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작업실에서
“왜, 갑자기…….”
학과장의 느닷없는 물음에 젊은 교수는 당황했다.
“천재는 다방면으로 똑똑하지 못하죠. 사회성이 떨어집니다. 능력을 음악에 다 써 버리기 때문이죠. 사회성이 떨어지니까 소외되고, 왕따 당해서 숨어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아, 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거 같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천재의 머릿속엔 우리와 다른 세상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을 잘 아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마음만 앞서서는 안 돼요. 실망하지 말라고 드리는 말입니다.”“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이제야 학과장이 말을 꺼낸 의도를 알았다. 자칫 후배 교수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걱정한 것이다.
우려가 큰지 계속 말을 이었다.
“천재를 발견했으니 지켜 주고 싶은 마음 잘 알아요. 나도 그랬으니까요.”
“…….”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것도 알아 두세요. 보통 천재의 주변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천재를 이용해서 돈 벌 생각을 하는 사람, 그리고 앞에서는 천재라고 감탄하면서 뒤에서는 질투하는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어요. 천재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천재는 누가 키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크는 거니까요.”
“아, 네.”
역시 학과장은 달랐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연륜이 묻어났다. 그리고 젊은 교수의 뼈를 때리는 한마디를 더 얹었다.
“우리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잘 생각해 봐요.”
이 한마디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자신은 조력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네, 잘 생각하고 신중하게 접근하세요. 천재성을 잃지 않게요.”“천재성을 잃을 수도 있나요?”“당연하죠, 그런 사례가 생각보다 많아요. 천재는 자기를 존중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결말이 정말 비참해져요.”
학과장은 마치 그런 상황을 눈앞에서 보기라도 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군요, 천재성을 잃을 수도 있다니, 정말 신중해야겠어요.”“네, 그래서 이렇게 강조하는 거예요. 특히나 말을 조심하고요. 천재성을 잃는 가장 많은 경우가 사람들이 내뱉는 말 때문이에요. 사람의 언어는 강한 독을 지녔어요, 나는 그런 독한 언어가 천재를 죽이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네, 저도 공감합니다.”
젊은 교수는 몇 년 전, 잘못된 뉴스 한 줄 때문에 잠적해 버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떠올랐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학과장의 얘기에 크게 공감했다.
그때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학과장님.”
“말씀하세요.”
“지금 이 수철이라는 아이는 다른 천재들과 좀 다릅니다.”
“뭐가 달라요?”
“사회성도 좋고, 생활력도 있습니다.”
얼마 전 자신과 알바비를 흥정하던 수철이 떠올랐다.
“그래요?”
“네, 제가 만나 본 바로는 그렇습니다.”“거참, 특이한 케이스군요.”“궁금하시면 나중에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그렇게 하세요. 그런 천재가 있다니, 신기하군요.”
대화 내내 냉랭하던 학과장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찼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교수는 학과장실의 문을 닫고 나와서 잠시 복도를 서성였다.
‘이제 어떻게 한다…….’
머리가 복잡했다.
정작 수철은 아무 생각 없는데 혼자서 수철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 * *
‘이 근처인 거 같은데…….’
수철은 이른 아침부터 핸드폰에 찍힌 주소를 확인하며 주택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주택에 붙은 번지수를 확인하다가 전화기 버튼을 누르고 귀에 댔다.
―지이이잉.
작업실 소파에서 잠을 자던 박 대표의 휴대전화가 책상 위에서 진동했다.
‘아, 무음으로 해 놓을걸.’
박 대표는 반쯤 뜬 눈으로 머리맡에 놓인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몇 신데 전화질이야?’
인상을 구기며 다시 이불 속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전화는 멈추지 않고 계속 진동했다.
“에이, 이 시간에 누구야!”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쌤, 주무세요?
‘쌤? 이 시간에 전화할 녀석이 없는데…….’
쌤이라고 부르자 제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누구니?”
―쌤, 저 수철이예요. 용수철이요.
“뭐? 용수철? 그래, 수철아! 반갑다, 기다리고 있었어!”
박 대표는 놀라서 설레발을 치며 격하게 반겼다.
수철이 올 줄 알았지만, 아침 8시에 올 줄은 몰랐다.
―쌤, 괜찮으세요?
“어, 그럼. 괜찮아, 아주 좋아. 상쾌한 아침이야. 아임 파인.”―저 지금 근처에 와 있어요. 여기가 삼삼 슈퍼 앞이에요.
“바로 근처네? 금방 나갈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네.
박 대표는 전화를 끊고 부리나케 츄리닝을 찾았다. 소파 뒤에 떨어진 츄리닝은 찾지 못하고 작업실 한편에 걸려 있는 양복바지를 허겁지겁 입었다. 점퍼를 걸치고 슬리퍼를 신고 뛰어나갔다.
슈퍼 앞에서 기다리던 수철은 박 대표를 발견하고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박 대표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 녀석은 잠도 없나? 천재에다가 잠까지 없으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중얼거리며 다가가다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 수철아. 이틀 만에 보는데도 또 반갑네.”
습관성 접대 멘트를 하며 수철을 껴안으려 팔을 벌렸다.
“네, 저도 반가워요.”
수철은 인사하며 박 대표의 팔을 피했다. 코를 막으며 손을 내밀었다.
박 대표는 뻘쭘한 얼굴로 자신의 옷에 킁킁 냄새를 맡더니 수철이 내민 손을 잡아끌고 슈퍼로 들어갔다.
“아침엔 시원한 라면 국물이 죽이지. 오늘은 무파 라면으로 시작해 볼까?”
슈퍼 안에서 파가 그려진 컵라면 두 개를 집어 들었다.
“컵라면에 계란 넣어?”
“아니요.”
* * *
박 대표의 작업실은 수준이 달랐다. 전문가들이 쓰는 갖가지 장비가 쌓여 있었다.
“작업실이 아니라 녹음실 같아요.”
믹서가 있는 방에는 기타, 베이스, 퍼커션등 다양한 악기가 있었고, 유리창으로 보이는 작은 부스 안에는 드럼과 피아노가 있었다.
“작업도 하고, 녹음도 하지. 전문 녹음실이랑은 차이가 있지만 지인들 데모 녹음도 가끔 여기서 해. 내가 실력 있는 엔지니어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지만.”
믹싱 콘솔, 앰프, 음원 장비 등은 팸플릿에서나 보던 비싼 것들이었다. 심지어 헤드셋조차 고가로 보였다.
수철의 눈이 반짝였다.
“쌤, 부자신가 봐요?”“하하, 다 예전에 쓰던 장비들이야. 지금은 가난한 편에 가깝지. 어때, 내 작업실이 마음에 들어?”
“네, 완전요.”
“그럼 자주 놀러 와.”“네, 그런데 이정도 작업실 꾸미려면 돈이 얼마나 들어요?”
수철은 그게 궁금했다. 돈을 모아서 자신만의 작업실을 꾸미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작업실 갖고 싶어?”
“네.”
“그럼 만들 때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저기 봐 봐.”
박 대표가 부스 앞에 놓인 큰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는 중앙에 믹싱 콘솔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양옆으로 스피커가 서 있었다.
“내가 말한 스피커가 저 스피커야.”
수철은 신기한 눈으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봤다. 한눈에 봐도 고가였다. 아무나 사용하는 스피커가 아니었다.
“이런 스피커는 많이 비싸죠?”“그렇게 많이는 아니고, 한 학기 등록금 정도?”
“진짜 비싸네요.”
“그만큼 값어치를 하지. 음악 틀어 줄 테니 여기 앉아서 들어 봐.”
박 대표는 믹서 앞의 의자를 내밀었다. 박 대표가 녹음할 때 앉는 자리였다.
둡뚜. 땁따읍따안―!
박 대표가 리모컨을 누르자 일렉 베이스의 줄을 핑거링으로 치는 펑키한 선율이 들렸다. 그리고 소리는 곧바로 미친 듯이 줄을 두드리는 슬랩 베이스(Slap Bass)로 바뀌었다.
세계적인 베이시스트 마커스 밀러(Marcus Miller)였다.
“와!”
수철의 입이 쩍 벌어졌다.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는 공연장에서 감상하는 것처럼 웅장했다.
소리가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였다.
작업실은 금세 펑키한 사운드로 들썩였다.
마커스 밀러가 수철의 눈앞에서 베이스 줄을 튕기는 것 같았다.
박 대표는 뒤에 서서 수철이 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음악이 끝나자 수철이 돌아봤다.
“쌤! 정말 좋은 스피커네요!”
상기된 얼굴로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철은 도어스의 스피커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음악을 들을 때 스피커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수철은 기대했던 사운드를 듣고 나자 눈이 더 초롱초롱해졌다. 작업실 곳곳을 세세하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쌤, 이건 뭐예요?”
“그건 음원이 들어 있는 장비야.”“아, 신디사이저 같은 거요?”
“그래, 맞아.”
“이거는요?”
“그건 마스터링(Mastering) 할 때 쓰는 장비야.”
“마스터링이요?”
“응, 악기들 트랙을 받아서 믹싱까지 마치고 나면 음량 조절하고 음색 맞추는 작업을 하는데, 그걸 마스터링이라고 해. 앨범의 맨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하면 돼.”
“그렇군요.”
“자세한 건 차차 내가 알려 줄게. 너 여기 자주 올 거잖아.”
“그렇죠.”
박 대표는 당연한 듯이 물었고 수철도 당연한 듯이 대답했다.
“이건 어디에 쓰는 거예요?”“그건 보컬 톤을 조절하는…….”
수철은 신기한 얼굴로 작업실에 있는 이것저것에 대해 계속 물었고, 박 대표는 친절하게 계속 답을 했다.
“와, 이것만 있으면 음악 다 만들겠네요.”
“그렇지.”
―드르륵.
박 대표가 수철에게 작곡 프로그램을 보여 주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박 대표가 등을 돌렸다. 다혜였다.
“쌤! 저보다 많이 가르쳐 주면 안 돼요!”
양손에 피자랑 콜라를 들고 서 있었다.
“수철아, 안녕.”
“그래, 안녕.”
“여기서 만나니까 새롭네.”
“나도 그래.”
피자를 본 박 대표는 열렬히 환영했다.
“역시 다혜는 날 잘 알아. 넌 천사야, 천사.”
다혜가 들고 있는 피자를 보며 군침을 흘렸다.
“그제도 먹었잖아요.”“그제 먹은 건 벌써 화장실로 사라졌지.”
“에이.”
다혜가 눈을 흘겼다.
박 대표는 다혜가 가져온 피자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리고 잔을 꺼내 하나씩 놓았다.
“자, 먹어볼까?”
손을 비비더니 피자 한 조각을 입에 다 쑤셔 넣었다.
볼이 빵빵해졌다.
“천천히 드세요, 뺏어 먹을 사람 없어요.”
다혜가 웃으며 박 대표의 잔에 콜라를 따르고 수철을 봤다.
“너한테 할 말 있어.”
“무슨 말?”
수철도 피자를 한입 물고 다혜를 봤다.
“이번에 아일랜드 뮤직 페스티벌에 나가는데 같이 안 나갈래?”
“내가?”
“응.”
“내가 왜?”
“왜라니?”
다혜가 멀뚱히 수철을 봤다.
피자를 다 삼킨 박 대표가 끼어들었다.
“거기 나가는 거 확정됐어?”“네, 우리 팀이 추천받았어요.”“한 학교에 한 팀씩이지?”
“네.”
“축하한다.”
“감사해요.”
아일랜드 뮤직 페스티벌, 줄여서 ‘아뮤페’는 음악을 하는 젊은이라면 모두가 출연하고 싶어 하는 음악 축제다.
“3일 동안 하는 건가?”“네, 저희는 아직 인지도가 낮아서 오프닝 무대에 설 거 같아요.”“오프닝이 어디야?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데. 팀을 알리기에 딱이지. 출연료도 꽤 될걸?”“네, 그래서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지금 팀을 새로 짜고 있는 상황이에요.”“그렇구나, 너희는 고정 멤버가 없으니까.”
박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혜가 다시 수철에게 물었다.
“진짜 같이할 생각 없어?”“너희가 초대받았는데 내가 왜 해?”“아까 말했잖아, 우린 고정 멤버가 없다고. 그냥 학교를 대표해서 가는 거야.”
“대표? 일학년이?”
“원래 이건 일학년이 하는 거야.”“난 너희 학교 학생도 아닌데?”“한두 명은 아니어도 돼.”
다혜가 수철의 물음에 꼬박꼬박 답했지만, 수철은 관심이 없는 얼굴이다.
“그런데 그걸 왜 네가 결정해? 네가 리더야?”“지금은 그런 셈이야.”
다혜가 어깨를 으쓱했다.
수철이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그 출연료라는 거, 얼마나 돼?”
“꽤 돼.”
“정확하게 말해 봐.”“음. 만약에 우리가 다섯 명이고, 그래서 3일 동안 한다면……. 한 명당 120만 원 정도 돼.”
“와, 많네.”
“그래서 할 거야?”
“글쎄…….”
수철은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망설였다. 다혜는 뭘 그렇게 뜸 들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수철이 다시 물었다.
“하게 되면 난 뭐 하라고? 건반은 네가 치잖아.”“수철이 네가 건반 치면 난 다른 악기 하면 되지.”
“어떤 거?”
“어쿠스틱 기타.”
“잘 쳐?”
“뭐, 어느 정도는.”
수철이 다혜를 빤히 쳐다봤다.
다혜가 그런 수철의 표정을 읽었다.
“그 표정 뭐야? 너 설마…… 기타도 잘 쳐?”
다혜가 눈썹에 힘을 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