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2부 25권 - 18화
병실 안으로 들어선 강성태를 향해 김진용과 조봉진이 급하게 상체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의아한 점도 있었다.
인사하는 김진용과 조봉진, 그리고 침대 머리를 세운 채 기댄 이병렬까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이병렬이 당황할 일이 뭐가 있지?
강성태가 침대 맞은편을 돌아보았을 때, 그쪽에 서 있던 다섯 명은 반응이 좀 더 극명했다.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말을 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지, 눈치를 살폈고, 심지어 이병렬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마저 던졌다.
“우리 보스 몰라? 인사드려, 이 새끼들아!”
침대에 앉은 이병렬이 으르렁거리자 맞은편에 서 있던 다섯 명이 손을 늘어트린 뒤에 상체를 앞으로 꺾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속초에서 생활하는 임조한입니다, 형님.”
상체를 숙인 게 아니라 꺾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절도 있게 구부렸던 다섯 명이 동시에 몸을 세웠다.
인사는 받았다.
이제는 왜 강성태가 병실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살벌한 분위기였는지를 알아볼 차례였다.
답을 요구하는 눈으로 강성태가 돌아본 직후였다.
“전에 친하게 지내던 놈들인데 눈깔이 뒤집혔는지 고리대금업에 손대려고 했거든. 그거 경고했더니 달려온 거고.”
“그게 아니고, 형님.”
이병렬의 설명이 억울하다는 투로 임조한이 불쑥 끼어들었다.
“고리대금업이 아니라 형님. 일수 좀 돌린 겁니다, 형님.”
그렇다는데?
임조한의 말을 들은 강성태가 다시 이병렬을 찾았다.
“말 바꾸기는, 이 개새끼가? 야! 한 달에 선이자 3할 떼는 게 정상적인 이자냐?”
3할? 매월 30퍼센트를 선이자로 뗐다고?
“바닷가 이면도로 장사하는 사람들하고, 학생들한테 그 지랄을 떨었다는 거 아냐?”
이것들이 진짜.
“저기, 보스.”
눈매를 독하게 바꾼 강성태를 이병렬이 급하게 불렀다.
“저 새끼들, 아직 제대로 돌리지도 못했어. 깔아놓은 거 그대로 풀어놓고, 달에 2부 이상 이자 받지 말라고 하니까 급하게 뛰어온 거고. 내 얼굴 봐서 한 번만 기회 주라.”
이병렬과 김진용, 조봉진이 당황한 이유가 이거였나?
혹시 강성태가 대뜸 달려들어서 두들길까 봐?
이병렬의 시선과 표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임조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라운드 티 위로 노란 금목걸이가 요란스럽게 드러나 있었고, 재킷 소매 아래로 내려온 손목에도 두꺼운 금팔찌가 덜렁였다.
“병렬이가 저렇게까지 말하니까 이번은 모른 척 눈감을 건데, 어떻게 할래? 끝까지 해볼래? 아니면 이 정도에서 정리하고 말 들을래?”
“형님? 속초가 커졌다고 해도, 호텔들은 서울에서 넘어온 조직들이 깔고 앉아서 일자리 한두 개 얻는 게 전부고, 운영하던 업장들도 호텔로 손님 다 뺏겨서 조직 운영이 안 됩니다, 형님.”
능력이 부족해서 조직을 운영하지 못하겠으니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게 놔두라고?
“능력이 없으면 사라지는 게 맞지. 마약이나 고리대금업이 아니면 존재조차 못 하는 조직이 왜 있어야 하는 거지?”
강성태의 속내를 알아챘는지 침대에 앉은 이병렬이 ‘에라, 이 덜떨어진 새끼야!’ 하는 욕을 입 모양으로 던졌다.
뭔가 변명을 하려던 임조한이 멈칫했다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
“하여간, 촌놈들. 야, 이 새끼야? 우리 보스 만나기가 쉽냐? 이렇게 기회를 잡았으면 그냥 무릎 꿇고서 업장 하나만 차려달라고 매달려야지, 먹고살 게 없다고 징징대면 되겠냐, 이 모지리 새끼야?”
거칠게 대하고는 있지만, 임조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증명해주는 이병렬의 조언이었다.
유난스러울 만큼 몸에 걸친 금붙이, 손등에 나 있는 상처, 손목 바로 위까지 드러나 있는 문신, 임조한은 10년쯤 과거에서 현실로 툭 튀어나온 깡패 느낌이었다.
강성태가 마약과 고리대금업을 틀어막은 한쪽에서 이렇게 버둥대는 인간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강남파에 대드는 건 무섭고, 그렇다고 깡패짓으로 살던 인간들이 느닷없이 조태완처럼 마음잡고 새 삶을 살 리는 없으니 이 또한 강성태가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내가 병렬이랑 의논해볼 테니까 오늘은 그만 내려가. 그리고 아까 말한 선이자 받은 거 모조리 돌려주고.”
“형님?”
억울하다는 투의 음성이었다.
“한 달에 30퍼센트 선이자면 받은 사람은 무조건 지옥에 떨어져. 병원비, 학비, 급한 생활비, 사정은 다르겠지만, 그 급한 사람들의 숨통을 움켜쥐고 돈을 벌겠다고?”
강성태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자 임조한이 목을 움츠렸다.
지금까지 깡패들이 그렇게 살았다며 항변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강성태가 모른 척 넘겨줄 수 있는 정도를 훌쩍 넘은 수준이었다.
“오늘 중으로 선이자 받은 거 전부 돌려주고, 대출해준 거 있으면 명단 넘겨. 원금을 내가 보내 줄 테니까 그 사람들 더 괴롭히지 말고.”
강성태의 말을 들은 임조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그의 눈이 빤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뒤에 그는 신강남파는 진짜 이러냐는 듯한 느낌으로 이병렬을 돌아보았다.
‘업장 하나 달라고 매달렸어야지!’
이병렬의 입 모양을 확인한 임조한이 다급하게 시선을 가져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려가. 가서 선이자 받은 거 전부 돌려주고, 명단도 내놔. 진용아. 저쪽에서 보낸 명단 받고, 내용 확인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내게 바로 말하고.”
“알겠습니다, 형님.”
고개 숙이는 김진용을 보며 임조한은 말문이 막힌 눈치였다.
**
김병일은 부장판사라는 직책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위치인지 태어나서 처음 깨달았다.
“어떻게 하실 거냐고?”
소신영은 아예 대놓고 반말투였다.
그는 탁자에 놓인 서약서 복사본을 김병일 앞으로 밀어낸 뒤에 답을 내놓으라는 투로 시선을 들었다.
“이거 내가 보도하면 나 이사장은 무사할 거 같아요? 거기에 연순동 부장검사가 사전에 조사한 자료까지 나오면 여기 고검장이 나설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살면서 고검장과 방송국 회장, 국회 부의장이 나서서 깡패 두목을 싸고돌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조용하게 넘어갑시다, 조용하게.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어요?”
“억울하지 않습니까? 깡패가 부장판사를 때려서 수술까지 받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이게 대한민국에서 가능한 일입니까?”
“어허! 말씀 참! 억울할 일을 만들지 않았으면 되는 거 아니오? 누가 이런 서약서를 쓰라고 떠밀기를 했어, 아니면 120억 원을 횡령하라고 꼬드기기를 했어?”
“회장님?”
억울해하는 김병일을 보며 소신영은 정말이지 차갑게 웃었다.
안경 너머로 번득이는 소신영의 눈을 본 순간, 김병일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만큼 지금 마주한 소신영의 눈은 뱀, 그 자체였다.
“알았소. 그럼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대신 우리 방송국에서 어떤 보도가 나가도 원망하지 맙시다.”
“도대체 그 깡패 두목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국익에 도움 된다니까요. 국익에. 나 이사장이 120억 원을 해 먹는 동안, 말씀하신 그 깡패 두목은 120조 원짜리 공사를 우리나라에 몰고 왔다, 이 말입니다.”
“공사만 가져오면 폭력을 행사해도 됩니까?”
“그럼 부장판사 집안은 120억 원을 횡령해도 됩니까? 나라를 위해 120억 원을 횡령하셨냐고?”
몰아붙이는 소신영 앞에서 김병일은 말문이 턱 막혔다.
더 기막힌 일은 고강준과 이우섭이 입 한 번 열지 않은 채 지켜보고만 있다는 점이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전화하세요. 하셔서 인터뷰한 내용 보도하지 말라고 하세요.”
김병일의 질문에 소신영이 답을 내놓은 다음이었다.
왼팔을 든 고강준이 시간을 확인했다.
“정 결심을 바꾸지 못하겠다면, 이쯤에서 끝내십시다.”
그런 뒤에 점잖은 음성으로 앉아 있는 나머지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JBC 방송국 회장실이었다.
으리으리한 책상, 길게 늘어선 소파에서 고강준은 미련을 버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김병일 부장판사님. 한 가지만 명심하십시오. 부부가 부장판사시니까 판결에서 도움을 받을 거 같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고강준의 말뜻은 분명했다.
김병일과 나서희가 설쳐봐야 나채상의 판결을 도와줄 사법부 인맥은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경고를 던진 고강준이 그만하자는 투로 고개를 돌렸고, 지켜보던 소신영이 독사 같은 눈빛으로 구내전화기를 들었다.
“그래. 나다. 준비했던 횡령 건 방송 낼 준비하라고 해. 이세종 국장에게 말하면 알 거다. 오냐.”
그가 내려놓는 수화기 소리가 김병일의 심장을 찢으며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부장판사께서 방송국 회장을 우습게 아셨던 모양인데 어디 인터뷰 영상이 보도되는지 아닌지, 한번 봅시다. 법조인이 한 식구라고 모인다면, 우리 언론계와 방송계 역시 그 정도 결속은 있습니다.”
김병일이 보기에 소신영의 경고가 허투루 나온 건 절대 아니었다.
이대로 자리를 끝내면 검찰과 그룹이 비호하는 폭력조직 두목이 있다는 보도는 묻힐 테고, 엉뚱하게 나채상의 횡령 건과 눈앞에 있는 서약서만 보도될 게 분명했다.
‘우리는 힘이 있다. 하지만, 네 손으로 깔끔하게 끝내.’
글자로 써 놓은 듯 선명한 고강준, 소신영, 이우섭의 요구였다.
‘버티면 나씨 집안은 죽어. 너를 포함해서.’
세 사람의 눈매를 확인한 김병일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인터뷰만 취소하면 됩니까?”
“강성태 회장에게 약속한 대로 지금껏 받은 돈을 독립유공자를 위해 써주셔야겠지요? 물론, 횡령 금액도 채워놓으셔야 할 테고?”
“회장님, 그건 너무 잔인한 요구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느낌으로 소신영이 고개를 저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잘 달리던 자동차가 펑크 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억울하다고 하늘을 향해 소리치는 게 현명하겠습니까, 아니면 얼른 타이어를 교체하고 가던 길 가는 게 맞겠습니까?”
코너에 몰린 먹잇감을 바라보듯 눈가를 좁힌 소신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우리 부장판사께서 직접 타이어를 교체하시지는 않겠지요. 운전기사가 하든, 보험을 부르든 하겠지만, 아무튼 펑크 난 타이어는 교체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투로 소신영이 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굴욕 대신 연달아 마른침을 삼켰던 김병일은 어쩌지 못한 태도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시선을 떨군 상태에서 그는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납니다. 예. 오늘 인터뷰했던 영상 말인데요. 예?”
상대방과 통화하던 김병일이 놀란 얼굴로 소신영을 보았다. 방송을 취소하기로 했냐는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네. 그럼 보도는 취소된 거로 알겠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김병일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나중에라도 다른 사람 아닌, 김병일 본인이 인터뷰를 보도하지 말라며 직접 요청했다는 핑계를 만들기 위해 세 사람이 이렇게 나섰나 보다.
“자, 이렇게까지 하셨으니 우리가 하나쯤 내드리지요.”
자괴감에 빠져 시선을 들지 못하는 김병일에게 이우섭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 사업에 앞장서십시오. 그렇게만 하시면 다음번 선거에서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고개를 든 김병일 앞에서 세 사람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뻑뻑하게 그러고 있을래?
아니면 우리와 손잡고 편안하게 갈래?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우리는 또 한식구를 외면하지 않지요.”
고개 숙인 김병일을 세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강성태 회장 일은 잊으세요. 우리와 함께 움직이다 보면 좋은 일이 꽤 있을 겁니다.”
그리고는 절대 강성태를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분명하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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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조한 일행이 병실을 나선 뒤였다.
이병렬은 착잡한 표정으로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제법 친했던 모양인데, 맞아?”
“애새끼가 무식해서 그렇지, 잔머리는 안 굴리거든. 아까도 봐. 무식하게 씩씩대며 달려들고 말지, 내려가서 뒷구멍으로 다른 짓은 안 해. 어쩌다 한 번 내려가면 룸빵이 아니라 바닷가에서 조개 구워 먹자고 할 정도로 순박한 구석도 있고. 저 새끼만큼은 한 번쯤 기회를 주고 싶었어.”
강성태를 보았던 이병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저런 놈들이 계속 나올 텐데 모조리 두들길 수도 없고, 그냥 두자니 독버섯처럼 퍼질 테고, 큰일이네.”
“뭐? 고리대금업?”
“그런 거지. 우리가 멕시코로 가고 나면 저런 놈들이 더 많이 나올걸? 인천이나 대전, 이런 곳에서 우리 이름 팔면서 고리대금업 하는 놈들도 나올 거고.”
말끝에서 이병렬은 확인처럼 김진용을 올려다보았다.
“아래쪽에서 범신강남파라는 말이 나오나 봐.”
“그건 또 뭐야?”
“큰 도시에는 조직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 대전에 있는 조직 중 우리한테 속하지는 않았는데 배근이 형님 말씀을 듣는다고 하면 반쯤 신강남파라며 설치는 거지. 배근이 형님 이름 팔아먹으니까.”
“진짜 쉽지 않네.”
강성태의 대꾸 뒤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멕시코에 간다는 말이 돌면서 그 뒤를 노리는 놈들도 있나 보더라고.”
“우리가 나간 뒤에 밀고 올라오겠다는 건가?”
“지금은 누가 뭐래도 신강남파를 넘보기 어려워. 대신 우리가 멕시코에 나가 있는 동안, 고리대금업이나 마약, 뭐 이런 쪽 시장을 노리는 거지. 야쿠자만 해도 관동 연합만 두들긴 거지 다른 쪽은 멀쩡하잖아.”
충분히 가능성 있는 걱정이었다.
한편으로는 더럽게 사람 말 안 듣는 인간들이 깡패 된 거라는 이병렬의 말도 떠올랐다.
“지방에 업장을 지원해주면 어때?”
“뭐든 사람이 문제지. 임조한 같은 놈은 한 번쯤 밀어줄 만한데 엉뚱한 놈들한테 업장 차려줬다가는 그놈들 주머니만 불리고 끝나기 쉬워. 그래놓고 억울하다느니, 신강남파가 너무 쫀다느니 헛소리를 할 거고.”
그건 또 그렇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문득 은선곤을 떠올렸다.
그와 의논하면 어쩐지 이런 문제에 대안을 내놓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어디 다녀와?”
“태완이 형님 뵙고 왔어. 내일이나 모레부터 지방 한번 돌아볼까 하는데 어떤지 물어보기도 할 겸 해서 온 거고.”
“지방을 돌아보는 건 진짜 잘한 결정인데? 누구랑 가려고? 설마 치곤이 그 새끼하고만 가는 거 아니지?”
“치곤이가 왜?”
“몰라서 물어?”
몸서리를 치는 이병렬의 반응을 보며 강성태가 웃음을 터트렸고, 지켜보던 김진용과 조봉진이 고개를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