 배경이 워낙 좋아서 자칫하다가는 진짜 다쳐. 들추는 사람마다 집안에 국회의원 한 명씩은 있거든.
“일단 자료 확인한 뒤에 의논하자.”
강선영과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이어서 아르윈의 번호를 눌렀다.
아침부터 진짜 바쁜 하루였다.
- 아르윈입니다, 형님.
“김삼문 건은 어떻게 됐어?”
- 그렇지 않아도 막 전화 드릴 참이었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무슨 수를 쓰든 보내 준답니다, 형님. 혹시 김삼문 씨를 만나보실 생각이면 그쪽에서 조직원과 함께 들어오라고 하겠습니다, 형님.
“고소한 사람들이 있어서 입국과 동시에 경찰에 넘어갈 거다. 그러니 함께 와 봐야 크게 도움은 안 돼.”
- 알겠습니다, 형님.
아르윈과 통화를 마치면서 강성태는 바쁜 연락을 대강 해결했다.
스마트폰을 식탁에 내려놓은 강성태는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멕시코로 향할 시간이 다가와서 그랬을까?
몇 년 만에 용병 생활과 경호원 시절을 꿈에서 보았다.
카르텔과 전쟁 수준으로 맞붙어야 하고, 가페의 지능적인 방해도 계산해야 하며, 근처에 사는 주민들까지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꿈으로 나왔을 거란 생각에 강성태는 가볍게 웃었다.
강성태가 창을 바라볼 때였다.
디지털 도어록의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장을 차려입은 최치곤이 들어섰다.
“부르지, 뭐하러 올라와?”
“보스를 모시는 건데 이 정도 자세는 갖춰야지. 그런데 진짜 몸은 괜찮냐?”
“부산 다녀와서 쉬면 되지.”
짧게 답한 강성태는 식탁에서 일어나 탁자에 놓아두었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둘이서 빌라를 나서 주차장에 세워 둔 승용차에 올랐다.
“뒤로 좀 타!”
“정 그러면 부산 근처에서 옮기는 거로 하자.”
강성태가 조수석의 안전벨트를 매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최치곤이 승용차를 움직였다.
대형 삼각별 승용차인 데다, 짙은 청록색이어서 회장님을 모시러 가는 운전기사와 비서로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아무렴 어떠냐.
마음 편하게 가면 되는 거지.
“배고프면 뒤에 샌드위치랑 천연 주스 사 놓았으니까 먹고, 아니면 의자 뒤로 눕혀서 한숨 자.”
“지겹지도 않냐, 샌드위치?”
“내가 한결같은 구석이 있잖냐.”
“병렬이는 육개장. 너는 샌드위치. 커피알리고에 가면 김밥. 나도 메뉴 하나 정해놓고 줄기차게 먹어서 너랑 병렬이 좀 괴롭혀야겠는데 적당한 게 안 떠오른다.”
강성태의 대꾸에 최치곤이 킬킬대며 웃었다.
왼팔은 핸들, 오른쪽 팔은 조수석 사이에 있는 쿠션에 올려놓은 최치곤이 힐끔 강성태를 보았다.
출근 시간을 비켜나서 승용차는 벌써 올림픽 대로 진입로에 들어서고 있었다.
“인천 유스시에 갈 때가 어저께 같은데 그동안 참 일 많았다.”
“그러게. 병렬이 만나고,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날아오면서 진짜 빠르게 달려왔다.”
“그나저나 멕시코는 진짜 죽여주더라.”
무슨 소리지?
강성태는 시선을 돌려 최치곤을 보았다.
“동영상 사이트에도 올라온 거 같으니까 한 번 봐. 멕시코 카르텔이 주민들 죽이는 보도인데 그쪽은 모자이크도 하지 않고 대놓고 보여주더라.”
뭐 그런 거 가지고.
멕시코를 떠올린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카르텔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게 일상이라 그런 면도 있어. 영상하고 현장은 또 달라. 눈앞에서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되면 어느 순간에 무뎌져. 그러고 나면 카르텔이 사람으로 안 보일 때도 있고.”
복잡한 표정으로 강성태를 보았던 최치곤이 운전을 위해 시선을 앞으로 가져갔다.
“나부터 총을 제대로 못 다루는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나는 그게 제일 걱정이다. 너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실탄 사격장에도 몇 번 갔었어.”
올림픽 도로에 들어선 최치곤이 승용차의 속도를 높였다.
“내 딴에는 심각한 문제인데 웃는 건 아니잖냐?”
“우리 방식으로 싸우면 되지.”
“그게 뭔데?”
“신도시 안에서는 총기를 소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게 돼?”
놀랍고 반가운 얼굴로 강성태를 보았던 최치곤이 차선을 제대로 타기 위해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미안하다. 뭔데? 방법이 있어?”
“생각은 있는데 우선 확인할 게 있으니까 조금 뒤에 보자. 아무튼, 기본 구상은 신도시 안에서만큼은 총기를 소지하지 못하는 거로 잡고 있어.”
“장갑차까지 가지고 있다며? 그런 거로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감당해?”
“그거야 가페 대원들이 있잖아? 거기에 일본에서 야쿠자들이 밀고 들어갈 테고. 그쪽에서 해결하게 해야지.”
“히야!”
희한한 감탄사를 뱉어낸 최치곤이 기대에 찬 얼굴로 히죽 웃었다.
**
비서실에 마련된 대기실에서 5분쯤 기다린 다음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은 은선곤은 정세원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됐고, 이리 와.”
정세원은 집무실 안쪽 구석을 향해 걸었다.
접견실로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세원은 낮잠을 즐길 때나 사용하는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갔다.
은선곤조차 두 번 들어가 본 게 전부일 정도로 외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장소여서 굉장히 은밀한 대화를 나누겠다는 의도였다.
“앉아.”
안으로 들어간 정세원은 굳은 표정으로 둥그런 테이블에 두 개 있는 1인용 소파 중 하나를 은선곤에게 권했다.
“내가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줬다. 하다못해 일본에 가서 칼부림한 뒤치다꺼리를 위해 전용기도 내줬고, 공항에 따로 손을 써서 입국까지 도왔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럴까.
은선곤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자세로 정세원의 말에 집중했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지?”
“죄송합니다, 회장님.”
“연백국이라고 우리나라 기업가들과 정관계 굵직한 인물들이 참여한 모임이 있어. 그걸 조사하는 모양이다.”
“누가 말씀입니까?”
“누구긴 누구야? 네가 모시는 그 잘난 회장님이지.”
은선곤의 표정과 눈빛을 확인한 정세원이 뜨거운 속을 털어내는 것처럼 대놓고 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하자. 적당히. 너도 알다시피 판검사의 사분지 일 이상이 연백국의 도움으로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뿐이냐? 집안마다 판검사에 국회의원이 한 명씩 있어. 그들을 건드리면 아무리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매달려도 공사를 포기하게 돼.”
쌓아두었던 갑갑함을 털어내서인 정세원은 어느 정도 후련해진 얼굴이었다.
“깡패면 깡패답게 주먹질, 칼질하는 일까지만 하자. 그건 내가 지금처럼 도와주마.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서면 공사 날리고, 줄줄이 끌려가게 돼.”
지금 정세원은 확실히 은선곤을 다독여 설득하려는 느낌이었다.
“국회에서 국정감사니 특별 검사니 해서 파헤치기 시작하면 그 잘난 조직에서 온전할 인간이 한 명이라도 있을 성싶으냐? 거기에 지금껏 도운 나 역시 걸릴 테고, 홍콩과 일본에 직접 다녀온 너도 죽어.”
약간의 과장이 섞였을지는 몰라도 정세원이 사적인 공간에서 이렇게까지 경고할 정도라면 상황이 몹시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이학의 이사장이나 연순동 부장검사를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연백국에 속한 사람들은 본인들을 지키는 데 있어서 부끄러움 따위 몰라. 무슨 짓을 해도 자기들끼리는 덮어주는 사람들이란 걸 너도 잘 알잖냐?”
속에 담았던 말을 모두 털어놓은 정세원이 잠시 은선곤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몇 달만 있으면 멕시코 공사가 시작된다. 가서 이번 일만큼은 눈 감으라고 강성태 회장을 설득해. 무슨 일로 이러는지 모르겠다만, 정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거면 차라리 멕시코에 가 있으라고 매달려.”
“우선 만나보고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은선곤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익히 알아서인지 정세원은 뻔한 답을 듣고도 탓하지 않았다.
“누구도 수십 년, 수백 년, 이어온 기득권을 단숨에 깨부수지 못한다. 하물며 깡패가 무슨 수로 그들을 상대해? 기득권이 무서운 건 그 아래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밥줄이 끊기게 되면 누구든 악에 받쳐서 달려들어. 그러니 이번만큼은 그 강 회장이라는 사람이 모른 척 넘어가는 게 맞아.”
“회장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전하는 거로는 안 된다니까 그래. 네가 가진 걸 모두 걸고 매달려서 반드시 원만한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 일이라고.”
“예, 회장님.”
끝내 확답을 내놓지 못하는 은선곤을 정세원이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이번 공사가 틀어지면 필리핀에서 넘어가기로 한 근로자도 없던 일이 된다. 그 점도 고민하는 게 좋아.”
예상했던 대로 정세원은 강성태의 움직임을 꾸준히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룹의 정보망이 지닌 힘을 익히 아는 은선곤은 또다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가. 가서 답을 가져와.”
“예, 회장님.”
이렇게 틀어지면 앞으로 강명그룹의 도움을 바라기는 어렵다. 만약 공사가 틀어지면 정세원은 은선곤을 다시 안 볼 사람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지시를 내린 정세원이 더할 수 없이 차가운 태도로 몸을 일으켰다.
**
날이 좋았다.
모처럼 최치곤과 단둘이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참이라 답답했던 속이 풀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안성을 지날 때쯤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아르윈입니다, 형님. 내일 오전 비행기로 보내겠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비행기 편명과 도착 시각은 오후에 다시 연락해서 받기로 했습니다.
“고생했어. 키란은 좀 어때?”
- 조금 전에 돼지갈비를 실컷 먹더니 지금은 자고 있습니다.
강성태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웃었다.
육개장과 샌드위치에 돼지갈비를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적당하게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통화 내용을 최치곤에게 들려주었다.
“그 인간 나한테 넘겨주라.”
“그러려고.”
“진짜?”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최치곤이 건넨 반문이었다.
“데리고 피해자들 찾아가. 가서 한 명, 한 명, 용서받아내게 해. 너를 보내는 건 중간에 도망치거나 못 하겠다며 버티는 일이 없었으면 싶어서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그런 거라면 내가 전문이지.”
내일이면 김삼문의 일이 대충 마무리되겠다. 더구나 피해자 모두에게 용서를 받아낸다면 나름 해피 엔딩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깔끔한 마무리였다.
남은 건 연백국의 처리였다.
“연백국 회원들은 어떻게 할 거냐?”
최치곤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지 강성태의 심정을 짚어내는 듯한 질문을 던졌다.
“우선 아카시 마오를 만나보자. 그런 뒤에 상황에 맞춰 움직여보려고.”
“쉽지 않겠지?”
최치곤의 질문에 강성태는 옅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