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25권 - 12화 (505/513)

《505》2부 25권 - 12화

제5장. 기죽지 말고 끝까지 가자.

아침을 맞은 강성태가 방에서 나와 처음 본 모습은 물가로 향하다 굳어버린 듯한 악어 형상의 최치곤이었다.

저 모습이 오랜만인 걸 보면 그동안 정말 바쁘게 살았던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거실 바닥에서 저렇게 엎드려 자면 몸이 안 아픈가?

좀 더 자게 놔두고.

욕실로 향했던 강성태가 조심스럽게 씻고 나왔을 때, 최치곤은 전 재산을 모두 빼앗긴 듯한 멍한 표정으로 거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일어났냐?”

“와, 씨! 얼마나 깊게 잤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구구! 아후!”

얇은 이불을 붙잡은 최치곤이 몸을 비틀어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 없었어?”

“아직.”

깊게 잤다는 최치곤 역시 일본에 가 있는 박노익과 이교창이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전화해보면 어떨까?”

“야쿠자들과 마주 앉아 있는데 잘못 전화하면 노익이 형님이나 교창이의 운신 폭이 좁아져. 기무라 쿠니오키가 보기에 우리가 조바심 낸다고 오해할 수도 있고.”

“그건 아는데 답답하니까 그러지.”

“맡겼으니 믿고 기다리자. 정말 위급한 상황이면 문자든, 짧은 통화든 할 거다, 만약 급한 연락도 못 할 만큼 야쿠자들이 밀어붙였다면….”

최치곤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강성태는 뒷말을 삼켰다.

‘어떤 희생이나 후폭풍이 생기든, 그 이후로 일본에 야쿠자는 없다.’

진심이어서 삼켰다.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손가락 하나를 내놓을 각오로 강성태를 막아선 박노익이었다.

그렇게 기무라 쿠니오키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그 뒤로 화해를 위해 일본까지 간 그의 등에 칼을 꽂는 건, 숨 쉴 자격이나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행동과 같았다.

‘선택 잘 해, 기무라 쿠니오키.’

창을 보며 경고를 떠올렸던 강성태는 나직한 숨을 내쉬며 주방으로 움직였다.

“커피 탈 거면 나는 믹스로 주라.”

이불을 반듯하게 개켜 소파에 올려둔 최치곤이 뻔뻔한 요구를 남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

이른 아침이었다.

오전 7시 20분으로 새벽에서 갓 벗어난 시간이었는데 기무라 쿠니오키가 보낸 야쿠자 조직원이 박노익의 객실을 찾았다.

“아침 식사를 모시러 왔습니다.”

“지금?”

“그렇습니다.”

한국말에 능통한 야쿠자 조직원을 보며 박노익은 같잖다는 투로 웃었다.

‘개새끼.’

새벽 6시에 일어나 샤워를 마쳤고, 7시 전에 셔츠와 정장을 차려입은 데다, 커피를 마시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7시 20분에 대뜸 아침을 먹자고 할 줄은 몰랐다.

늦장을 부리다가 허둥대는 모습을 기대했던 눈치였다.

어젯밤 도착한 이세종과 한국 보도진, 야쿠자 조직원들 앞에서 한국인은 게으르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잘나 보이고 싶다면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런데 기무라 쿠니오키는 그 간단한 이치를 어딘가에 던져버리고 어떡해서든 강성태나 신강남파, 심지어 박노익의 빈틈을 드러내서 자신을 돋보이려는 수작질을 멈추지 않았다.

박노익은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으드득. 으득.

그가 목을 꺾을 때마다 거북한 뼈 소리가 테이블 앞에 서 있는 야쿠자를 위협하듯 달려갔다.

“아침을 우리만 먹나? 아니면 기무라도 함께하나?”

“식당으로 가시면 오야붕이 나오실 겁니다.”

순서도 참.

식당에 먼저 자리해 관동 연합 오야붕을 맞으라는 걸 이토록 당당하게 말하는 뻔뻔함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대놓고 픽 웃은 박노익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관동 연합의 오야붕이 아침 식사에 초대하는 건데 너 하나 달랑 보낸 건 일본의 관습이냐, 아니면 나를 무시한 거냐?”

“제가 한국말을 할 줄 알아서 보내신 겁니다.”

“됐다. 너 하는 꼴을 보니까 입맛이 싹 가셨다.”

짧게 말을 던진 박노익은 왼팔을 들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오전 9시 30분 비행기로 돌아가야 한다. 가서 식사는 됐고, 공항에 가야 하니까 서약서만 받았으면 한다고 전해.”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흐음.”

건방진 대꾸에 이교창이 눈을 꿈틀했고, 박노익은 나직하게 숨을 뱉었다.

“꼬마야. 우리 달랑 다섯이 일본에 왔다. 그것도 관동 연합 아가리 안에. 너 같은 피라미와 투덕거려서 체면 상할 생각 없으니까 신강남파 독기가 어떤 건지 확인하고 싶으면 독종들로 꾸려달라고 해서 다시 와.”

박노익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멈칫했던 야쿠자 놈이 말대꾸를 하려는 듯 입을 움찔거렸고,

“아침 식….”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조용하게 앞에서 지켜보던 이교창이 무겁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에서 몸을 세운 이교창이 고개를 숙였는데 박노익은 가타부타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이교창은 천천히 야쿠자 조직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굵은 주먹, 부리부리한 눈, 떡 벌어진 상체,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든 바로 한 방 날릴 듯한 태도까지, 점잖았던 박노익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야쿠자 놈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교창이 나선 참이었다.

소파 근처에서 지켜보던 부산 덩치 셋 역시 언제라도 달려들 듯한 눈빛과 태도로 야쿠자를 노려보았다.

“우리가 먼저 너를 두들기게 하려고 미끼로 보낸 모양인데,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가서 노익이 형님 말씀 전해. 9시 30분 비행기다. 정확하게 8시에 호텔에서 나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꺼져.”

쇳소리 가득한 음성으로 으르렁거린 이교창이 고개를 돌렸다.

“야! 이 새끼 끌어내. 괜히 저 새끼들한테 트집 잡히지 않게 깨끗하게 내보내.”

“예, 형님.”

이교창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부산 덩치 세 명이 야쿠자 조직원을 향해 다가갔다.

말은 없었다.

한 명은 뒷덜미, 나머지 두 명은 팔을 잡고 그대로 끌고 가서 객실 밖으로 밀쳐냈다.

“저 새끼, 나가서 칼질당하는 거 아닙니까, 형님? 우리가 그랬다고 뒤집어씌울 수 있잖습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보스는 우리 말 믿어줄 거다. 연락해서 사실을 말할 시간만 있으면 돼.”

단단하게 답을 건네준 박노익이 서 있는 덩치 세 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여 일 터지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는 한이 있더라도 서울에 연락해라. 문자도 되고, 통화도 괜찮으니까 저 새끼들 작업이라는 말만 전해. 그럼 나머지는 우리 보스가 알아서 해줄 거다.”

“예, 형님.”

“일본이다. 우리 다섯이 이곳에서 피 뿌리고 쓰러지면, 내가 장담하는데 우리 보스는 야쿠자 새끼들 씨를 말릴 거다. 그러니까 기죽지 말고 끝까지 가자.”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형님.”

부산 덩치 셋이 직전보다 더욱 다부진 음성과 태도로 답을 내놓았다.

**

기무라 쿠니오키는 박노익이 머문 객실의 바로 위층에 있었다. 아래층에서 올라온 조직원의 보고를 들은 그는 못마땅한 심정을 대신해 눈매를 갸름하게 떴다.

“식사할 시간이 없으니 서약서만 가져와라?”

“죄송합니다, 오야붕.”

한 10분쯤 기다리게 한 뒤에 야쿠자 조직원들을 줄줄이 이끌고 식당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게다가 예약한 기무라 쿠니오키의 맞은편에는 의자도 하나만 두었다.

함께 온 이교창은 다른 조직원들과 앉히려는 그림이었는데 박노익이 초대를 거절하면서 모양새를 세우려던 계획이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다.

‘고약하게 됐어.’

버티면 박노익과 이교창은 한국으로 날아간다. 손가락을 내걸고 강성태에게 고개 숙이던 모습을 생각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식사를 거절했다는 핑계로 박노익 일행을 밀어버리면 가뜩이나 회칼을 억지로 거뒀던 강성태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하고서 달려올 테고.

기무라 쿠니오키는 나채상의 따귀를 잔인하게 갈기던 강성태와 그 뒤에 회칼을 거꾸로 들고 다가오던 모습을 연달아 떠올렸다.

‘어쩌지?’

고민하는 사이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서약서를 건네주는 순간, 한국의 연백국 회원들이 모조리 강성태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것뿐이냐.

독립유공자를 후원하겠다는 인터뷰를 마친 뒤에는 쿠니오키의 입지가 급격하게 쪼그라들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약속했지만, 두 가지 모두 기무라 쿠니오키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일이었다.

“거참.”

기무라 쿠니오키가 이를 지그시 깨물 때였다.

“오야붕. 한국에서 전화입니다.”

야쿠자 조직원의 보고에 기무라 쿠니오키는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강성태가?’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강성태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채상 이사장의 영애입니다, 오야붕.”

“크흠.”

당황했던 표정을 감추느라 더욱 고집스럽게 눈을 치켜뜬 기무라 쿠니오키가 손을 내밀었다.

한국의 연백국 회원들과 통화할 때는 지금처럼 통역을 맡은 조직원과 이어셋을 하나씩 나눠 사용했다.

“여보세요?”

- 기무라 회장님이세요? 나서희예요.

“흐음. 회장님은 좀 어떠십니까?”

- 염려해주신 덕분에 수술 경과가 나쁘지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 어제 곽정윤 의원과 함께 있었거든요. 얘기를 나누다 서약서를 내주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젠장, 기무라 쿠니오키는 뭐라 답하지 못하는 심정을 대신해 이를 꽉 깨물었다.

- 강성태는 야쿠자와 같은 협객이 아니라 일개 깡패 두목일 뿐이에요. 워낙 거친 방법에 당해서 잠시 당황했지만, 한국에는 제가 도움 청할 분들이 많아요. 그러니 절대 서약서를 넘겨주지 마세요.

이 여자는 아직 강성태를 모르는군.

나서희의 말을 들은 기무라 쿠니오키는 저도 모르게 비웃음을 흘렸다.

- 제가 이곳에서 나설 테니 일본의 의원분들께 도움을 청해주세요. 한국은 절대 일본에 대항하지 못해요. 그분들이 나서준다면 한국 정부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합니다. 또, 일본의 기업가 협회가 자재 수출을 금지하겠다고 나서도 한국 정부는 반드시 반응할 수밖에 없어요.

듣고 보니 그럴듯한 방법인데?

기무라는 허공을 바라보며 나서희의 말을 곱씹었다.

기무라가 부탁하면 일본의 의원들은 비행기를 타고 바로 날아간다.

강성태 역시 조직원들과 비행기를 타겠지만, 의원들까지 나서주는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입국을 거절할 수 있다.

뒤늦게 강성태가 멕시코 카르텔을 동원한다고 해도 최소 2주일은 필요하지 않을까?

- 자재 수출을 금지한다는 발표를 하시면 이쪽에서 보도할 명분이 생겨요. 한국 경제 다 망한다. 그런데 이게 깡패와 그들을 후원한 몇몇 그룹의 욕심 때문이었다. 어떠세요?

기발해. 대단해.

과연 나채상의 딸다워.

기무라가 내심 감탄할 때였다.

문이 열리며 야쿠자 조직원 한 명이 급하게 다가왔다.

‘뭐냐?’

기무라 쿠니오키가 시선을 들었고,

“박노익과 이교창이 조직원 셋을 데리고 객실을 나섰습니다.”

상체를 기울인 조직원이 빠르게 속삭였다.

“내가 급한 일이 있습니다. 뜻은 알았으니 나중에 좀 더 깊게 의논합시다.”

통화를 마친 기무라 쿠니오키는 급하게 몸을 세웠다.

“공항으로 가는 게 확실하냐?”

“다섯 명이 뒤따르고 있어서 방향을 바꾸면 바로 연락하게 조치해 두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공항으로 가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기무라 쿠니오키는 날카롭게 옆에 있는 조직원을 돌아보았다.

“공항으로 가겠다.”

“모시겠습니다, 오야붕.”

기무라 쿠니오키가 걷는 방향을 따라 20여 명의 조직원들이 앞과 뒤를 감싸듯 함께 움직였다.

나서희의 제안대로 움직일 것이냐, 서약서를 건네줄 것이냐.

박노익이 아침 식사를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던 탓에 기무라 쿠니오키에게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니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고민하고, 도착하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도로에 합류에 속도를 높이는 승용차의 뒷자리에서 그는 하얀 붕대가 감겨있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나서희의 계획은 솔깃하다.

문제가 생기면 나서희의 압력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대신하면 된다. 하지만,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강성태는 두려운 존재였다.

기무라 쿠니오키는 붕대를 감은 왼손을 들어 가슴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곱게 접어둔 가죽 지갑의 감촉을 느끼자 그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곱게 접어둔 서약서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

커피를 마시던 강성태는 박노익의 전화를 받았다.

그런 뒤에 아침 일찍 있었던 식사 초대와 공항으로 출발하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들었다.

- 동생에게는 면목이 없다.

“일찍 나오셨고, 누구도 다치지 않았으니 됐습니다. 만약 객실에서 계속 계셨다면, 기무라가 엉뚱한 짓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 그깟 놈들. 달려들면 얼마든지 맞설 각오는 있었다. 여차하면 동생에게 확실한 명분을 주는 거로 만족하자고 교창이와 이야기도 나눴고.

분한 가운데 강성태를 볼 면목이 없는 박노익의 심정이 그의 음성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이제야 왜 동생이 호텔에서 기무라, 그놈을 깨버리려고 했는지 알았다. 이놈들은 얼굴이나 말을 바꾸는 게 수치스럽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

강성태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눌러두었던 분통이 터진 모양이었다.

- 손가락까지 자르며 동생에게 고개 숙였던 놈이 아침 식사로 장난질 치는 걸 보고 나니까 이제는 아예 사람 새끼로 안 보여. 앞으로 같은 경우가 생긴다면 동생이 나서기 전에 내가 먼저 해결해 버릴 거 같다.

연달아 독한 각오를 내놓았던 박노익이 숨을 길게 뿜어냈다.

“마음 푸시고 조심해서 오십시오.”

- 서울에서 보자, 동생.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뒤에 차갑게 웃었다.

서약서가 있다면 나서희를 시작으로 연백국 회원들을 확실하게 손에 쥘 테고, 멕시코로 향하기 전에 더는 신경 쓸 일이 없게 마무리할 텐데 쉽게 끝나기를 바라는 것 또한 욕심이었나 보다.

이병렬이 조직의 세계에서 확실하게 쥐고 당길 줄 안다면, 이런 협상이나 대결에서 강성태는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

많이 고통스러울 텐데 괜찮겠어? 기무라?

마음을 정한 강성태는 픽 웃은 뒤에 머그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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