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5권 - 5화 (498/513)

《498》2부 25권 - 5화

강성태의 단호한 태도를 본 기무라 쿠니오키가 이를 악물었고, 그의 조직원들이 최후를 각오한 듯 앞으로 나섰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던 모양이었다.

야쿠자 조직원들이 재킷과 허리춤에서 회칼을 뽑아 들었다.

“이런 씨발 새끼들이!”

유충일과 이교창이 단박에 나섰고, 눈이 뒤집힌 조성호가 뒤따랐다.

“연장 줘!”

덩치 한 명의 회칼을 뺏은 최치곤까지 나서는 것과 동시에 광주와 부산 덩치들이 우르르 중앙으로 몰려들었다.

열 명의 야쿠자 놈들을 향해 사십여 명의 신강남파 덩치들이 달려드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어느 정도 말려줄 줄 알았던 강성태가 회칼을 거꾸로 들고 거침없이 밀고 들어가는 터라, 남은 건 기무라 쿠니오키와 야쿠자 조직원들이 피투성이로 쓰러지는 일밖에 없었다.

“동생!”

기무라 쿠니오키의 앞을 막아서듯 나선 건 박노익이었다.

달려들다가 멈춘 이교창과 유충일이 아쉬운 얼굴로 강성태의 결정을 기다렸다.

“보스를 막아선 죄는 이 손가락으로 갚겠다. 하지만, 나를 봐서 한 번만 참아다오. 이렇게 부탁한다.”

손을 내린 박노익이 무안할 정도로 강성태를 향해 상체를 깊게 숙였다.

뭐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눈알을 돌리는 기무라 쿠니오키에게 통역하던 놈이 박노익의 말을 빠르게 전하고 있었다.

저런 놈을 왜 막아섰을까?

마음 같으면 박노익을 제치고라도 달려들고 싶었다. 그러나 상체를 깊숙하게 숙인 박노익을 그렇게까지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공항에서 한 번, 조성 호텔로 가는 길에 한 번, 그리고 이곳까지, 오늘 하루만 벌써 세 번이나 얼굴을 바꾼 인간입니다. 저런 인간이 관동 연합을 이끌게 두는 것보다는 이 기회에 대가리들을 갈아버리는 게 낫습니다.”

“동생의 뜻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점도 고민해다오.”

강성태는 겁에 질려 있는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회칼을 들어 강장문을 가리켰다.

“저기 지검장이란 인간부터 국회의원, 기업가 협회장, 모두 나채상의 돈을 받았습니다. 그것으로 모자라 곽정윤 의원은 관동 연합이 우회적으로 지원한 후원금을 받은 데다, 개인적으로 만든 한일 연구사 재단을 통해 수십억 원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알았지?

세 사람의 시선과 표정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들면, 언제, 얼마를, 어떤 통장으로 넘겨받았는지 모조리 공개하고, 함께 죽겠습니다.”

이거 끝이 정말 안 좋겠는데?

기무라 쿠니오키가 갑갑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보는 앞이었다.

“아무리 어둠 속에서 그림자로 살아도 나와 우리 식구들은 나라를 팔아먹지는 않아. 검사, 국회의원, 기업의 회장은 못 됐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팔아먹는 돈에 개처럼 꼬리 치지 않는다고!”

강성태의 태도에 질렸는지 세 사람이 동시에 시선을 떨궜다.

부끄럽다거나 반성해서가 아니라 당장 눈을 가리킨 회칼과 괜히 대들었다가 나채상의 꼴이 될까 봐 두려워서 나온 반응으로 보였다.

“동생? 마음은 이해해. 그렇더라도 다른 방법이 없겠나?”

강성태는 박노익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증권바닥의 마귀들과 움직였던 덕분에 누구보다 상황을 읽는 눈이 냉정한 박노익이 이상하리만치 끈질기게 기무라 쿠니오키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후-.”

강성태는 숨을 길게 내쉬며 독한 각오를 토해냈다.

이렇게 된다면 골치 아프고 힘들지만, 관동 연합을 완전히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박노익이 정말 그걸 원해서 이렇게 나섰는지, 그 이유를 나중에 확인하더라도 말이다.

“형님. 혹시 목숨을 제가 빌려도 됩니까?”

뜬금없다고 느껴질 질문이었다.

실제로 질문을 받은 박노익이 미간을 좁혔고, 잠시 뒤에 결심한 듯 볼을 씰룩였다.

“동생이 달라면 내놓겠다.”

그런 뒤에 다부지게 답을 내놓았다.

박노익을 잠시 바라보던 강성태는 기무라 쿠니오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노익이 형님을 봐서 한 번, 꼭 한 번, 기회를 더 준다. 연백국의 회장으로 여기 노익이 형님을 모셔. 이건 요청이 아니라 지시다. 그리고 다시는 잔머리를 굴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손가락 하나를 내놔.”

통역을 통해 말을 전해 들은 기무라 쿠니오키가 버릇처럼 볼을 씰룩였다. 또한, 강성태의 요구가 무리하다고 판단했는지 뒤에 섰던 야쿠자 놈들이 움찔대며 기무라의 눈치를 살폈다.

“일본과 한국의 연백국 모두를 말한 거니까 잔머리 굴릴 생각하지 마라. 여기에서 나가는 대로 노익이 형님 모시고, 일본으로 돌아가. 가서 한국의 연백국 회원들이 썼다는 서약서를 넘겨.”

“연백국의 설립 취지를 아실 텐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서약서 때문이라면 돌아가는 대로 넘기겠소.”

“앞으로 연백국은 일제강점기의 피해자 보상과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한다.”

회칼로 배를 찔린 사람처럼 기무라 쿠니오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수모를 참으며 견뎌야 하는지 망설이는 눈치이기도 했다.

망설임의 끝에서 그는 한쪽에 서 있는 강장문, 곽정윤, 오상현을 빠르게 살폈다.

얍삽한 양아치 새끼.

이 긴박한 순간에도 세 사람이 나서주길 바라?

그의 모습이 고룡동과 겹쳐서인지 강성태는 이상하게 피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강성태를 염려하던 그의 눈빛과 상처투성이인 얼굴이 생각나서 이를 굳게 깨물었다.

“서약서에 적힌 놈들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빼돌렸던 돈, 받아 처먹었던 돈을 모두 토해서 독립유공자의 후손에게 지원하게 할 거다. 그러니 얼른 결정해. 죽을 건지, 손가락 하나와 연백국을 내놓을 건지.”

고통스러운 듯 찌푸린 기무라의 눈 끝이 빠르게 흔들렸다.

저 끝없는 간사함이라니.

“지난 5년간 사용했던 연백국의 예산 평균치 이하로 지원한다거나, 노익이 형님의 지시를 어기면 네가 배신한 거로 알겠다.”

“일본의 연백국은 일본회의와 기업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오. 말씀한 내용으로 움직이면 그들이 지원할 리가 없잖소?”

“관동 연합 수입은 네 배를 채우는 데만 사용하나?”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기무라 쿠니오키는.

죽을 뻔한 상황을 모면했으나 죽음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 앞에서 그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이제 비키십시오.”

강성태의 눈을 박노익이 빤히 바라보았다.

‘동생. 아무리 약점을 붙들고 있다고 해도 저 세 사람 앞에서는 한 걸음 양보하는 게 옳아. 관동 연합과의 전쟁도 버겁고.’

그는 진심으로 강성태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 용서가 안 된다면 차라리 동생들을 시켜. 아니면 내가 할 테니까 동생은 물러나.’

박노익의 뜻은 이교창과 유충일을 차례로 가리켰다가 돌아온 그의 시선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신의를 지키지 않는 인간과는 협상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관동 연합을 접수하겠습니다. 아카시 마오와 여기 이교창이 시작이고, 이걸 계기로 일본 전체를 손에 넣을 겁니다.”

진심인가?

진짜 신강남파가 일본을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잠시 강성태를 바라보았던 박노익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슬픈 미소를 지었다.

“동생의 뜻에 따르겠다.”

그런 뒤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교창아. 연장 하나 다오.”

“예?”

“연장 달라고.”

“여기 있습니다, 형님.”

강성태가 칼질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박노익이 직접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가뜩이나 기무라를 막아선 참이었다.

혹시라도 뒤에 있던 야쿠자 놈들이 회칼을 내밀지 몰라서 강성태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상체를 비틀었다.

“따르겠소.”

뭐야, 이건?

회칼을 받은 박노익, 독한 각오를 다시 피워올리던 강성태, 이를 악문 이교창과 유충일, 조성호, 심지어 지켜보던 지검장과 국회의원, 기업가마저 얼이 빠질 정도로 툭 나온 기무라의 말이었다.

“박 상을 회장으로 모시겠소.”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토해낸 기무라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가 손을 내밀자 비통한 표정의 야쿠자가 칼자루를 올려주었다.

“내가 박 상을 모시고 일본으로 가겠소. 가서 서약서를 드리고, 회장으로 추대하겠소. 그 증명으로 손가락 하나를 남기오.”

말이 묘하게 달랐다.

“말을 똑바로 해야지. 손가락은 네가 지금껏 잔머리를 굴리느라 약속을 어긴 데 대한 벌이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손가락을 바치겠소.”

중후한 인상이 아까울 정도로 비겁한 대꾸였다.

강성태가 바로 잡을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말을 마친 기무라 쿠니오키가 셔츠 깃을 당겨 회칼로 잘랐다.

길게 잘린 셔츠 조각을 왼손 새끼손가락의 뿌리에 팽팽하게 감은 기무라 쿠니오키가 테이블에 손을 얹었다.

차마 볼 수 없다는 투로 강장문, 곽정윤, 오상현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비트는 순간이었다.

서걱.

“끄응.”

회칼을 힘껏 누른 기무라 쿠니오키가 이를 악문 채 몸을 돌렸다.

놈의 눈에 담긴 건 독기였다.

이 굴욕을 삼킨 뒤에 반드시 복수한다.

빤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기무라의 눈을 향해 강성태는 차갑게 웃었다.

얼마든지 해 봐.

그림자들의 세상에서만큼은 악착같이 밟아줄 테니까.

팽팽한 긴장의 위로 또다시 침묵이 찾아든 뒤였다.

“그럼 일본에 다녀올 테니 지시할 일이 있다면 전화로 알려다오.”

오늘 일을 책임지겠다는 투로 박노익이 나섰다.

여기에서 다른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박노익을 혼자 보내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강성태는 시선을 돌려 이교창을 찾았다.

“형님을 모시고 일본에 다녀와. 저 인간들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대신 문제가 생기면 일본 야쿠자도 없다.”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강성태의 지시를 받은 이교창이 고개를 숙이며 답을 내놓았다.

중심에서 밀려난 곳에서 문기주가 자꾸만 시선을 보냈지만, 일의 비중을 생각하고, 일본어 통역이 가능한 덩치를 데려가는 일까지 계산하면 이교창이 가는 게 좋았다.

“여권은?”

“지난번에 일본에 다녀오느라 준비한 게 있습니다, 형님. 네 시간이면 가져올 수 있으니까 일본행 비행기를 그 시간에 맞춰 예약하면 됩니다, 형님.”

이 정도면 일본으로 향하는 일에 걱정은 없었다.

사람 일이 참.

예상 밖으로 박노익이 막아서더니 고룡동을 위로하기 위해 신강남파 식구들을 모조리 불러들였을 때 만든 여권이 이렇게 쓰이게 됐다. 연백국을 손에 넣는다면 어떻게 활용할까를 고민하던 중에 떠올랐던 방법을 실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상상하지 못했던 전개와 결과였다.

어쩐지 고룡동이 박노익에게 매달려서 강성태를 지켜준 느낌도 들었다.

“유충일이 준비해준 객실로 노익이 형님 모시고, 저기 야쿠자 일행들도 데려가서 비행기 예약해.”

“알겠습니다, 형님.”

이교창이 고개를 숙이자 박노익이 강성태의 앞으로 다가왔다.

“고맙다, 동생.”

“고룡동의 일도 있고, 몇 번이나 말을 바꾸는 모습에 지나치게 흥분했었던 거 같습니다.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박노익이 뒤를 돌아본 뒤에 옆으로 비켜섰다.

이제는 네 차례라는 확실한 의미였다.

통역과 야쿠자 놈들을 뒤에 붙인 기무라 쿠니오키가 왼손을 감싼 채 강성태 앞으로 다가왔다.

나채상의 피가 말라붙은 강성태의 손에 아직 회칼이 거꾸로 들려 있었다.

경계하듯 시선을 내렸던 그가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에 한국의 방송국 기자들을 보낼 테니까 현지에서 발표해.”

“알았소.”

빈틈을 보면 손가락이라도 찔러보는 게 이 인간의 습성인지 답을 내놓기 직전에도 기무라는 버릇처럼 눈알을 굴렸다.

“기무라. 내가 이 칼을 다시 들게 하지 마라.”

“알았소.”

같은 답이지만, 강성태의 의지를 확인한 기무라의 답이 이번에는 빠르게 나왔다.

강성태가 고갯짓으로 이교창을 가리키자 그가 무겁게 움직였다.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상체를 깊숙하게 숙인 이교창을 따라 박노익, 부산 덩치들, 기무라 쿠니오키, 야쿠자들이 나섰고, 문기주가 덩치들 다섯 명과 함께 마지막에 따라붙었다.

이제 남은 쓰레기들을 처리해야 할 때였다.

그런데 이게 정말 폭력조직의 보스가 해야 할 일인가?

기가 막힌 심정으로 강성태는 최치곤을 향해 회칼을 건네주었다.

상체를 깊숙하게 숙인 최치곤이 회칼을 받은 다음이었다.

“자리 정리하고, 마실 거 좀 줘.”

“예, 형님.”

조성호가 눈짓을 던지자 광주 덩치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형님.”

강성태는 먼저 조성호가 가져다준 물티슈에 손을 닦았다. 그러면서 세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리 와서 앉아봐.”

움찔했던 세 사람이 내키지 않지만, 얼른 이 자리를 끝내고 싶은 심정이 역력하게 드러난 얼굴로 다가왔다.

“앉아.”

다시 지시하고서야 세 사람이 강성태 앞에 자리했다.

“내일까지 그동안 나채상에게 받아먹은 내용을 정리해서 보낼 테니까 확인해 보고 억울한 부분이 있으면 말해.”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들었던 지검장 강장문이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내가 보기에는 따로 받아먹은 게 더 있을 텐데 이 정도에서 넘어간다. 일본에서 연백국 보도가 나온 뒤에 JBC에서 기자가 찾아갈 테니까 인터뷰해.”

이번에는 국회의원 곽정윤이 움찔했으나 역시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오늘 일을 문제 삼고 싶으면 좋을 대로 해. 나 역시 서약서와 그동안 너희가 받아먹은 돈, 그 대가로 너희가 했던 짓을 세상에 알리는 게 훨씬 마음 편하니까. 연백국 회원 숫자가 많아서 그편이 훨씬 효과적이기도 하고.”

탁자에 팔을 짚은 강성태는 상체를 기울여 세 사람을 들여다보았다.

“하나만 물어보자. 네놈들이 그렇게 물고 빠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여태 짓밟고 있었다면 너희가 검사니, 국회의원이니 할 수 있을 거 같냐?”

강성태는 억울한 표정의 셋을 보며 픽 웃었다.

“정신 차려. 일본의 눈으로 보면, 아니 아까 나간 야쿠자 놈들에게조차 너희는 그냥 돈에 혼을 팔아먹은 한국인이야. 나 같은 깡패에게도 욕 처먹는 개 쓰레기.”

강렬한 강성태의 시선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 세 사람이 시선을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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