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5권 - 4화 (497/513)

《497》2부 25권 - 4화

제2장.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지.

호텔로 가는 길에서 강성태는 유충일부터 이교창, 연순동, 바르지오 만시니, 로페즈에게 차례로 전화를 넣었다. 다음으로 조태완과 박노익의 번호를 눌러 도움을 청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에게도 달려든다.

여기에서 절대 잊어선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궁지에 몰린 탓에 악 받쳐 달려든다 뿐이지, 쥐는 쥐고,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사실만큼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것도 보통 고양이가 아니라 궁지에 몰린 쥐만 전문적으로 상대하던 경험 풍부한 강성태라는 고양이에게는 달려들어 봐야 앞발에 목을 밟힌 채 찍찍대는 게 전부였다.

한 가지만 기억한다.

인간적인 연민으로, 당장 눈에 보이는 꼴이 너무 안 됐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기 때문에, 달아날 틈을 주거나 한 번쯤 기회를 주는 멍청한 짓을 하면 도망간 쥐는 절대 독 안에 다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차창으로 고개를 기울여 높은 빌딩 사이로 퍼져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멕시코에서 지내다 보면 저 하늘이 사무치게 그립고, 익숙한 도로와 사람들, 하다못해 분식집에서 파는 순대와 떡볶이가 눈물 나도록 그리운 순간이 생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도 모자랄 이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기껏 야쿠자 두목과 매국노를 상대해야 하는 현실이 강성태는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마약을 막겠다며 나섰던 길이 이상하게 비틀리더니 어느새 120조 원의 공사의 한 축을 맡았고, 결국 멕시코의 시에라마드레 산맥으로 연결되었다.

보리스 파리오라는 세계적인 사업가, 삼합회, 야쿠자, 카르텔까지, 공사에 숟가락을 얹겠다며 차례로 달려들었는데 전혀 상관없는 나채상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에게는 무척이나 불행한 일이겠지만, 이 싸움에 끼어든 건 나채상 본인이지, 강성태가 끌어들인 건 아니었다.

방향 지시등을 켠 승용차가 속도를 줄이고 있어서 강성태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최치곤은 호텔 입구를 향해 핸들을 꺾고 있었다.

택시와 자신의 승용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적당하게 지난 최치곤이 승용차를 세웠다.

“오셨습니까, 형님.”

덩치 두 명이 다가와 인사한 뒤에 뒷문을 열어주었다.

“치곤아. 차 맡기고 함께 가자.”

운전석에서 내린 최치곤이 덩치 한 명에게 키를 건네주고는 바로 강성태를 따라 움직였다.

힐끔거리는 손님들의 앞을 지난 덩치 한 명이 로비로 들어가는 입구 문을 열어주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로비에 들어서자 안에서 기다리던 조성호가 광주 덩치 두 명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HK 맨션의 일로 최치곤과 조성호는 다른 누구보다 친근한 관계였다. 무엇보다 최치곤이 나서준 덕분에 유충일의 목숨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조성호와 광주 덩치들의 고마움은 말로 표현할 게 아니었다.

고개 숙이는 최치곤을 조성호가 짧은 눈짓으로 말렸다.

우리끼리 그러지 말라는 뜻과 특히 강성태 앞에서는 따로 인사하지 말라는 의미로 보였다.

“모시겠습니다, 형님.”

광주 덩치 한 명에게 눈짓을 던진 조성호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강성태와 최치곤을 안내했다.

앞서 달렸던 광주 덩치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 기다리는 앞이었다.

“나채상 이사장이 중년 남자 세 명과 함께 왔고, 기무라라는 야쿠자 두목이 조직원 열 명과 함께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님.”

조성호가 상황을 설명한 직후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강성태, 최치곤, 조성호, 광주 덩치 두 명의 순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5층입니다, 형님. 노익이 형님이 계시고, 형님. 교창이 형님과 충일이 형님께서 지키고 있습니다.”

클럽을 운영하면서 익힌 덕분인지 조성호의 말투가 깔끔하고 세련되게 바뀐 느낌이었다.

5층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쪽입니다, 형님.”

5층에 도착한 조성호가 오른쪽의 복도를 가리킨 뒤에 앞서 걸었다.

복도의 중간에 덩치 다섯 명이 서 있어서 따로 연회장을 찾을 것도 없었다.

상체를 깊게 숙이는 다섯 명의 덩치들 앞에서 조성호는 ‘다이너스 클럽’이라는 명판이 붙은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열어.’

강성태의 고갯짓을 본 조성호가 문을 당겼다.

열린 오른쪽 문틈으로 가장 먼저 보인 건 벽을 타고 서 있는 덩치들이었다.

강성태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형님?”

가장 먼저 이교창, 유충일의 순서로 고개를 숙였고, 이어서 연회장 벽을 타고 서 있던 강남과 광주, 부산 덩치들이 서열에 따라 상체를 깊게 숙였다.

정면 벽의 중간에 있는 박노익을 향해 짧게 고개 숙인 강성태는 안으로 좀 더 들어가 홀의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지 않은 홀이었다.

하얀 식탁보를 두른 원탁 테이블이 세 개 있었는데 기무라 쿠니오키와 머리를 뒤로 넘긴 야쿠자들, 그리고 나채상으로 보이는 남자와 처음 보는 중년 남자 셋이 함께 있었다.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기무라 쿠니오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야쿠자들이 줄줄이 몸을 세웠다.

그 뒤로 나채상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강성태를 존중해서라기보다는 기무라 쿠니오키를 무시할 수 없어서 함께 일어선다는 투였다.

무거운 침묵이 짓누르는 홀 안에서 강성태는 나채상으로 생각되는 남자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강성태…회장인가?”

반말은 켕기고 존댓말은 못 하겠고.

인상은 과학이라더니.

강성태를 향해 입을 연 나채상은 어쩐지 왕의 눈을 가린 채 권력을 휘둘렀을 내시를 연상케 하는 인상이었다.

솔직히 인정한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운 피부와 고생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묻지 않은 얼굴, 교양과 세련미 드러나는 표정, 여기까지만 보면 그야말로 귀티가 흘렀다. 그러나 정작 마음을 증명한다는 그의 눈은 절대 선하지 않았다.

“인사하지. 이분은 강장문 서울지검장이시고.”

으스대듯 나채상이 소개하자, 입술과 눈매에 힘을 꾹 준 마흔 후반의 남자가 정말이지 불편한 기색으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이분은 한일의원 협의회의 협회장을 맡고 계신 곽정윤 의원이시고.”

강장문보다 더 언짢은 표정이었다. 곽정윤은.

이런 자리에서 너 같은 놈과 인사하는 게 치욕스럽다는 감정이 오십 중반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과 표정에 고스란히 올라와 있었다.

“이분은 한국 기업가 협회의 회장으로 계시는 오상현 회장님.”

어떠냐?

이래도 네놈이 큰소리를 칠 수 있겠냐?

소개를 마친 나채상이 터무니없을 만큼 거만한 눈빛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내가 누군지는 알 테니 소개는 이만하기로 하고, 이런 분들을 계속 서 계시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니 얼른 인사드리고, 기무라 상과 원만하게 마무리하는 거로 자리를 끝내자.”

나채상의 말을 일본어로 전하는 모양인지, 야쿠자 한 놈이 기무라 쿠니오키에게 붙어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급해서 한국에 달려왔고, 한 번 뱉으면 요코하마까지 달려가는 강성태의 강단이 두려워 강남 호텔까지 온 기무라 쿠니오키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에 묘한 기대감이 피어나 있었다.

공항에서 이교창을 대했던 것처럼 반전의 기미가 보이자 또다시 딴 마음이 올라온 눈치였다.

옅게 웃는 강성태를 본 기무라 쿠니오키가 급하게 표정을 바꾼 뒤에 올라왔었던 기대감을 얼굴 아래로 감췄다.

“뭐하나? 얼른 인사드리지 않고?”

강성태는 독촉하는 나채상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서울지검장, 다선 국회의원, 기업가까지 달려와 강성태를 겁박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설쳤던 나채상의 할아비는 얼마나 두려운 인물들을 동원해 사람들을 꿇렸을까?

그것도 고작 야쿠자 두목의 앞에서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말이다.

“강성태…, 회장이라고 하더군. 오늘 자리를 무난하게 마치면 여기 있는 분들과 내가 뒤를 봐주지. 세상을 현명하게 사는 법도 익혀야지?”

이런 식으로 하나둘 꿇렸겠지.

강성태 역시 그렇게 되길 바랄 테고.

관동 연합 두목과 야쿠자 조직원들이 지켜보는 자리라는 부끄러움은 이들의 몫이 아닐 테니까.

“나 이사장님.”

“이 사람이? 어서 인사부터 드려.”

강성태가 부른 직후에 나채상이 무섭고 근엄한 표정으로 인사를 재촉했다.

조용한 음성의 강성태, 꾸짖듯 지시하는 나채상.

통역을 통해 대화를 전해 들은 기무라 쿠니오키가 또다시 올라오는 기대감을 피워내며 강성태와 나채상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를 꽉 깨무십시오.”

“뭐?”

멍한 얼굴로 반문하는 나채상을 향해 강성태는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쫘아아아아악!

있는 힘에 체중까지 실어서 거칠게 따귀를 갈겼다. 그런 뒤에 휘청이며 넘어가는 나채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당황하고 놀라는 서울지검장, 국회의원, 기업가 협회장,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탄식 같은 표정을 지은 기무라 쿠니오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몸을 낮추는 야쿠자,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너, 이놈! 내가 누군지 알면서…?”

“유충일!”

“예, 형님!”

서울지검장의 말을 강성태가 잘랐고, 다부지게 답을 한 유충일이 단숨에 재킷 안에서 회칼을 뽑았다.

“어어? 이 사람들이?”

국회의원과 기업가 협회장이 놀란 가운데 기다렸다는 것처럼 광주 식구들이 줄줄이 회칼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에 자극받은 모양이었다.

“뭐하냐!”

이교창이 고함과 함께 재킷에서 회칼을 꺼냈고, 이어서 부산 덩치들이 허리춤에서 번득이는 회칼을 줄줄이 꺼냈다.

흐물거리는 나채상의 멱살을 움켜쥔 상태에서 강성태는 확인처럼 기무라 쿠니오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어떻게 할래?

해보겠다면 얼마든지 받아주마.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기무라 쿠니오키가 고통스러운 듯 볼을 씰룩였고, 그의 주변으로 야쿠자들이 모였다.

“유충일. 지금부터 입을 여는 놈이 있으면 무조건 네가 해결해.”

“감사합니다, 형님!”

고룡동이 떠올랐는지 눈물이 왈칵 올라온 유충일이 피에 젖은 듯 비장한 답을 내놓았다.

‘나는 통역인데요?’

기무라에게 무언가를 속닥이던 놈이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저렇게 덜떨어진 놈이 무슨 통역을 한다고.

시선을 돌린 강성태는 나채상을 눈에 담았다.

“언제까지 늘어져 있을 거야? 계속 이러면 아예 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끄응.”

신기한 일이었다.

경고 한 마디에 기절한 사람처럼 축 늘어졌던 나채상이 억지로 발에 힘을 주며 몸을 버텼다.

“너나, 여기 함께 온 세 사람이 바르고 올곧게만 살았다면 나와 여기 있는 내 식구들이 절대 넘볼 수 없어. 하지만, 빛의 세상에서 그림자처럼 검게 산 사람들은 진짜 어둠에서 절대로 나를 이기지 못해.”

“허으. 허으.”

따귀 한 대에 정신이 반쯤 날아간 모양이었다.

비명도, 울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토해내는 나채상이 맹추위에 산에 버려진 개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권력, 돈, 전혀 안 먹혀. 왜 그런지 알아?”

“아니오. 아흐.”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라서 그래. 어둠에 물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그림자. 그러니까 어쭙잖은 권력으로 내 앞에서 목에 힘주지 마.”

“예헤!”

급한 나머지 나채상의 답이 이상했다.

교훈은 끝났다.

“이제 정산하자. 이 교훈을 오래 간직해.”

정산이라니? 무슨 교훈?

찢어진 입술과 코에서 피를 흘리던 나채상이 다급하게 강성태를 보았다.

“이 씨발 새끼야!”

그 직후에 유충일이 욕을 뱉으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아냐! 아니라고!”

고함을 버럭 지른 강장문 지검장이 스마트폰을 든 손을 휘저으며 버둥거렸다.

전화를 하려던 모양이었다.

‘이런 얍삽한 새끼가?’

그렇더라도 칼질할 정도의 죄는 아니었다.

강성태는 오른손을 들어 유충일을 세웠다.

붉어진 눈, 그의 손에서 번득이는 회칼, 그대로 두었다면 유충일이 강장문을 찔렀을 거란 사실을 지켜보던 모두가 확신할 만한 모습이었다.

“스마트폰 넘겨.”

강성태의 지시에 강장문이 끔찍한 물건이라는 양, 엄지와 검지로 스마트폰을 집어 앞으로 내밀었다.

이를 드러낸 유충일이 스마트폰을 낚아챈 뒤였다.

강성태는 나채상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래 기다렸지?”

아닙니다. 절대 아닌…!

쫘아아악! 쫘아악! 쫘아악! 쫘아아악!

네 대를 더 때렸을 때, 그의 왼쪽 어금니들이 우수수 부러졌고, 따귀의 끝에서 핏물과 함께 밖으로 튀어나왔다.

쫘아악! 쫘아아악! 쫘아아악! 쫘아악!

강성태는 꾸준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손을 휘둘렀다.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목숨을 빼앗아가며 조부가 모은 돈을 물려받았다면 최소한 반성하며 자중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

쫘아악! 쫘아악! 쫘아악!

어느덧 열아홉 대를 채웠다.

“마지막이다.”

경고를 건넨 강성태는 유종의 미를 거두는 심정으로 정말이지 온 힘을 다해 손을 휘둘렀다.

쫘아아아아아악!

나채상의 광대뼈가 안으로 두두둑 밀려들어 갈 정도로 강력한 따귀였다.

털썩.

강성태가 손을 놓자 온 얼굴이 피범벅이 된 나채상이 죽은 사람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단정하게 넘겼던 머리칼은 모조리 흐트러졌고, 얼굴 반쪽이 주저앉았으며, 코가 틀어진 데다 찢어진 볼과 터진 입술 탓에 얼굴 전체에 피를 발라놓은 몰골이었다.

강성태는 나채상의 피가 흠뻑 묻은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뒤에 아직 남은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시선을 들었다.

흠칫했던 기무라 쿠니오키가 볼을 씰룩였다.

“나는 약속대로 한국에 왔고, 강남 호텔에도 왔소. 앞에 보였던 나채상 이사장의 행동은 나와 의논한 게 아니오.”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지.”

강성태는 뒤쪽을 향해 피에 젖은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형님.”

척하면 착, 눈치 빠른 최치곤이 회칼을 거꾸로 잡고서 강성태의 손 위에 자루를 올려주었다.

“나는 미래라고 불리는 밝은 세상을 향해 달리지만, 그렇다고 나의 과거인 어둠을 잊어버리거나 외면하지 않아.”

통역의 말을 전해 들은 기무라 쿠니오키가 무슨 소리냐는 투로 강성태를 보았다.

늦었어, 이 개새끼야.

휘릭.

강성태는 손안에서 회칼을 돌려 날이 아래로 가도록 거꾸로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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