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가 돌아왔다
#Intro
“하하, 저는 천재가 아닙니다.”
엄청난 재능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음악가는 공연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고 밝혔다.
재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온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천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슈퍼 뮤지션이 되신 겁니까? 비결이 뭡니까?”
그의 답변은 심플했다.
“전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음악에 빠져 있었을 뿐입니다. 저를 유명인으로 만들어 준 건 여러분이 제 음악을 좋아해 주신 덕분이죠.”“아, 열정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오늘 공연에서도 선생님의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젊은 뮤지션들도 선생님의 열정에 모두 혀를 내둘렀으니까요.”
기자의 말에 인터뷰를 보고 있던 사람들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우리는 대단한 뮤지션을 볼 때 그들이 가진 재능을 부러워한다. 그만큼 음악에서 재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그것만으로는 슈퍼 뮤지션이 될 수 없다. 음악에서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끼다.
[전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음악에 빠져 있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열정이라고 지레짐작했지만, 음악가가 말한 이 답변에는 그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자신만의 음악을 하는 힘. 그 음악에 사람을 깊숙이 끌어들이는 힘.
그것이 바로 끼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방구석 천재에 머물고 마는 이유는 끼가 부족해서다. 재능이 넘쳐도 결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재능을 태울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끼는 재능을 밀고 가는 힘이고, 재능을 불태우는 땔감이다. 그 끼의 에너지가 그를 슈퍼 뮤지션으로 만든 것이다.
끼는 발광(發光)한다. 끼는 숨길 수 없는 강한 에너지여서 꼭 발광하게 되어있다. 발광하지 않으면 끼가 아니다. 발광은 끼를 내뿜는 모습이며 자신만의 빛을 내는 것이다.
재능에 끼가 더해지고 발광에 발광을 계속하면 비로소 엄청난 음악가, 슈퍼 뮤지션이 탄생한다.
* * *
뮤지션은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한다. 아무리 재능과 끼가 넘치는 슈퍼 뮤지션이라도 시대를 잘못 타고나면 말짱 꽝이다. 특히나 조선같이 척박한 땅에 태어나면 어찌할 방법이 없다.
재능과 끼는 오히려 독이 되고, 발광했다간 미친놈 취급받는다.
수철의 전생이 그랬다. 엄청난 재주를 갖고 태어났지만, 세상을 잘못 만나 천대받았고, 감출 수 없는 끼 때문에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요절(夭折)했다.
그에게 끼와 재주는 신의 축복이 아니라 악마의 저주 같았다.
#1화. 천대받은 천재 광대(1)
수철은 신발을 만드는 갖바치의 아들로 처음 태어났다. 그를 낳은 부모는 가난한 천민이지만 욕심내지 않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유일한 걱정은 하나뿐인 아들이 다른 집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수철아! 이놈아! 또 어딜 나가는 게냐!”
평소엔 얌전한 아이가 음악 소리만 들리면 가만있지 못했다. 부모가 막을 새도 없이 방문을 박차고 나가 광대 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사람들 사이에 껴서 구경하는 것도 잠시, 무대에 뛰어들어 광대들과 뒤섞였다.
꽤괭괘괘괭! 꽹꽤괭!
“얼쑤!”
꽹과리를 두드리며 춤을 췄고, 즉흥적으로 가사를 만들어 배운 적도 없는 판소리를 했다.
수철의 이런 당돌한 모습에 광대들은 화를 내고 쫓아낼 만도 한데, 오히려 같이 어울려 흥을 냈다. 어린 녀석이 내뿜는 끼와 재주가 놀라웠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이럴 때마다 수철의 아비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수철을 끌고 나갔다.
“종아리를 내밀거라.”
“아버지…….”
“어서!”
집으로 끌고 와서는 답답한 마음에 야단을 치고 종아리를 때렸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휙! 찰싹!
“잘못했어요, 아버지.”“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거라.”
“…….”
수철은 용서를 빌면서도 다시 그러지 말라는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 약속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저 미친놈이 또 나타났네.”
미친놈 취급을 받기도 했다.
“어휴, 저놈의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놓을 수도 없고.”
사람들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을 때마다 아비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식을 묶어 놓을 수도 없어 한탄했다.
물론 손 놓고 한탄만 한 것은 아니다. 기가 약해서 그렇다는 의원의 말에 비싼 한약을 달여 먹였고, 하나뿐인 자식을 살려 달라며 백일기도도 올렸다. 하지만 어떤 지극정성에도 수철의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억누를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고칠 수 없는 불치병 같았다.
소리만 들리면 몽유병 환자처럼 뛰쳐나갔고, 한참이 지나서야 탈진한 상태로 돌아왔다.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남의 잔치에 뛰어들었고, 어떤 날은 무당의 굿판에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저 광기 좀 봐, 저놈 귀신 들린 거 아냐?”“무당이 그러는데, 저주받은 피라서 그렇대. 굿판을 벌여서 악귀를 쫓아내든지, 아니면 평생 저렇게 살다가 죽는 거지.”“에구, 부모는 속 좀 타겠네, 쯧쯧.”
결국 부모는 없는 살림에 빚까지 내서 무당을 불러 굿을 시작했다. 어떻게든 자식을 살려 보겠다는 마음에 해 볼 건 다 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천지신명이시여!”
무당은 수철의 몸 안에 들어 있는 귀신을, 아니, 끼를 떨쳐 내기 위해 마당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방울을 흔들며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용하다는 무당의 굿도 수철의 끼를 잠재울 순 없었다.
오히려 무당이 눌렸고, 결국 자신이 모시는 신보다 더 큰 신이 수철에게 있다며 줄행랑을 쳐 버렸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미는 땅에 주저앉아 하늘을 원망했다.
* * *
모두가 수철의 행동을 이상하게 본 것은 아니었다.
“수철이 나타나야 흥이 나는데.”“그렇지, 수철이 있어야 제맛이지.”
수철의 돌출 행동을 좋아하고 재밌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동네에 광대 패가 오면 수철이 나타나 판을 달궈 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기 수철이다!”
“와! 수철이가 나타났다!”
그들은 수철이 나타나면 마치 주인공이 등장한 듯 환영했다.
“어서 와, 수철아.”
광대 패들도 자연스레 수철을 자신들의 게스트로 받아들였다. 수철이 나타나면 무대의 흥이 올라갔고, 그만큼 돈도 많이 걷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철에게 시선이 곱지 않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계속됐다. 마을에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최 진사 집에서 벌어진 얘기 들었어?”“그래. 소름 돋더구먼.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그런 짓을.”“미쳐? 그럼 혹시 그 수철이……?”
“에이, 설마.”
흉흉한 소문이 수철을 향하자 부모는 고심 끝에 광대 패의 우두머리를 만나 수철을 맡겼다. 수철이 철이 들고, 정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돌려보내겠다는 조건이었다. 어미는 눈물을 흘리며 수철을 떠나보냈다.
* * *
수철은 광대 패와 어울려 조선 팔도를 다니며 마음껏 끼를 펼치기 시작했다. 자유를 누리며 숨기지 않고 재능을 드러냈다.
“자, 오늘도 신명 나게 한번 놀아 봅시다, 얼쑤!”
덩기덕, 쿵덕!
“얼씨구, 좋다!”
광대 패에서 수철의 재주는 단연 돋보였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고,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무대는 언제나 장사진을 이뤘다.
“수철이라는 광대는 정말 대단해, 봇짐 매고 따라다니고 싶을 정도야.”“내 말이, 눈앞에 자꾸 어른거려서 일이 손에 안 잡힐 지경이야.”
수철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 * *
어느 날,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수철의 소리 하나, 동작 하나 놓치지 않고 유심히 지켜봤다.
“……믿을 수가 없어.”
수철의 재주가 믿기 어렵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 이건 정말…….”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는 조선 최고의 예인 집단을 이끄는 박 선생이었다. 그가 이끄는 예인 집단은 거리의 광대 패와는 달랐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고, 평민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관객도 대부분 양반이어서 그들을 천하다고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에겐 품격이라는 것이 있었다.
박 선생은 신들린 듯 가야금을 튕기고, 퉁소까지 거침없이 불어 대는 수철을 보며 흥분했다.
“사람의 재주가 아니야.”
자신의 집단에도 뛰어난 제자들이 많지만, 수철은 차원이 달랐다.
박 선생의 제자들도 조선에서 손꼽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지만 거기까지였다. 공부 잘하는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가르치는 것만 따를 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눈앞에서 보는 수철은 달랐다. 가야금을 튕기면 떨림이 가슴 속까지 파고들었고, 퉁소를 불 때는 자유로운 바람으로 가득 찬 듯했다.
수철은 소리 그 자체였다. 제자들이 악기를 연주한다면 수철은 직접 악기가 되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악기와 한 몸, 수철이 곧 악기였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박 선생은 광대 패 우두머리를 찾아갔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수철을 제대로 키워 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묵직한 엽전 뭉치도 건넸다.
우두머리는 망설임 없이 흔쾌히 박 선생의 뜻을 받아들였다. 오늘 같은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수철의 재능이 뛰어나니 때가 되면 떠날 걸 알고 있었다. 돈까지 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 *
수철을 데리고 온 박 선생은 본격적으로 예인의 예법과 격식, 음악의 기술 등을 수철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가르칠 게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시간보다 감탄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수철은 매번 스승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가르치는 것이 없어도 수철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덩기덕! 덩더러러. 궁기덕! 궁덕!
“동풍이 문득 부니 물결이 곱게 일어난다―!”
“얼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징! 징! 꽤괘괘괭!
수철은 조선의 명망 있는 예인들 앞에서도 끼와 재능을 펼쳤다.
“믿기 힘든 재주를 가졌군요. 말씀하신 대로 정말 놀랍습니다.”
수철의 무대를 보고는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하늘이 주신 재주니 잘 가르쳐서 귀하게 써 주십시오.”
박 선생의 손을 잡고 부탁의 말도 남겼다. 개중에는 수철의 재주가 부러워서 고개를 떨구는 사람도 있었다.
음악에 조예가 깊다고 자처하는 양반들도 수철의 무대를 보려고 줄을 서기 시작했다.
수철은 점점 유명 인사가 되어 갔다.
그 무렵,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정승 가문의 양반이 조선을 대표하는 예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였다. 소문으로 듣던 예인들의 재주를 직접 확인하고, 궁궐로 불러들여 왕에게 점수를 따고자 함이었다.
“네가 마지막 무대를 서게 될 것이야.”
박 선생은 수철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수철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스승님, 저는 그 자리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의외의 반응에 박 선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다. 어찌 그러느냐?”“저는 양반들의 노리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수철은 양반들이 모여 있는 자리가 내키지 않았다. 출세도 관심 없었다.
“어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네 신분을 잊었느냐! 받아들이거라! 조선 예인의 삶이 그런 걸 몰랐단 말이냐!”
스승은 평소와 달리 냉혹하게 꾸짖었다.
* * *
대궐 집 마당은 오전부터 붐볐다. 초대받은 양반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고, 소문을 듣고 모여든 동네 사람들이 담벼락을 빼곡히 둘러쌌다. 마치 축제의 현장 같았다.
집주인 대감은 마루 위 가장 상석에 앉아 공연을 지켜봤다.
“어후! 얼쑤!”
운동장처럼 넓은 마당에서 예인들은 장구와 북소리에 맞춰 자신들의 재주를 뽐내기 시작했다. 잘만 풀리면 궁궐에 들어갈 기회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