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2화 (12/239)

#12화. 이걸 한 번에 다 듣는다고?

학교는 고풍스럽게 생긴 건물이었다.

수철은 잠시 건물을 올려다보고는 입구로 들어갔다.

쿵쿵. 탁. 쿵쿵. 탁.

들어가자마자 지하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내려가니 작은 연습실에서 학생들이 열심히 드럼을 두드리며 개인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다시 계단을 올라와서 1층으로 올라갔다. 중앙에 학교의 리셉션 데스크가 있고, 그 앞으로 넓은 복도에 소파와 휴식 공간이 있었다.

복도 한쪽 편에는 계단에 앉아 열심히 콘트라베이스를 튕기는 학생이 보였고, 그 옆에는 드럼 스틱을 고무판에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 학생도 보였다.

리셉션 데스크 옆에는 넓은 카페테리아도 있었다. 카페테리아 안에는 학생들이 휴식을 취하며 포켓볼이랑 다트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좋은걸.’

수철은 학교가 맘에 들었다.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부동산에 집을 보러 온 사람처럼 학교 곳곳을 둘러봤다.

2층으로 가니 공연을 할 수 있는 큰 홀이 보였다. 마치 학교의 무게중심을 잡듯이 중앙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강의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흠.”

수철은 복도를 걸어 강의실을 휙 한번 둘러보고는 다시 계단을 밟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는 개인 연습을 할 수 있는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좀 널찍한 피아노 방에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연습에 집중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음악학교답게 어디서나 학생들은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도 학교나 다녀 볼까? 어차피 공짠데.’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쳐 갔다.

그만큼 학교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4층으로 올라갔다.

4층에선 학생들이 합주를 하는지 ‘앙상블’실에서 빅밴드 음악이 들려왔다.

수철은 슬그머니 다가가 문에 붙은 작은 유리창을 들여다봤다.

보면대에 놓인 악보를 보며 진지한 얼굴로 연주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훗.’

열심히 집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직 풋풋하지만 미래의 음악 꿈나무들을 보는 것 같았다. 비슷한 또래지만 그렇게 보였다.

수철은 다시 2층으로 내려와 돌아다니다 중앙에 있는 홀의 대문을 슬쩍 한번 밀어 봤다.

스르르.

잠겨 있을 줄 알았던 두꺼운 문이 천천히 열렸다.

수철은 머리를 빼꼼 내밀고 안을 들여다봤다.

내부는 어두웠다.

무대 위에 있는 그랜드피아노 위에만 핀 조명이 내려오고 있었다.

수철은 잠시 주위를 살피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문을 닫고 피아노가 있는 무대로 올라갔다.

삐걱.

그랜드피아노의 뚜껑이 쉽게 열렸다. 수철은 선 채로 건반을 눌러 봤다.

확실히 좋은 피아노는 건반이 손가락에 쫙쫙 달라붙었다.

해머가 현을 때리는 소리도 무척 선명했다.

수철은 의자에 앉아서 피아노를 쳐 보기 시작했다. 터치하는 힘을 줄여 조용히 건반을 눌렀다. 방금 앙상블실에서 들었던 빅밴드의 음악을 연주했다.

‘누구지?’

한참 집중해서 연주하고 있는데 컴컴한 객석에서 사람이 보였다.

누군가 홀로 객석에 앉아 눈을 감고 수철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학교 사람인가?’

수철은 연주를 멈추고 조용히 피아노 뚜껑을 내리고 홀을 빠져나왔다.

‘휴…….’

다시 복도로 빠져나온 수철은 강의실이 있는 곳을 구경하며 걸어 다녔다.

창문으로 보이는 학생들은 다들 열심이었다. 수업 풍경은 일반 학교와 많이 달랐다. 학생 수도 몇 명 안 되고, 방마다 악기가 있었다.

‘다혜?’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지나가는 데 유리창 너머 다혜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수철은 몸을 낮췄다. 강의실 뒷문에 어깨를 붙였다. 문틈에 귀를 대고 강의를 엿들었다.

다혜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궁금했다.

* * *

외국에서 막 석사를 마치고 돌아온 젊은 교수는 학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학부를 이 학교에서 마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강의에는 힘이 넘쳤다.

“음(音) 기억력은 작곡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능력입니다. 지금부터 음악을 들려줄 테니까 잘 듣고 기억했다가 악보로 만들어 오세요. 성적에도 반영할 겁니다.”“아, 교수님! 저희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한 번 듣고 악보를 그려와요?”“그럼 세 번 들려줄게요. 잘 기억했다가 내일까지 악보를 제출하세요.”

학생들의 얼굴엔 하기 싫은 표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젊은 교수는 개의치 않고 할 말을 계속했다.

“우연히 떠오른 악상을 까먹지 않고 기억했다가 집에 가서 바로 작곡을 시작하려면 이런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맞는 말이다. 음을 기억하는 능력은 작곡가뿐만이 아니라 모든 뮤지션에게 중요한 능력이다.

음(音) 기억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훈련을 통해 후천적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 능력을 키워 주고자 한 것이다. 음 기억력이 발달하면 악기가 없어도 머릿속에서 작곡하는 능력이 생긴다.

“이것으로 기말시험을 대체할 수도 있으니까 집중하세요.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젠장.

음감이 부족한 학생들은 교수의 일방적인 통보에 반발했다. 하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교수는 그들을 다독였다.

“완벽을 기대하는 건 아니니까 전체 악기 편성까지 힘 닫는 대로 그려 오세요.”

말 그대로 교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교수의 의도는 학생들에게 음 기억력의 중요성을 알려 주고 소리에 집중하는 능력을 상승시키는 정도였다.

없던 능력이 갑자기 생길 수도 없고, 이런 훈련이 학생들에게 버겁다는 걸 알기에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인터넷 뒤져 봐도 없을 거예요.”

준비한 음악은 교수의 창작곡이었다. 베껴 오는 것을 미리 방지한 것이다.

“가장 완벽하게 해 온 학생에겐 선물도 있어요. 지난번 공연 때 협찬으로 받은 슈어 헤드폰과 10만 원 공연 상품권이에요.”

교수는 양손에 헤드폰과 상품권을 들고 흔들었다. 뾰로통했던 학생들의 얼굴이 펴졌다.

“와!”

모두 선물이 탐나는 눈치였다.

다혜도 마찬가지였다. 악보를 잘 만들어서 선물을 받고 싶었다. 특히 신상인 슈어 헤드폰이 끌렸다.

‘가능성이 있어.’

다혜는 주위의 친구들을 보면서 의지를 다졌다.

음 기억력은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상대음감은 악기를 눌러 봐야 멜로디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혜는 절대음감은 아니지만 자신이 있었다. 입시를 준비하면서 음 기억력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혜의 음 기억력은 좋은 편이었다.

“자, 집중하고 들으세요.”

교수가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성적과 상품이 걸린 만큼 학생들은 귀를 세워 집중했다.

* * *

문밖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수철도 문틈으로 들리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자, 두 번째예요.”

음악이 한번 끝나자 교수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학생들은 더 집중하며 귀를 세웠다.

수철은 교수가 두 번째 버튼을 누를 때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수철은 길거리 벤치에 앉았다.

리셉션 데스크에서 얻어 온 A4 용지를 꺼내 볼펜으로 쭉쭉 그어서 오선지를 만들었다.

* * *

“내일까지 모두 제출하세요.”

수업이 끝나고 교수가 나가자 학생들은 오선지 노트를 꺼내 자신들이 기억하는 만큼 멜로디를 적기 시작했다.

누가 볼까 경계하며 손으로 가리고 적었다.

다혜도 기억한 멜로디를 까먹지 않으려고 서둘러 악보를 적기 시작했다. 볼펜을 입에 물며 지나간 멜로디들을 떠올렸다.

‘헉.’

악보를 다 그린 다혜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가방을 챙겨서 허겁지겁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계단을 내려가 학교 밖으로 나갔다.

두리번거리며 수철을 찾았다.

학교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수철이 다혜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다혜가 다가갔다.

“언제 왔어?”

“좀 전에. 오선지 줘 봐.”

“오선지는 왜?”

다혜는 보자마자 오선지를 달라는 수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줘 봐.”

영문을 모르겠지만, 가방을 열어 오선지 노트를 건넸다.

수철은 A4 용지를 한번 훑어보고는 다혜가 준 오선지에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수철이 그리는 건 전체 악기가 들어간 총보였다.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먼저 드럼을, 그리고 다음엔 베이스, 그리고 피아노 화성을 넣고 마지막으로 보컬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음표를 그려 넣었다.

다혜는 앞에서 황당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보컬은 가이드로 녹음한 건지 음이 몇 개 플랫(♭) 되었어. 그러니까 이 멜로디가 맞을 거야.”

악보를 다 그러고는 다혜에게 건넸다.

다혜는 수철이 장난치는 줄 알았다.

마치 자신도 음악학교 학생이 된 듯, 악보 그리는 실력을 보여 주려고 귀여운 장난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악보를 받아서 보컬 파트의 멜로디를 보는 순간, 다혜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너, 대체 어떻게……!”

다혜는 수철이 음악을 듣고 악보를 그렸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디서 악보를 보고 베꼈다고 생각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걸 깨닫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수철이 악보를 베꼈을 수가 없는데…….’

다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수철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굳어 버렸다.

지금 상황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분명 교수님의 창작곡이었고,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다고 했고, 악보도 교수님 머릿속에만 있다고 했는데? 혹시 수철이 음악을 엿들었나? 에이, 그래도 이건 아니지.’

다혜는 머리를 흔들었다. 설령 음악을 들었다고 해도 한번 듣고 이렇게 총보를 그릴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최면을 걸어 교수의 머릿속에서 악보를 빼내는 게 확률이 더 높다.

‘그렇다면 대체 수철이 무슨 짓을.’

머릿속에서 도둑질이라는 단어가 맴돌았지만 지금 상황과 연결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수철이 엄청난 음악 재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전체 악보를 그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마술이라도 부리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철은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다혜를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상품 받으면 반띵이야. 상품권은 너 갖고 헤드폰을 주든지, 아니면 너 다 갖고 난 현금으로 줘도 돼. 10만 원만 받을게.”

씨익 웃었다.

“상품권? 너, 강의실에 왔었어?”

다혜의 놀란 눈이 커졌다.

“지나가다 잠깐 구경했어.”“그럼 이 악보는……?”

수철과 눈을 마주친 채 마른침을 삼켰다.

“악보? 선생이 틀어 준 음악 듣고 그린 거지.”

컥!

숨이 막혔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수철을 보는 다혜의 얼굴이 심하게 굳었다.

“뭘 그렇게 놀라?”

수철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다혜는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흔들고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갑자기 수철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나 간다? 반띵하는 거 잊지 마.”

벤치에서 일어나더니 지하철로 발걸음을 돌려 걸어갔다.

멍하니 뒷모습을 보던 다혜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야! 너 학교 구경하고 싶다며!”“벌써 다 구경했어! 별거 없던데?”“그럼 밥이라도 먹고 가!”“가서 가게 문 열어야 해!”

수철은 등 뒤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쟤는 참…….”

다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수철이 앉았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풀려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사라진 수철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혜는 한동안 벤치에 앉아 있다가 수철이 준 악보를 가방에 집어넣고 일어났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

걸어가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멈춰 섰다.

발걸음을 돌렸다.

학교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타닥. 타닥.

문제를 냈던 전공 교수를 찾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 *

“헉! 이게 뭐야?”

젊은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악보와 다혜를 번갈아 봤다. 입이 벌어졌다.

“다혜야, 네가 흙 속의 진주였구나!”

감격스러운 얼굴로 다혜를 바라봤다. 금방 껴안기라도 할 자세였다.

다혜가 바로 찬물을 끼얹었다.

“제가 한 거 아니에요.”“……? 그럼 누가 한 거야?”

잔뜩 흥분했던 교수의 얼굴이 풀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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