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천재에 대한 다양한 해석
“음악 한 곡 듣고 총보를 부탁할게요.”
“네.”
“원래는 수철 씨의 재능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부담 없이 하세요.”
“네.”
“들려 드릴 곡은 아직 악보가 없는 곡이라서 수철 씨가 만들면 학생들 앙상블 수업에 사용할 거예요. 악보 만들어 주는 알바한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예요.”“네, 어디서 하면 되나요?”
교수가 등을 돌려 컨트롤 룸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부스 안에 들어가서 헤드폰을 쓰시면 음악을 들려드릴게요. 다 듣고 나서 테이블에 있는 오선지에 악보를 그려 주시면 돼요. 음악은 7분짜리 재즈곡이에요.”
“네.”
“그럼 시작할까요?”
“네.”
수철이 부스 안에 들어가서 헤드폰을 쓰자 컨트롤 룸에서 엔지니어가 음악을 틀었다.
음악이 시작되자 수철은 입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음악이 계속될수록 수철의 입은 더 빨라졌다.
교수는 이 모습을 어두운 컨트롤 룸에서 지켜 보고 있었다.
수철은 곡의 형식이 바뀔 때마다 마디를 체크했고, 메인 악기가 바뀔 때마다 마디 수를 체크해서 적었다.
“저 학생이야?”
동료로 보이는 교수 두 명이 컨트롤 룸에 들어왔다.
“네, 학생은 아니지만, 저 사람이 악보를 그린 사람 맞아요.”
“음…….”
소문을 듣고 찾아온 동료 교수들은 팔짱을 낀 채 젊은 교수 옆에서 수철을 지켜봤다.
“한 번 더 들을게요.”“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틀어 주세요.”
수철은 총 3번 음악을 들었다. 지난번 교수가 시험으로 낸 곡보다 난해하고 악기 편성도 많으니 당연했다.
“부스의 화면 좀 켜 주세요.”
교수가 얘기하자 엔지니어가 부스 안에 있는 카메라를 켰다. 그러자 컨트롤 룸에서 악보를 그리고 있는 수철의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수철은 입으로 음악을 읊조리며 악보를 적었다.
드럼의 섹션을 먼저 잡고 핵심 박자의 패턴을 잡더니 변화하는 리듬을 그려 나갔다.
베이스 드럼, 스네어 드럼, 하이햇, 탐들, 심벌들까지 전체 드럼이 다 채워지자 다시 처음부터 음을 읊조리면서 콘트라베이스의 악보를 그려 넣었다. 그다음엔 피아노를 집어넣었고, 마지막으로 트럼펫까지 그려 넣었다.
교수들은 아무 말 없이 지켜 보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얼굴빛은 변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뜨거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수철이 악보를 그리는 내내 이들은 아무 말 없이 굳어 있었다.
―다 그렸는데 나가도 되나요?
악보를 다 그린 수철이 부스 안에서 손을 들었다.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엔지니어가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네, 나오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수철은 두꺼운 부스의 방음문을 열고 나와서 컨트롤 룸에 고개를 내밀었다.
교수에게 악보를 건네면서 물었다.
“저기 안에 있는 피아노, 쳐 봐도 되나요?”
“네, 쳐 보세요.”
“감사합니다.”
수철은 신난 얼굴로 다시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녹음용 작은 그랜드피아노의 뚜껑을 열었다.
컨트롤 룸에서 수철이 건넨 악보를 들고 서 있는 교수는 굳이 악보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모니터로 다 봤기 때문이다.
처음엔 다혜가 가져온 악보를 보고 놀랐고, 두 번째는 수철이 일하는 가게에서 엄청난 재능을 확인하고 또 한 번 놀랐다. 그래서 이제는 진정이 될 만도 한데 젊은 교수의 심장은 또다시 뛰었다.
‘이제 어쩐다.’
저 어린 천재를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이 많아졌다.
“줘 봐.”
젊은 교수가 멍하니 악보를 들고 서 있을 때 다른 교수가 악보를 낚아챘다.
그리고 수철이 그려 온 악보를 넘기며 확인했다.
‘흠.’
악보를 넘길수록 그의 얼굴은 다시 굳어졌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받아들이기 어려운지 고개만 흔들었다.
그 느낌을 아는 젊은 교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도 꽤 많은 천재를 만나 봤지만 저런 경우는 처음 봐요. 7분짜리 곡을 고작 3번 듣고 총보를 그리다니요, 그것도 재즈곡을 말입니다.”
재즈곡은 다른 장르와는 다르다. 각각의 악기가 즉흥연주를 하고 그 연주의 방식이 매번 변화한다. 많은 양의 멜로디와 계속 변화하는 리듬 탓에 연주자도 자신의 연주를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젊은 교수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제가 경험한 저 친구의 재능은 뭐라고 표현할 단어가 없어요. 경이롭다는 말로도 부족해요.”
젊은 교수는 아직도 그때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교수들을 쳐다봤다.
그때 다른 교수가 악보를 내밀었다.
“악보 그린 거 봐 봐, 이거 보면 악보를 많이 그려 본 실력이 아니야.”
전문가들은 음표를 그리는 모양만 봐도 얼마나 악보를 그려 봤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악보 그린 것만 봐도 음악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수철은 악보를 많이 그려 본 사람이 아니었다.
“악보를 많이 그려 보지 않았다는 건, 연습해서 음(音) 기억력이 탁월해진 게 아니란 말이지. 저 친구는 처음부터 타고난 천재라는 거야.”
그 말에 젊은 교수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해서 저 정도가 될 수 있다면 그럼 우린 뭐야?”
다른 교수의 툭 튀어나온 말에 이들은 서로 쳐다보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지금까지 음악 공부한 게 자괴감이 든다. 유학 가서 쓴 돈만 해도 얼마야?”
한 교수가 푸념할 때 부스 안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젊은 교수가 고개를 돌렸다.
“소리 좀 키워 봐요.”
교수의 말에 엔지니어가 다급히 볼륨을 높였다.
모두 말을 멈추고 그 소리에 집중했다.
조금 전 수철이 악보를 만들었던 그 곡이었다.
젊은 교수가 엔지니어에게 물었다.
“영상, 녹화되나요?”
“네, 녹화할까요?”
“네, 해 주세요.”
엔지니어가 녹화 버튼을 눌렀다.
교수들은 다시 숨을 죽였다.
수철은 처음 들었던 곡을 그대로 연주하더니 곧바로 원래 멜로디인 헤드(Head)를 변주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템포와 리듬을 바꿨다.
그런데도 원 멜로디가 살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흡사 모차르트의 변주곡을 듣는 것 같았다. 수철의 소리가 더 현란했다.
어두운 컨트롤 룸에서 침 삼키는 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만 들렸다.
수철의 연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변주시킨 원 멜로디가 반복될 때마다 화성이 더 풍부해졌다.
리듬도 더 강렬해졌다.
뚝.
어느 교수의 벌어진 입에서 침이 떨어졌다.
눈앞에서 엄청난 천재의 재능을 보는 것은, 흡사 인간으로서 신의 영역을 보는 것 같았다.
교수들은 아무 미동도 없이 입만 벌리고 있었다.
원곡에 대한 변주는 30분이나 이어졌다. 그런데 5분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수철의 연주는 듣는 사람을 빨아들였다.
‘피아노까지 저렇게 치다니, 더 놀랄 게 뭐가 있을까?’
젊은 교수는 들고 있던 악보를 내려놓았다.
‘내가 감히 천재를 평가하려 했다니.’
불멸의 반열에 들어선 음악의 신동(神童) 모차르트, 혹은 악성(樂聖) 베토벤이 연주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수철을 평가하려 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수철은 자신이 아는 영역 밖의 사람이었다.
뒤에 서 있는 교수들도 귀신이라도 본 듯 얼굴이 창백했다.
음악이 끝났는데도 아무도 박수 칠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어쩌면 박수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경이로운 존재에게 할 액션이 아니었다.
“와,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그냥 음악의 신 같아요.”
침묵을 깬 건 엉뚱하게 엔지니어였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감탄이었다.
젊은 교수가 대꾸했다.
“맞아요, 레벨이 달라요.”
그제야 침묵을 깨고 다른 교수들도 한마디씩 했다.
“지금까지 만나 본 천재와 달라, 그 천재들이 사실 범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네.”
“저도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를 마친 수철은 부스를 나와 컨트롤 룸에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저 이제 가도 되나요?”
시계를 보여 주며 갈 시간이 됐음을 알렸다.
“피아노 한 곡 더 부탁하면 무리일까요? 관객으로서 한번 감상해 보고 싶네요. 필요하면 알바비도 더 드릴게요.”“죄송해요, 진짜 지금 가야 해서요.”“아쉽군요, 그럼 다음에 꼭 부탁할게요.”
“네.”
교수는 아쉽지만, 수철에게 다음을 약속받은 거로 만족했다.
“안녕히 계세요.”
“잠시만요, 저랑 같이 나가죠. 배웅해 드릴게요.”
스튜디오를 벗어나는 수철의 뒤를 교수가 따라붙었다.
―휴우.
수철이 사라지자 남은 교수들은 그제야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수철의 연주를 듣는 내내 긴장 상태였다.
의자를 당겨 앉으며 달아오른 볼을 어루만졌다.
젊은 교수는 수철을 배웅하며 물었다.
“수철 씨, 혹시 피아노 제대로 배워 보고 싶은 생각 없어요? 제가 우리나라 최고의 교수를 소개해 줄 수 있어요.”“아니요, 전 악기를 할 생각은 없거든요.”“악기가 아니면…….”
교수는 궁금한 얼굴로 쳐다봤다.
“음악 만드는 게 재밌어요.”
“아.”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의 재능이면 연주보다 작곡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곡한 음악 한번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나중에요.”
교수는 더 묻지 않았다. 자신이 물어볼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려주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그리고 이건…….”
교수는 주기로 한 알바비를 봉투에 담아서 내밀었다.
수철은 봉투를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네, 조심히 가세요. 다음에 또 만나요. 꼭.”
수철은 시간 되면 놀러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수철을 보내는 교수의 머리는 다시 복잡해졌다. 하지만 수철은 알바비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즐거운 얼굴로 학교를 벗어났다.
* * *
교수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오니 때아닌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교수가 들어서자 개중 나이 많은 교수가 쳐다봤다.
“갔어?”
“네.”
“그냥 저렇게 보내도 돼?”
“안 보내면요?”
나이 든 교수의 물음에 젊은 교수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우리가 보호하고 있어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드는데. 우리 학교에 입학이라도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특별 전형으로 말이야.”“안 그래도 내일 학과장님과 얘기해 볼 생각이에요. 학과장님이 이쪽으로 경험이 많으시니까요.”
젊은 교수는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 * *
다음 날 수철에 대한 소문이 학교에 쫙 퍼졌다.
교수들 사이에서 퍼지는 건 당연하지만, 학생들까지 웅성거렸다.
엔지니어가 떠벌린 탓이었다.
“나 완전 숨 넘어가는 줄 알았다니까? 그냥 미쳤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와, 그 정도예요?”
“그냥 음악의 신이야, 신.”
이런 소문은 특강을 하러 온 박 대표의 귀에도 들어갔다. 박 대표는 곧장 젊은 교수를 찾아갔다.
“얘기 들었어, 괴물이 나타났다며?”
박 대표는 젊은 교수를 잘 알고 있었다. 교수가 되기 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전 아직도 얼얼합니다.”
젊은 교수는 상기된 얼굴로 대꾸했다.
“영상이 있다고 들었는데 볼 수 있을까?”“스튜디오로 가시죠.”
컨트롤 룸에 들어간 교수가 부탁하자 엔지니어가 모니터에 수철의 영상을 띄웠다.
“음…….”
박 대표는 특별한 반응 없이 영상을 지켜봤다. 유심히 수철을 보는 눈빛만 반짝였다.
반응은 박 대표를 따라 들어간 후배 교수가 먼저 보였다.
“와, 엄청나네요. 그냥 모차르트네요. 저 정도면 줄리아드에서 바로 모셔가겠어요.”
박 대표가 그 말에 씨익 웃었다.
“저 정도면 모차르트도 놀라겠는데? 앞으로 음악 판이 시끌벅적하겠어.”
후배 교수가 테이블 위에 놓인 악보를 집어 들었다.
“이게 그 악보인가요?”
“네.”
악보를 넘기며 훑어보다 고개를 들어 박 대표를 쳐다봤다.
“믿기지 않네요. 저도 천재 소릴 듣는 사람을 많이 봤지만, 이건 사람의 재능 같지가 않습니다. 이게 가능합니까?”
악보를 들고 흔들었다.
박 대표는 또 씨익 웃었다.
“가능하지, 천재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본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듣고 그린 게 아니라 보고 그린 악보가 되는 거지. 연주도 듣고 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움직이는 선율을 보고 치는 거고.”
박 대표의 설명에도 후배 교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박 대표가 젊은 교수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근데, 어떻게 만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