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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가 돌아왔다-2화 (2/239)

#2화. 천대받은 천재 광대(2)

둥! 두둥! 둥둥둥! 꽤괭! 꽹꽤괘괭!

본격적으로 신명 나는 무대가 펼쳐졌다.

꽹과리 소리에 맞춰 상모를 돌리고, 그 뒤로 험상궂은 탈을 쓴 사람들이 등장했다. 북을 두드리는 사내들이 길을 열자, 기묘한 형상을 한 사자가 춤을 추며 나타났다.

관객의 흥은 극도로 올라갔고, 우레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후 늦은 시각, 드디어 마지막 차례인 수철의 집단이 등장했다. 수철과 같은 문하생이 먼저 거문고를 연주했다. 곧이어 박 선생도 제자와 함께 협연을 펼쳤다.

“와!”

짝짝!

시간이 갈수록 구경하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는 더 커졌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긴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할 주인공이 등장했다.

수철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예인 복장을 하고 나타난 수철에게로 모였다. 수철은 붉은 노을빛을 받으며 마당 한가운데 있는 소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가야금을 안고 자리에 앉았다.

“흠.”

잠시 숨을 고른 수철은 가야금에 손을 얹었다.

띠잉. 뚜웅. 띠딩―!

줄을 뜯고 튕기는 그의 손가락은 마치 사랑하는 여인과 교감하는 것 같이 움직였다. 그의 무릎에 놓인 가야금은 흠모하는 도령의 무릎을 베고 누운 어여쁜 낭자 같았다.

수철의 진지함에 모두 숨을 멈췄다.

가야금을 제외하곤 멀리서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가 전부였다. 그마저 없었으면 시간이 멈춘 줄 알았으리라.

수철의 입술이 열리면서 가야금 선율을 타고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가 막혔으니―!”

“와…….”

그의 소리는 실로 아름다웠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혼을 빼놓았다. 사람들은 감동해서 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였다.

그의 소리는 노을빛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사람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마음을 건드렸다.

사람들은 수철의 소리에 점령당한 모습이었다.

“아…….”

장옷을 쓰고 지켜보던 여인들은 소리에 심취한 건지, 아니면 노을에 비친 수철의 외모에 반한 건지, 주먹을 꽉 쥔 채 짧은 신음을 냈다. 상석에 앉은 양반들도 입을 벌린 채 넋을 잃고 있었다.

정승이 사는 대궐집은 순식간에 천민인 수철이 내는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양반의 소리라곤 놀라움에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전부였다.

“휴…….”

긴 호흡으로 마지막 선율을 내뱉은 수철은 가야금을 내려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박수 칠 생각도 잊은 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수철에게 압도당했다.

짝짝!

뒤늦게 정신을 차린 대감이 먼저 박수를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수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대고 품위 있게 인사했다. 박수 소리는 한동안 이어졌다.

* * *

“오늘 수고 많았네, 어서들 드시게.”

공연이 끝나자 예인들에게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양반들도 자리를 돌아가며 예인들과 술잔을 주고받았다. 신분의 차이가 있어도 오늘 같은 날은 예인으로서 대접을 받았다.

양반들은 마치 자신이 예인이라도 된냥 허접한 지식을 쏟아 냈다. 예인들은 동조하며 양반들을 치켜세웠다. 그것이 관례였다. 어찌 됐건 공연을 마치고 대접을 받을 때는 예인의 삶도 남부럽지 않았다.

그 시각, 대감과 측근들은 연못이 있는 뒤뜰 정자에 모여 있었다.

“마지막 무대는 정말 대단했습니다.”“그래, 나도 그런 재주는 본 적이 없어.”

술잔을 기울이며 수철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대감이 집사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대감마님.”“가서 그 아이를 데려오너라.”

“네, 대감마님.”

대감이 수철을 찾자, 집사는 앞마당으로 향했다.

“대감마님께서 부르시네.”

수철은 예인들과 어울려 저녁을 먹고 있었다. 대감이 부른다는 집사의 말에 잠시 멈칫하다 따라나섰다.

수철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 박 선생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뒤뜰에 도착한 수철은 경직됐다. 자리엔 온통 나이 많고 지위가 높은 양반들뿐이었다. 난감해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았다.

“자. 오늘 같은 날. 기분 좋게 취해 보세.”

“좋습니다. 대감.”

대감이 술잔을 들자 양반들은 다 같이 건배하고 술을 들이켰다. 수철은 한쪽 구석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자. 내 술 한잔 받게.”

누군가 수철에게 잔을 내밀었다. 술 한잔 따라주고 오늘 공연에 대해 말을 섞을 요량이었다. 그러자 다른 양반들도 돌아가면서 수철에게 잔을 내밀었다.

수철은 곤욕스러웠지만 따라주는 술을 모두 받아 마셔야 했다. 누구의 술은 마시고 누구의 술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술을 들이켜고는 안주 삼아 수철의 재주를 칭찬했다. 수철이 같은 재주가 있으면 천민이 되어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궁궐에 들어가면 왕이 놀라서 입이 벌어질 거란 말도 튀어나왔다.

그때였다.

툭!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수철이 들고 있던 잔을 놓쳤다.

“헉!”

수철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엎질러진 술을 보며 당황했다.

“허허, 이 사람. 술 마시는 재주는 나보다 못하구먼. 하하.”

다행히 양반들은 멈칫하면서도 별일 아니라며 대인배처럼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들의 너그러움은 여기까지였다.

“대감마님, 자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때 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같이 가세.”

누군가 수철을 이끌었다. 취한 모습을 보였는데도 놓아주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미소만 보였다.

* * *

옮겨 간 곳은 대궐집 구석에 있는 은밀한 곳이었다.

대감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술상 옆에 대기하고 있던 기생들이 열을 맞춰 일어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표로 보이는 기생이 고개를 숙였다. 양반들은 예약이라도 한 듯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대표가 기생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 아이는 이번에 새로 온 춘월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 아이는…….”

소개가 끝나자, 기생들은 각자 맡은 양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잔에 술을 채웠다. 수철은 술상 끄트머리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자. 자리를 옮겼으니 다시 한 잔씩 쭉 들이켜세나.”

“네, 대감.”

다들 건배를 하고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그때 대감과 같이 상석에 앉아 있던 양반이 입을 열었다.

“대감, 저는 이제부터 염치를 좀 내려놓겠습니다. 너무 무거워서 들고 있기가 힘듭니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기생을 껴안았다.

“하하! 그러게, 역시 자네는 흥을 아는군.”

대감도 크게 웃으며 옆에 있던 기생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다른 양반들도 각자의 기생에게 시선과 손이 옮겨갔다.

그들의 행실은 조금 전과는 달랐다. 품위라는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치마 밑으로 바쁘게 손이 들락날락했고, 입에서 입으로 술을 옮기기도 했다. 옷은 아예 반쯤 풀어 젖히고 있었다. 보고 있기가 역겨울 정도였다.

난잡한 짓을 할 때마다 기생들의 치마폭엔 엽전이 쌓였다.

수철은 참기 힘들었다. 자신을 허수아비처럼 앉혀놓고 모멸감을 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예인을 짓밟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양반들이 술 취한 틈을 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기생 중 한 명이 수철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기생들이 나가서 요염한 표정으로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감은 옷을 벗을 때마다 등 뒤에 있던 엽전 뭉치를 집어 치마폭에 던졌다. 기생들은 입이 벌어져 콧소리를 내며 더 애교를 떨었다.

“이제, 네가 나가서 한 곡조 뽑아 보거라.”

느닷없이 대감이 수철에게 툭 내뱉었다.

“……?”

수철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잠시 멍하니 대감을 쳐다봤다.

“뭐 하는 것이냐! 흥을 깰 셈이냐! 어서 가야금 튕겨서 흥을 키워 보란 말이다!”

그게 수철을 끌고 온 이유였다.

예인으로서 존중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리갯감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내뱉은 칭찬은 거짓이었다.

수철은 모욕감을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가 가야금을 잡고 앉았다.

양반들은 취한 눈으로 수철을 봤다.

툭.

수철의 앞에도 엽전 뭉치가 던져졌다.

순간 수철의 눈빛이 바뀌었다. 흥청망청하는 양반들을 한번 쭉 훑어보고는 소리를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아, 여기 좀 보소!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으니, 어서들 와서 보소! 내 살다 살다 이렇게 천한 놈들은 또 처음 보오―!”

기생을 껴안고 있던 양반들이 한둘씩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저잣거리에 똥개들 혓바닥도 이들보다는 깨끗할 것이오. 얼쑤!”

수철은 직접 박까지 넣어 가며 소리를 질렀다. 양반들의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수철은 개의치 않고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문둥병이 추하다 한들 어찌 이들보다 추하겠소! 동네 사람들아! 어서 와서 구경 좀 하소! 내 살다 살다 이렇게 천한 놈들은 처음 본단 말이오!”

양반들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뭣이라!”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수철은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후우.”

새벽 공기에 잠시 숨을 고른 후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대문에 다다랐을 땐 예인들은 모두 사라졌고, 휘황찬 달빛만이 텅 빈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 * *

“우웩! 우웩!”

숙소로 돌아온 수철은 밤새 구역질을 했다.

탕! 탕!

“문을 열거라! 어서 문을 열거라!”

이른 아침부터 관아에서 들이닥쳤다.

“수철이가 누구냐!”

그 소리에 수철이 문을 열고 나오자 포졸들이 달려들어 포박했다.

양반들이 자신들의 행각이 알려질까 봐 선수를 친 것이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수철을 관아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려 놓고 수령이 소리쳤다.

“반상의 법도가 지엄하거늘, 네놈이 감히 양반을 농락하고…….”

술에 취해 대감의 딸 방에 들어가 추행을 하려다 발각되자 도망쳤다는 누명이 씌워졌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의 더러운 행각이 드러날까 봐 벌인 모략입니다!”

수철은 핏대를 세우며 진실을 말했다. 하지만 먹히지 않았다.

“어허! 증인이 여럿 있거늘. 그래도 네놈이 끝까지 잡아뗄 셈이냐!”

그들은 이미 다 한통속이었다.

그날 밤, 고문에 지쳐 옥 창살에 기대어 있는 수철의 눈에 달빛이 들어왔다.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두운 불빛 아래서 자식을 걱정하고 있을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한 사내가 나타나 포졸에게 뭔가를 건넸다. 포졸은 사내와 눈을 마주치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사내가 건넨 뭔가를 사발에 털어 넣었다. 물을 붓고는 손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사발을 들고는 수철에게로 향했다.

“죄가 없으면 곧 풀려날 거야. 부모님 생각을 해서라도 힘을 내야지.”

위로하면서 물 사발을 내밀었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힘내.”

“고맙습니다.”

수철은 포졸이 건넨 물을 쭉 들이켰다.

―헉!

물 잔을 떨어트리며 쓰러졌다. 그리고는 일어나지 못했다.

수철의 나이 꽃다운 17세였다.

“수고했네.”

소식을 전해 들은 대감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잘못이야, 내가 죽음으로 내몰았어.”

스승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개탄했지만, 의미 없는 후회일 뿐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정조가 5년째 왕을 하고 있었고,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25살의 모차르트는 유럽에서 엄청난 인정을 받으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고, 평민이었던 베토벤은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해 악성(樂聖)이라는 찬양까지 받는다. 하지만 조선의 음악가들은 그러지 못했다.

천대받고 멸시당했다.

* * *

수철의 죽음과 상관없이 그곳의 시간은 무심하게 계속 흘렀다. 꽃만이 그곳에서 벌어진 잔인함을 덮으려는 듯 피었다 지기를 반복했다.

전쟁이 나서 관아는 불탔고, 감옥이 있던 자리도 황량하게 변했다. 대감이 살던 대궐집도 불타서 사라지고, 새로운 집이 생겨났다.

그렇게 피고 지고,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다가, 얼마나 흘렀을까.

“아앙!”

수철이 쓰러졌던 자리에서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끼의 숨통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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