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13화 (13/239)

#13화. 경이로운 알바생

“수철이라고, 저기……. 암튼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까 선생님이 들려주신 음악, 그 악보가 맞아요?”“응, 정확해. 이건 내 악보보다 더 정확해. 여기 음 떨어진 것까지 표시해 놨네.”

손가락으로 수철이 플랫(♭)을 표시해 놓은 부분을 가리켰다.

“그런데 잠깐.”

악보를 보던 교수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이거 뭐야, 총보야?”

“네.”

“무슨 소리야, 총보를 어떻게 그려?”

교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다혜를 보는 교수의 미간이 좁혀졌다.

“모르겠어요, 걔는 그렸어요.”“어떻게 4성을 다……. 드럼까지.”

다시 악보를 들여다보던 교수가 고개를 들었다.

“자료가 유출됐나? 그럴 리가 없는데. 누가 내 컴을 뒤진 거야?”

“그럴 리가요.”

“그렇지. 내 컴은 집에 있는데.”

다혜는 당황하는 교수를 멀뚱히 쳐다봤다.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제가 궁금한 건 악기 파트예요. 악보가 맞나요?”“음, 피아노 화성은 맞고, 베이스와 드럼은 확인해 봐야겠지만 얼추 맞는 거 같아.”“아, 역시. 그렇군요.”

예상했지만 음악을 만든 교수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다시 놀라움이 밀려왔다.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지?”“수철이요, 용수철.”“용수철? 작곡과는 아닌 거 같은데, 클래식 쪽인가?”

“학생 아니에요.”

“아니야? 그럼 교수?”

“……?”

교수가 놀란 나머지 말이 헛나왔다.

“아니지, 너랑 친구면 교수일 리가 없지. 그럼 프로 뮤지션인가?”“아뇨, 카페에서 알바해요.”

“카페에서 알바?”

교수는 도통 다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 사람, 지금 어딨어?”

“갔어요.”

“어디?”

“알바하러요.”

“전화해서 만날 수 있는지 물어봐.”“전화번호 몰라요.”

“음…….”

“교수님, 사실 오늘…….”

당황하는 교수에게 다혜는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교수는 그제야 궁금증이 풀렸다.

“그러니까 학교에 놀러 온 거라고?”

“네.”

“강의를 엿들은 거고?”

“네.”

다혜의 얘기에 교수는 수철이 천재라는 걸 직감했다.

“음…….”

교수는 들고 있던 악보를 다시 들여다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혜는 궁금한 부분을 확인했으니 교수실에서 빠져나가려고 슬그머니 발을 돌렸다.

“교수님, 전 가 볼게요.”

“어, 그래.”

교수는 악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디 틀린 멜로디가 있지 않을까? 샅샅이 훑어보는 것 같았다.

‘아, 참.’

교수실을 빠져나오던 다혜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교수님! 그 악보 다 맞는 거라고 하셨죠?”

“으응, 그래.”

“그럼 주기로 하신 그 슈어 헤드폰이랑 상품권 주세요, 그거 그린 녀석이 받아 오라고 했거든요.”“그, 그래, 줘야지. 그럼, 줘야 하고말고.”

교수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중얼거리며 서랍을 열어 헤드폰과 상품권을 꺼냈다.

“자, 여기.”

“고맙습니다.”

“다혜야, 이 사람 내가 꼭 만나고 싶다고 전해 줘.”

“네, 교수님.”

* * *

다혜가 나가고 나서 교수는 창밖을 내다봤다. 음악을 만들고 녹음할 때가 생각났다.

학생들에게 들려준 음악은 테스트용으로 만든 음악이 아니다. 데모를 만들어서 모니터링을 해 보고, 반응이 좋으면 자신이 피아노를 담당하는 트리오 앨범에 넣을 생각이었다.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드럼. 그렇게 3명의 트리오와 1명의 객원 보컬.

교수는 거기에 넣을 음악 중에 한 곡을 뽑아서 학생들에게 들려준 것이다.

물론 데모로 만든 음악이라 가이드로 부른 보이스(Voice)의 피치(Pitch)가 좀 틀어져도 손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튜닝을 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다.

원래 선생들은 음이 조금 틀어져도 음악에 어울리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크게 거슬리지 않은 이상 수정을 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소리를 좋아하기에 튜닝 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자칫하면 기계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클래식은 절대적으로 정확한 음을 내지만 재즈는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그런 부분에서 재즈는 좀 더 자유롭다.

그런데 수철은 그걸 정확히 짚은 것이다. 친절하게 악보에 하나하나 체크를 다 해 놓았다.

‘아무래도 귀에 거슬렸겠지.’

교수는 오랜만에 대단한 천재를 만날 생각에 흥분이 올라왔다.

음(音) 기억력 운운하며 학생들에게 문제를 냈지만 사실 교수도 절대음감이 아니다. 어릴 땐 그게 큰 약점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아니, 절대음감은 중요한데, 음악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성공한 음악가 중에는 절대음감보다 상대음감의 소유자가 훨씬 많다. 그래서 음악은 결핍을 채우는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랜만에 보는 놀라운 재능에 흥분이 올라왔다. 절대음감은 당연하고, 엄청난 음 기억력에 4성을 한 번에 다 듣다니. 입이 안 벌어질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귀신 곡할 노릇인가.’

악보를 처음 봤을 때 보이스 멜로디 라인만 보고 교수는 다혜의 재능에 감탄했다. 하지만 총보를 확인하는 순간 다혜가 한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다혜에게 그런 재능이 있었다면 진작 알아봤을 것이다.

‘학생은 아닌 거 같고, 교수가 짓궂은 장난을 친 건가?’

의심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교수 중에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자신이 아는 한 이 학교에 이 정도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그래서 얼굴빛이 바뀌고 소름이 올라왔다.

‘어떻게 한 번 듣고 전체 악기를? 대체 누가?’

머릿속에는 온통 그 의문뿐이었다.

다혜가 말한 용수철이라는 인물은 분명 지금까지 만나 보지 못한 천재일 것이 분명했다.

‘대체 어떤 인물일까?’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교수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컴퓨터를 켰다. 악기 트랙을 열어 악보를 확인했다. 수철이 그린 악보를 꺼내 비교했다.

똑같았다.

그대로 출력한 것 같았다. 아니, 수철이 그려준 악보가 더 정확했다. 실수로 잘못 찍은 드럼의 심벌까지 체크되어 있었다.

유학하면서 천재 소릴 듣는 사람을 많이 봤지만,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한번 듣고 총보를 그리다니. 더군다나 교실 밖에서.

‘누군지 당장 만나 봐야겠어.’

학생 연락망을 뒤져 다혜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 * *

교수가 당황하는 그 시각, 경쾌한 발걸음으로 도어스의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테이블을 닦고 있는 수철에게 손을 들었다.

“어이, 용수철 알바생! 열심히 일하고 있어?”

동민이었다. 동민이가 뺀질거리며 도어스에 나타났다.

“뭐야? 너, 또 올라온 거야?”“너 보러 또 올라왔지.”“대단하다, 제주와 서울을 동네 다니듯이 다니네.”“뭐, 별로 어려운 거 아니야. 돈만 있으면 돼.”

동민이가 돈 좀 생긴 모양이다.

“그럴 거면 왜 내려간 거야?”“왜 내려가긴, 성적 때문에 내려갔지.”

솔직한 녀석이다.

“진짜 그냥 올라온 거야?”“그건 아니고, 할머니 팔순이셔서 모여서 식사한다고 아빠가 불렀어. 그런데 형은 어딨어?”“일이 있다고 일찍 들어갔어.”“널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냐?”“그런 거 없어. 난 편해.”

동민이가 기지개를 켜면서 가게를 휙 한번 둘러봤다.

“오케이, 나도 맥주 한 병 줘. 오늘 밤새 음악 듣고, 여기서 자고 갈 거야.”

“그래.”

동민이는 수철이 가져다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캬, 맥주 맛 죽인다. 나, 음악 신청해도 돼?”“당연하지. 무슨 곡 듣고 싶어?”“스모크 온 더 워터.”“또? 지겹지 않아?”

“안 지겨워. 그때가 재밌었는데…….”

동민이는 옛날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자, 건배!”

“건배!”

수철과 동민이는 가게가 끝나고 나서 본격적으로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수철이 기타 치고, 동민이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수철은 올 때마다 자신을 제일 먼저 찾아오는 동민이가 고마웠다.

새벽 시간이 되자, 고개를 숙인 채 음악을 듣던 동민이가 취한 눈으로 물었다.

“너, 근데 언제까지 여기서 알바할 거야?”

“글쎄…….”

“알바만 하면서 시간 보낼 거야?”“알바가 어때서? 난 여기가 좋아, 돈도 벌고 매일 음악도 들을 수 있잖아. 나한테 딱 맞아. 그런데 왜 갑자기 물어보는 거야?”

수철의 물음에 동민이가 풀린 눈으로 대답했다.

“네 재능이 아까워서 그래, 너 정도면 기획사에 들어가서 작곡만 해도 돈 많이 벌고 유명해질 텐데…….”

“음악 하라고?”

“응.”

“하고 있어.”

“하고 있어? 진짜?”

동민이의 눈에 다시 초점이 잡혔다.

“응.”

“어떻게 하고 있어?”

“곡 만들고 있어.”

“역시! 네가 가만히 있을 녀석이 아니지, 용수철이 누군데!”

동민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몇 곡이나 만들었어?”

“10곡 정도.”

“많이도 만들었네, 언제 그렇게 만들었어?”“틈틈이 가게 끝나고 만들었어.”“그래서 어떡하려고? 앨범이라도 발표하려고?”

“생각 중이야.”

수철은 만든 곡을 컨셉에 맞게 분류해서 편곡을 먼저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돈이 모이면 작곡 프로그램을 구매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대단하다. 만든 거 좀 보여 줘 봐.”“봐도 모를 텐데? 너, 악보 못 보잖아.”“네가 들려주면 되지.”“나중에 편곡까지 다 하면 녹음해서 들려줄게”“한 곡만 들려줘 봐. 궁금해서 그래.”

“알았어.”

수철은 마지못해 신디사이저를 켜고 앉았다. 건반 소리에 맞춰 만든 곡을 허밍으로 나지막이 불렀다. 동민은 소파에 기대 눈을 감고 감상했다.

따라라. 땅.

음악이 끝났다. 그런데 동민이는 반응이 없다. 엉뚱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릉.

피곤한지 소파에 기대 잠들었다. 수철은 피식 웃고는 동민이를 눕혀서 모포를 덮어 줬다.

* * *

“네, 교수님. 제가 내일 만나러 가 볼게요.”

다음 날 저녁,

교수에게 연락을 받은 다혜는 수철을 만나러 도어스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며칠 전 수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한테 백만 원만 줘. 내가 가르쳐 줄게.

음악을 가르쳐 주겠다는 수철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진짜 그럴까? 수철이한테 배울까?’

다혜는 픽 웃으며 도어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 안엔 사람이 많았다. 수철은 몰려든 사람 때문에 바빴다. 다혜가 바에 앉자 다가와 급하게 물었다.

“어서 와, 맥주 줄까?”“아니, 오늘은 술 마시러 온 거 아냐.”

“그럼?”

“너한테 전할 말이 있어서.”

“무슨 말?”

“널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누구?”

“바쁜 거 같으니까 이따가 얘기할게.”“알았어, 술 안 마실 거면 나 좀 도와줘.”

“그래.”

다혜는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며 바쁜 수철을 도왔다.

가게가 조용해지자, 다혜가 다시 말을 꺼냈다.

“너, 학교에 한 번 더 올 수 있어?”

“왜?”

“교수님이 악보 보시더니 너 만나 보고 싶데.”

“싫어.”

“왜?”

“나 선생님이랑 안 친해.”“비싸게 굴긴. 그냥 교수님이 궁금해서 한번 만나 보자는 거야. 네가 악보를 그렸으니까.”“만나자고 하면 내가 만나야 해?”

수철이 시크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 건 아니지만, 못 만날 것도 없잖아.”“만나고 싶지 않아.”

수철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헤드폰, 아님 10만 원.”“아 그거……. 근데 헤드폰은 아직 못 받았고, 공연 상품권만 받았어.”

다혜는 가방을 뒤적여 상품권을 꺼냈다.

슈어(Shure) 헤드폰이 탐이 난 다혜는 이미 헤드폰을 챙겨서 자신의 컴퓨터에 연결했다. 신디사이저를 칠 때도 헤드폰을 썼다.

맘에 들었다.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예전 헤드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능이 좋았다.

‘악보는 수철이 그린 거지만, 내가 소개한 거니까 소개비는 받아야지. 원래 중간 상인이 더 많이 챙긴다잖아.’

헤드폰을 챙기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런데 수철에게 딱 걸렸다.

“헤드폰 못 받은 거 맞아?”

수철이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어……. 그럼.”

“그런데 왜 더듬어?”“내가 원래 가끔 더듬어…….”

신내림을 받았는지 날카롭게 자신을 보는 수철 때문에 우물쭈물했다.

“헤드폰 필요하면 내가 쓰던 거 줄까? 오래됐어도 꽤 괜찮거든.”“아냐, 난 그 신상 슈어 헤드폰을 가질 거야.”

수철의 의지는 확고했다.

다혜는 얼른 헤드폰을 사서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이잉.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교수에게서 문자가 왔다.

―만났니?

―네.

―언제 올 수 있대? 내가 시간 조절해야 하니까 알려 줘.

―안 오겠대요.

―왜?

―그냥 싫대요. 자기는 선생님이랑 안 친하대요.

―음…….

잠시 끊어진 문자가 다시 왔다.

―거기가 어디야?

―오시려고요?

―응, 지금 갈게.

―신촌역에 내려서…….

다혜가 문자를 보낸 지 한 시간쯤 됐을까, 깔끔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사내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교수였다.

다혜를 보더니 손을 들었다. 다혜가 머리를 꾸벅했다.

교수가 다가와 옆에 앉자 다혜가 손가락으로 수철을 가리켰다.

악보를 만든 주인공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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