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기타 좀 치세요?
수철의 우려와 달리 동민이는 문제없다는 얼굴이다.
“상철이는 원래 통기타 좀 치니까 괜찮고. 민석이는 드럼 학원 끊을 거야. 난 사촌 형한테 무대 매너 배울 거고.”
“무대 매너?”
“너도 알다시피 내가 매너가 좋으니까 안 배워도 되는데, 아무래도 내가 밴드의 얼굴이니까 갖출 건 갖춰 줘야지.”
상철이가 끼어들었다.
“얼굴은 수철이지.”
“짜식이, 우쒸!”
동민이가 상철의 목을 졸랐다.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말없이 서 있는 기영이를 쳐다봤다.
“기영아, 넌 뭐 할 건데?”“베이스가 비었으니까 베이스 해야지.”
“할 줄은 알고?”
“줄이 4개밖에 안 돼서 금방 배울 거래.”
“누가 그래?”
“쟤가.”
동민이를 가리켰다.
줄이 4개라서 금방 배운다니 동민이다운 발상이다. 아무래도 동민이가 노래하고 싶어서 밴드를 만든 모양새였다.
“파트는 어떻게 정한 거야?”
“가위바위보.”
“동민이가 일등?”
“응, 나도 노래하고 싶었는데 결승에서 졌어.”
기영이가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 진짜 대단하다. 존경한다. 리스펙트!”
수철이 친구들을 돌아보며 박수를 쳤다. 정말 용감한 녀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지?”
민석이가 팩트 체크를 했다. 그러자 동민이가 끼어들었다.
“원래 역사는 무식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거야.”
그 말에 기영이가 반기를 들었다.
“무식한 사람이 지배하면 나라 망하지 않을까?”“안 망해, 락 스피릿이 있잖아.”
동민이에게 락 스피릿은 만병통치약이었다. 락 스피릿이라는 종교의 교주 같았다.
물끄러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밴드 말고 개그콘서트, 그런 거 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여자애들 개그삘 좋아하잖아.”“오케이, 올해는 락 스피릿! 내년엔 개그 스피릿!”“오예~ 락! 락! 개그! 개그!”
마냥 즐거운 녀석들이다.
신나서 소리치던 동민이가 수철을 돌아봤다.
“수철아, 넌 키보드 치면 되겠다.”
악기를 추천했다. 같이 밴드를 하자는 말이다. 하지만 수철은 할 수가 없다.
“미안해, 난 정말 안 돼.”
“왜?”
“알바 해야 해. 엄마도 도와드려야 하고.”
핑계였다.
알바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수철은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다. 끼와 재능을 드러낼 수 없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라도 부른 날은 여지없이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들리는 꽹과리 소리, 가야금 소리, 갑자기 눈앞을 지나가는 날카로운 칼, 누군가의 눈물, 아무리 질러도 나오지 않는 비명.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답답함에 가슴을 쥐어 잡은 채 눈을 떴다. 그 후로 수철은 음악 앞에서 항상 멈칫했다. 영혼에 잠재된 전생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진짜 미안해.”
친구들과 같이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또 악몽에 시달릴 게 뻔하다. 17살이 넘어가면서 그나마 잠잠해진 악몽이다. 다시 끄집어내고 싶진 않다.
수철의 마음을 모르는 동민이는 아쉬워했다.
“야, 그래도 추억은 남겨야지. 진미 여고 귀요미들한테 설레발 다 쳐 놨는데.”“그래, 수철아. 같이하자. 넌 그냥 쉬운 거 해. 캐스터네츠나 탬버린 같은 거. 아니면 동민이랑 같이 노래를 하든지.”
수철의 재능을 모르는 친구들은 연습을 안 해도 될 적당한 악기를 추천했다. 락에 캐스터네츠와 탬버린이라니, 대단한 놈들이다.
그때 동민이가 갑자기 인상을 썼다.
“노래는 안 돼!”
“……?”
모두 동민이를 쳐다봤다.
“수철이가 저 얼굴에 노래까지 하면 우린 어떻게 되냐? 완전 들러리 되잖아!”
“……!”
동민이가 수철을 보면서 눈에 힘을 줬다.
“노래는 절대 안 돼, 알았지!”
간절한 눈빛이었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래, 우리도 주목 좀 받고 살자.”
툭 튀어나온 민석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 같지만 사실이었다. 수철이 노래를 부르면 스포트라이트는 수철에게 갈 것이 뻔했다.
이 논쟁에 마침표를 찍으러 수철이 나섰다.
“그럼 난 더더욱 무대에 올라가면 안 되지.”
“왜?”
“잘생겨서 위험하다며? 나 때문에 밴드의 목적을 무너트리고 싶지 않아.”“재수 없게 네 입으로 팩트 체크 하냐? 고개 숙이고 있으면 되지.”“고개 숙인다고 모를까?”“뻔뻔한 놈, 그럼 가면을 써.”
“더 궁금해할걸?”
“잔인한 자식.”
수철이 이렇게 뻔뻔하게 구는 건 그만큼 친하다는 얘기다.
내친김에 한 발 더 나섰다.
“경쟁자를 제거하는 건 수컷의 본능이야. 암컷 차지하려고 피 터지게 싸우는 동물들 많이 봤잖아. 너희처럼 본능적인 녀석들이 왜 갑자기 의리 운운하며 이성적으로 굴어?”
“친구니까.”
“친구니까 빠진다는 거야.”“그래도 의리가 있지! 할 거면 다 같이하고, 안 할 거면 다 같이 안 해야지.”“내가 안 한다고 너희도 안 할 거야?”
“…….”
“너희, 발정기잖아.”
“…….”
“선택해, 의리야? 러브야?”
“…….”
“의리는 영원하지만 러브는 때가 있잖아.”
“그건 그래.”
오랜 침묵을 깨고 동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왜 그래? 락커가 갑자기 발라드 가수가 됐네?”
“…….”
“나 진짜 알바 해야 하니까 이번만 봐줘, 대신 빅팬으로 열심히 응원할게.”“그럼…… 빅팬 말고 매니저 해.”“매니저? 알았어, 매니저 할게.”
수철이 빠진다고 해서 아쉬웠던 동민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넌 이제부터 내 전용 매니저다. 난 가수니까. 용 매니저! 내 의상 잘 챙겨!”
동민이가 교복을 벗어서 수철에게 던졌다.
“자! 우린 계속 가자! 락 스피릿! 예에~!”
손 마이크를 입에 대고 허리를 뒤로 젖혔다.
“쉬즈 곤~!”
고음을 지르며 다시 락커로 빙의했다.
“컴온!”
상철이는 다리를 벌리고 기타 치는 흉내를 냈고.
“두두두둥!”
민석이는 허공에다 드럼을 쳤다. 기영이는 혼자 서 있기가 뻘쭘했는지 허리를 숙이고 짧은 머리를 흔들어 댔다.
악기는 못해도 팀워크는 최고였다.
‘저놈들이 또 모여 있네.’
맞은편 건물에서 선생이 눈 위에 손을 얹고 쳐다보고 있었다.
* * *
“주문하신 거 나왔습니다.”
친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습하느라 고심할 때, 수철은 저녁 알바를 시작했다.
지잉―
잠시 쉬는데 전화가 진동했다.
―야, 용수철! 친구들이 예술을 불태우는데 넌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돼서 돈 버느라 정신이 없냐?
연습실에 들르지 못해서 그런지, 동민이가 툴툴댔다. 수철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연습 끝나고 햄버거 먹으러 와, 감자튀김 많이 줄게.”―야, 나 가수야! 목 관리해야지. 트랜스지방 그런 거 먹으면 목에 해로워. 매니저가 그것도 모르냐?
“알았어, 넌 생감자로 줄게.”―짜식이, 정말. 너, 내일 시간 되지?
“내일 왜?”
―마이크 사러 갈 거니까 같이 가자.
“마이크? 연습실에 있잖아.”―연습실 거 안 좋아, 내 목소리를 깎아 먹는다고.
초보가 장비 탓을 하고 있다.
―난 락 스피릿이 중요한데, 그러려면 전용 마이크가 있어야지. 락커는 해골 그려진 전용 마이크를 써야 한단 말이야.
“다른 애들이랑 사러 가면 되잖아.”―네가 매니저 하기로 했잖아. 가수가 움직이면 매니저가 알아서 따라와야 하는 거 아냐? 이 바닥 생리도 모르면서 어떻게 매니저를 하겠다고.
“쩝.”
며칠 알바 하느라 피곤해서 하루 푹 자려고 했더니 그른 것 같다.
“알았어, 어디서 볼까?”―종로3가역 1번 출구로 10시까지 와.
* * *
“여기가 뮤지션의 메카구나.”
낙원상가 앞에 도착한 수철이 건물을 올려다봤다.
“근데 악기점은 어디에 있지?”“따라와 봐, 신세계를 보게 될 거야.”
동민이가 개선장군처럼 앞장서 계단을 올라갔다.
쭉 뻗은 계단을 올라 상가에 들어서니 동민이 말대로 신세계가 펼쳐졌다.
양쪽으로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악기점에는 갖가지 악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복도 중앙으로도 피아노와 신디사이저, 기타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더 엄청났다.
“와, 이게 다 악기야?”
동민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동민이도 처음 와 보는 거였다.
복도를 따라 걷다 보니, 관악기, 타악기, 목관악기, 현악기 등등 클래식 악기에서 현대 악기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각 나라의 민속 악기까지 있었다.
악기 천국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정말 없는 게 없네.”
“엄청나지 않아?”
“응, 정말 엄청나다.”
수철은 진열되어있는 악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가 세상에서 가장 크대. 악기점이 4백 개가 넘어. 합주실과 야외 공연장도 있대.”“온 김에 다 보고 가자.”
사려는 마이크는 뒤로 미뤄 둔 채, 둘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갖고 싶은 악기 앞에선 군침을 흘렸고, 유명 뮤지션이 쓰는 악기 앞에선 넋을 잃고 쳐다봤다.
“돈만 있으면 다 사고 싶다.”
“내 말이.”
악기점 사이로 많은 뮤지션들이 오갔다. 악기를 직접 쳐 보는 사람들 때문에 여기저기서 악기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말 그대로 뮤지션의 메카였다.
‘한번 쳐 보고 싶다.’
갖가지 악기가 수철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서 와서 나 좀 연주해 달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언젠간 꼭 다 연주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와! 저거 에릭 클랩튼이 쓰는 기타다!”
동민이가 한 악기점 앞에 멈춰 섰다. 입구에 에릭 클랩튼이 쓰던 펜더 스트라토캐스터가 전시되어 있었다.
동민이가 신기한 얼굴로 다가갔다.
“손대지 마!”
갑자기 매장 안에서 알바가 소리쳤다.
동민이는 멈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신기해서 그만……. 이거 에릭 클랩튼이 쓰는 기타 맞죠?”“비싼 거니까 살 거 아니면 만지지 마.”
알바는 물음에 대답도 않고 동민이를 무시했다.
“왜 그러세요? 살 수도 있죠…….”
동민이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알바가 피식 웃었다.
“너희, 고딩이지?”
“왜요?”
“요즘 고딩들은 개념이 없어.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몇 살 차이 나지도 않아 보이는데 꼰대 티를 냈다.
“에이, 씨.”
수철은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반말하며 동민이를 무시하는 알바에게 욱할 뻔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다투고 싶지 않았다.
알바는 수철의 말을 못 들었는지, 기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손자국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다시 동민이를 봤다.
“벌써 고딩들 축제 시즌인가?”
알바 짬밥이 좀 되는지, 낙원상가에 온 목적을 한 방에 맞췄다.
“저건 프로들이 쓰는 거고, 너희가 쓰는 거 보려면 저쪽에 있어.”
매장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엔 한눈에 봐도 저렴해 보이는 기타들이 모여 있었다.
“근데 너희, 기타는 칠 줄 알아?”
일바는 계속 수철과 동민을 자극했다. 둘을 번갈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장사할 생각이 없는지, 아니면 기타 사러 온 게 아니란 걸 눈치챘는지, 계속 무시했다.
결국 수철이 욱해서 나섰다.
“아저씨는 잘 치세요?”
“나? 좀 치지.”
가소롭다는 듯이 씨익 웃더니 옆에 있던 기타를 집어 들었다.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자세다.
“형아가 오늘 기타의 진수를 보여 줄 테니까 잘 보고 감동받아.”
수철은 망나니 같은 알바의 행동이 어이없었다.
알바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희, 지미 페이지라고 알아?”“알아요, 3대 기타리스트 중에 한 명이잖아요.”
동민이가 잘 안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맞아, 오늘 형아가 지미 페이지랑 똑같이 치는 거 보여 줄게. ‘팍시 레이디(foxey lady)’라는 곡이야. ‘섹시한 여인’이란 뜻이지.”
“와, 감사합니다!”
동민이는 알바의 마초 같은 잘난 척에 중독됐는지, 조금 전 무례함은 잊어버리고 환호했다.
알바는 앰프를 켜더니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연주를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이잉―!
피드백 주법으로 소리를 키우더니.
징징! 촹! 징징! 촹!
이팩터를 걸고 거친 톤으로 리듬을 넣기 시작했다.
“와!”
동민이의 입이 벌어졌다. 덕분에 알바는 기분이 더 업 됐다. 과하게 몸을 흔들었다. 지판을 왔다 갔다 하는 손가락에도 힘이 들어갔다.
“진짜 잘 치시네요.”
얼마나 잘 치는지 두고 보겠다던 동민이의 표정은 순식간에 ‘형, 사랑해요!’로 바뀌었다.
알바는 마치 기타의 신이라도 된 듯이 잔뜩 몰입한 얼굴이었다.
동민이의 리액션이 극에 달하자, 알바는 기타 리프를 반복하며 말을 걸었다.
“너도 형처럼 잘 치고 싶지?”
“네.”
“형이 기타 좋은 거로 추천해 줄 테니까 그걸로 열심히 연습해. 언젠가는 너도 형처럼 칠 수 있어.”
이게 알바의 상술이었나 보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동민이는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힘을 주어 대답했다.
“너, 오늘 운 좋은 거야. 내가 원래 잘 나서지 않는데, 특별히 보여 주는 거야. 어디 가서 이런 연주 못 본다.”“감사합니다. 형님.”
동민이는 금방 팬클럽이라도 만들 자세였다.
알바는 더 기고만장해져서 이빨로 기타 줄을 뜯는 시늉까지 했고, 바디에 붙어 있는 트레몰로 암을 움직여 비브라토 소리도 만들어 냈다.
지이이잉―!
동민이는 벌어질 대로 벌어져 하마 입이 되었다. 하지만 수철은 그렇지 않았다. 알바가 연주하는 내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수철은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