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세 번째 만남
“저희 과 1학년 중에 윤다혜라고 있습니다.”“다혜의 친구였군.”
“아세요?”
“응, 잘 알아. 나랑도 친해.”
스튜디오에서 나온 박 대표는 바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다혜야.”
―네, 쌤.
다혜는 박 대표를 쌤이라고 불렀다. 입학하기 전에는 레슨을 받았고, 입학해서는 특강을 들었다.
“오늘 시간이 어때? 볼 수 있을까?”―밥 사 주시면요.
“오케이, 내 작업실에서 봐.”―넵! 이따 봬요.
* * *
한 시간쯤 후, 다혜가 박 대표의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던 박 대표가 다혜를 반갑게 맞이했다.
“쌤! 잘 지내셨어요?”“난 잘 지냈어. 너는?”“저도 잘 지냈어요. 여긴 오랜만에 왔는데 변한 게 없네요.”“작업실도 주인 따라가는 거지.”“그렇죠, 쌤이 쉽게 변하는 스타일은 아니죠.”
다혜는 작업실을 둘러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피자 시킬까?”“피자요! 작업실에선 피자에 콜라가 제맛이잖아요.”“그렇지. 다혜, 너는 역시 맛을 알아.”
“헤헤.”
박 대표는 피자를 주문하고 다혜에게 수철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네?”
“네.”
“그래서 수철이라는 친구의 재능도 몰랐고.”“네, 음악 좋아한다는 것만 알았죠. 음악을 엄청 많이 알더라고요. 재능이 있다는 것은 이번에 알았어요.”
다혜의 얘기를 유심히 듣던 박 대표가 다혜를 컴퓨터 앞으로 끌었다.
“이쪽 모니터 앞으로 와 봐. 내가 영상 하나 보여 줄게.”
“무슨 영상이요?”
“몇 년 전 떠들썩했던 영상인데, 함 봐 봐. 아무래도 같은 인물 같아서 말이지.”
박 대표는 다혜에게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낙원상가 영상을 보여 줬다.
수철이 신들린 듯이 피아노를 치고 사라졌던 바로 그 영상이다.
“낙원상가에서 알바하는 학생이 동호회에 올린 영상이거든.”
다혜는 모니터를 유심히 봤다.
“아, 저도 이 영상 알아요.”
“알아?”
“네, 예전에 친구가 보여 줘서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저 사람이 수철이라고는 생각 안 해 봤네요.”
“같은 사람 맞아?”
“네, 수철이 맞아요. 머리만 짧지, 지금이랑 모습이 같아요.”
“역시 그렇군.”
“피아노까지 잘 치는 줄은 몰랐네요.”
다혜는 현란하게 피아노를 치는 수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피자 왔습니다.
잠시 후, 피자를 먹고 다혜가 테이블을 치우자 박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만나러 가 볼까?”
“누굴요?”
“누구긴? 천재를 만나러 가는 거지.”
“지금요?”
“왜, 안 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저는 어제도 거기서 알바했거든요.”
“알바?”
“네, 교수님이 수철이를 학교로 불러서 제가 대신 알바했어요.”“하하! 다혜, 네가 바쁜 사람이구나? 어쨌든 같이 가 보자, 내가 쏠게.”
* * *
얼마 후, 박 대표와 다혜가 도어스에 들어섰다.
수철은 주문을 받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다혜를 봤다.
“어? 다혜야, 잘 왔어.”
‘뭐지?’
평소보다 더 반기는 게 수상했다.
의아하게 보는 다혜에게 수철이 주방을 가리켰다.
“주방에 들어가서 오징어 두 마리만 구워 줘. 땅콩은 그 옆 박스에 있어!”
그러면 그렇지, 괜히 반갑게 맞이할 녀석이 아니지.
“야! 나 알바 아니야. 네 일을 왜 나한테 시켜? 어제 하루 도와줬다고 이제 대놓고 알바 취급하네? 나 손님이야, 단골이라고!”
다혜는 어이없어했다.
“저기요!”
“네, 잠시만요! 금방 갈게요.”
여기저기서 손님들이 수철을 불렀다.
“친구야, 도와줘. 나중에 알바비 좀 떼어 줄게.”
수철은 대답도 듣지 않고 손님이 있는 테이블로 가 버렸다.
다혜는 황당해하며 뒤에 서 있는 박 대표를 돌아봤다.
박 대표는 재미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천재고 뭐고 간에 오늘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어.”
다혜는 오징어를 구우면서 다짐했다.
* * *
“잘 마셨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네, 안녕히 가세요.”
시간이 가고 손님들이 하나둘씩 사라지자 그제야 수철이 돌아왔다.
“고마워, 다혜야.”
다혜는 바에 앉아서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수철이 나타나자 더 힘을 주어 질겅질겅 씹었다.
“고마우면 맥주라도 한 병 사 주고 고맙다고 해.”
다혜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째려봤다.
“알았어, 내가 한 병 살게.”
“오, 웬일?”
“어제도 도와줬으니까.”“그럼 오늘도 도와줬으니까 두 병?”
“마시기 싫어?”
“알았어, 한 병.”
박 대표는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다가 수철의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보면 볼수록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지?’
분명 본 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낙원상가 영상 때문인가?’
박 대표가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수철이 그런 박 대표를 보며 생글거렸다. 박 대표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눈이 마주치자 박 대표가 물었다.
“혹시 우리 만난 적 있나요?”
수철이 묘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네.”
“어디서 봤죠?”
“며칠 전 학교 2층 홀에서요.”“아, 맞다! 그때 그 사람이었군요! 그랜드피아노를 치던.”
박 대표는 복도를 지나가다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홀에 들어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연주를 감상하던 중에 갑자기 사라진 피아니스트가 바로 수철이었다.
“아, 그렇군요. 난 학교에 새로 온 선생인 줄 알았는데. 하하.”
수철은 웃는 박 대표를 재밌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그리고 또 있어요.”
“또요?”
박 대표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정류장에서 머리 쿵.”“정류장에서 머리 쿵?”
수철은 졸업식 때 엄마에게 다녀오다 마주친 박 대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순간 박 대표도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헉, 그때 그 스캣!”
갑자기 소리치며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다혜가 놀라서 움찔할 정도였다.
“그때 그 인물이 바로 수철 씨였군요! 와, 이게 무슨 인연인가요?”
박 대표는 믿을 수 없다며 손을 내밀었다.
“일단 우리 악수 먼저 한번 합시다. 반가워요.”
“네.”
수철도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하하, 우린 인연이 참 많았네요. 그 사람이 수철 씨였다니, 얼떨떨하네요.”
박 대표는 수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워요. 수철 씨.”
연거푸 반갑다는 말을 내뱉었다.
“편하게 말 놓으세요. 저는 다혜와 친구거든요.”
웬일인지 수철도 박 대표를 편하게 대했다. 사실 두 번 다 즐거운 만남은 아니었지만, 다혜와 친한 거 같아서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래도 될까요?”
“네.”
“알겠어요. 그럼 지금부턴 수철 씨 말고 수철이라고 부를게요.”“네, 전 뭐라고 부를까요?”“음. 수철이는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쌤!”
그때 다혜가 옆에서 소리치며 얼굴을 내밀었다.
“그건 아니죠! 나이 차이가 얼만데 형이라니요? 그럼 저도 오빠라고 불러요?”
“넌 좀 그렇지.”
박 대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암튼 뮤지션에게 나이가 어딨어? 다 친구고 브라더지.”“오, 쌤. 오늘 못 보던 모습을 많이 보여 주시네요?”“내가 원래 자유로운 영혼이잖아.”
박 대표의 말에 다혜가 피식 웃더니 수철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 용수철, 넌 교수님이나 대표님이라고 불러.”“싫어, 나도 쌤이라고 부를래.”“넌 제자도 아니면서 쌤은…….”
박 대표가 끼어들어서 정리했다.
“수철아, 편한 대로 불러. 쌤도 괜찮고, 형도 괜찮아.”
“네.”
“자, 기분이다. 내가 오늘 다 쏠게. 마음껏 마셔. 건배!”
“건배!”
수철에게 맥주를 들이밀며 건배를 외쳤다. 셋은 건배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박 대표는 맥주를 마시고 떠들면서도 음악이나 학교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친해지는 게 목적이기에 수철이 불편할 만한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소개도 간단하게 했다. 강의도 하지만 원래 직업은 음반 제작자라고 했다. 수철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음반 제작은 수철이 모르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분위기를 띄우며 수철과 친해지려고 계속 노력했다.
“녹음실에서 귀신을 보면 대박이 터진다고 해서, 귀신을 찾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다녔는데.”
“그래서요?”
“안구건조증만 생겼어.”
“하하.”
다혜가 배꼽을 잡았다. 수철도 같이 웃었다.
“그리고 깨달았지, 귀신 찾을 시간에 음악이나 열심히 하자고. 하하”
박 대표는 음반 제작을 하며 겪었던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호호, 진짜요?”
다혜는 격하게 리액션을 했고, 수철도 웃으면서 박 대표의 얘기를 들었다.
셋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울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뒤늦게 시간을 확인한 박 대표가 수철을 봤다.
“이제 마칠 시간이지?”
“네.”
“그럼 우리도 슬슬 가야겠네. 오랜만에 정말 재밌었어, 다음에 또 보자고.”“네, 저도 즐거웠어요.”
박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등을 돌려 천장에 있는 스피커를 봤다.
“여기 사운드가 좋은 이유가 있었네, 핀란드에서 물 건너온 스피커가 저기 있었군. 저 모델은 정말 명품이야.”“저도 좋아하는 스피커예요. 사장님의 보물 1호기도 하고요.”“그래, 정말 좋은 스피커지. 그런데 나한테 더 좋은 스피커가 있다는 건 안 비밀.”
박 대표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밀며 웃었다.
“어떤 스피커인데요?”
수철이 관심을 보였다.
“내 작업실에서 쓰는 건데, 정말 소리가 죽이지. 궁금하면 와서 들어 봐.”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언제든지 환영이야.”
“내일 가도 돼요?”
수철은 미루는 법이 없다.
언제든지 환영한다던 박 대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데 혹시 모레는 안 될까? 내일은 내가 세미나가 있거든.”“네, 그럼 모레 갈게요.”“오케이, 근데 수철이 너, 쇠뿔도 단김에 빼는 그런 성격이구나? 멋있어.”
박 대표가 당황한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 * *
이틀이 지났는데도 학교는 여전히 수철에 관한 얘기로 떠들썩했다.
음악 재능에 목마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수철의 등장은 이들에게 대단한 관심사였다.
“그런 애가 있다고?”“천재라고? 정말 그 정도야?”
선생들은 만날 때마다 그 얘기를 나눴고 학생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체 어떻길래?”
“음악 들으면 그냥 악보를 바로 출력하고, 피아노도 한번 들으면 똑같이, 아니 더 잘 친대. 암튼 음악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한대.”
이런 소문은 학과장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젊은 교수는 자신의 계획보다 빠르게 영상을 들고 학과장을 찾아갔다.
똑똑.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학과장님. 바쁘신가요?”
젊은 교수가 문 앞에서 인사하며 물었다.
“괜찮아요. 이리 와서 앉아요.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네.”
“그게 영상이 들어 있는 시디인가요?”
학과장이 교수가 들고 있는 시디를 봤다.
“네, 맞습니다.”
“그럼 영상부터 보고 대화를 나눕시다.”
“네.”
학과장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상을 지켜봤다. 보는 동안 그의 얼굴은 몇 번이나 씰룩거렸고, 얼굴빛도 달아올랐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아이군요.”
영상을 다 본 학과장이 꼬았던 다리를 풀며 몸을 당겼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김이 올라오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젊은 교수에게 물었다.
“그걸 여쭙고자 학과장님을 찾아뵌 겁니다.”
“음.”
학과장은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손을 모았다.
“우리 학교에도 프로그램이 있죠. 특별 전형도 있고,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클래식에 한정되어 있어요. 이 아이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클래식 담당하시는 학과장님을 찾아가야 할 겁니다. 아쉽지만 우리는 선택지가 없어요.”
“역시 그렇군요.”
젊은 교수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웠다. 자신이 발견한 만큼 현대음악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실망한 모습을 발견한 학과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잘 아세요?”
“네?”
“본인이 천재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시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