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조력자
“잘 치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쳐.”“그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돈데? 미쳐서 이빨로 막 물어뜯고 그러는 거 아냐?”
“그러진 않아.”
“쌤! 기타 좀 줘 보세요, 수철이 기타 치는 거 함 보게요.”
다혜가 박 대표의 옆에 놓인 기타를 가리켰다.
내심 수철의 기타 실력이 궁금했던 박 대표가 기타를 집어 들었다.
“아니에요, 다음에 칠게요.”
수철은 기타를 건네는 박 대표에게 손사래를 쳤다.
“한번 쳐 보지 그래? 나도 궁금한데.”
“다음에요.”
“쩝.”
수철이 극구 거절하자 박 대표는 아쉬운 얼굴로 기타를 내려놓았다.
수철이 다시 다혜를 봤다.
“언제까지 결정하면 돼?”
“빠를수록 좋지.”
“알았어, 생각해 볼게.”
이때 박 대표가 수철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지 말고 같이해 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출연료도 쏠쏠하고 좋잖아.”
박 대표는 수철이 돈 모으는 걸 안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그러곤 일어나며 배를 만졌다.
“뭐 좀 더 먹어야겠는데.”
피자로는 부족한지 냉장고를 열어보다 위에 쌓인 컵라면을 봤다.
“라면 먹을 사람?”
박 대표가 묻자 다혜가 걱정스런 얼굴로 봤다.
“쌤, 밥을 드세요. 매일 피자에다 라면에다 그렇게 밀가루만 먹으면 쓰러져요. 히트곡도 없는데 요절한 음악가 되고 싶으세요?”“컥! 이 녀석이 뼈를 때리네, 라면 먹고 힘내서 히트곡 만들어야겠다.”
“아이, 쌤…….”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내일 또 와도 돼요?”
알바할 시간을 확인한 수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럼, 또 와도 되지. 넌 언제나 환영이야. 그런데 시간만 조금 늦추자. 8시는 너무 빨라, 난 그 시간엔 거의 좀비거든.”“그럼 몇 시에 올까요?”
“9시 어때?”
“네, 알겠어요. 내일은 9시에 올게요.”
“그래.”
박 대표는 10시라고 하고 싶었지만, 수철의 얼굴을 보니 말이 안 나왔다.
“쌤, 저도 가 볼게요.”
“너도?”
“네, 가면서 수철이랑 할 얘기도 있고요.”“그래, 다들 잘 가.”
“안녕히 계세요.”
작업실에서 나와서 걸어가다가 수철이 다혜에게 물었다.
“쌤은 집이 없으셔?”
“아니, 왜?”
“작업실에서 주무셔서.”“늦게까지 작업하시는 날은 그냥 거기서 주무셔.”
* * *
박 대표는 수철과 다혜가 떠나고 작업실을 정리했다.
―지이이잉.
전화가 진동했다.
“여보세요?”
―대표님, 어디세요?
젊은 교수였다.
“작업실.”
―잠시 들르겠습니다.
“그래.”
‘이 시간에 웬일이지?’
전화를 끊고 박 대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얼마 후, 교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얘기 들었어요. 수철이 만나셨다고요.”
뭐가 급한지 들어오자마자 수철이 얘기를 꺼냈다.
“응, 오늘 여기도 왔다 갔어.”“역시 대표님의 친화력은 대단하세요.”“천재가 천재를 알아보는 거지.”“하하, 몰랐네요. 대표님도 천재셨구나.”“아는 사람 별로 없어. 그런데 여긴 어쩐 일?”
박 대표는 뜸 들이지 않고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대표님의 도움이 필요해서요.”
“무슨 도움?”
“수철이를 학교에 등록시키려고요.”
“헐…….”
교수의 느닷없는 얘기에 박 대표는 어이가 없었다.
“등록시키면?”
“네?”
“수철을 학교에 등록시키면 그다음에는 어떡할 건데?”
“가르쳐야죠.”
“하하, 자네가 재밌는 구석이 있네, 뭘 가르치게?”
“그거야…….”
교수의 말문이 막혔다.
그런 교수를 보며 박 대표는 계속 밀어붙였다.
“말해 봐, 뭘 가르칠 거냐고.”
“…….”
“아직도 모르겠어? 배워야 할 사람은 수철이 아니라 우리야, 적어도 음악에 관해서는 말이야.”
젊은 교수는 당황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자기 생각을 말했다.
“대표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하지만 큰 음악가가 되려면 스펙이 있어야 유리하잖아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요.”
“그래서?”
“그래서 수철이 등록만 하면 바로 유학도 추진해 볼 생각입니다. 학비, 생활비 모두 지원하고요.”
교수는 학교의 이름을 걸고 수철을 키워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클래식이라면 모를까, 현대음악에서 그게 가능해?”“학교를 설득해 볼 생각입니다.”
박 대표는 교수가 수철의 후원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수철의 길은 수철이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아직 철이 없군.’
교수의 철없는 집착이 자칫하면 수철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
박 대표는 이쯤에서 정리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교수의 기를 꺾을 생각에 강하게 얘기했다.
“음악이 경쟁은 아니지만 날고 기는 놈들도 다 수철이한테 박살 날 거야. 스펙? 그런 거 수철이한테 시간 낭비야. 우린 스펙이 없어서 이러고 있나?”
“…….”
박 대표의 말은 교수의 뼈를 때렸다.
교수는 명확한 팩트 체크에 아무 반발을 할 수 없었다.
박 대표는 잠시 교수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음악만 잘하면 됐지 스펙이 왜 필요해? 스펙 있고 음악 못하는 사람들 널렸잖아. 잘 알면서.”
“…….”
“우리가 할 일은 수철이 물어보면 알려 주는 정도야. 그게 우리의 역할이라고.”“그래도 연륜과 경험이란 게 있잖아요. 저희가 잘 이끌어 줘야죠.”
교수의 의지가 쉽게 꺾이지 않았다. 박 대표가 다시 원론(原論)을 꺼내 들었다.
“이론은 왜 배우고, 공부는 왜 하는데?”“갑자기 그게 무슨…….”
교수는 박 대표의 의중이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수철이처럼 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냐?”
“…….”
“천재한테 이론이 왜 필요해? 그들이 하는 게 이론이고 방법인데? 가르치려고 하는 거, 그거 직업병이야. 수철이에겐 선생이 아니라 친구가 필요한 거라고.”
박 대표는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네도 이쯤에서 그만 포기해. 수철의 미래는 수철이가 알아서 할 몫이야.”“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박 대표는 망설이는 교수를 보며 확실하게 못을 박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철이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아이가 아냐. 자네가 자꾸 그러면 수철이 숨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자네가 책임질 거야? 천재성이라도 잃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
교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박 대표가 학과장이랑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수철의 재능이 너무 부러워서 집착하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커피 한잔 마실래?”
박 대표는 생각에 잠겨 있는 교수에게 커피를 권했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하라는 의미였다.
“네, 주십시오.”
박 대표는 커피를 건네며 교수의 얼굴을 살폈다. 혼란스러워 보였다.
박 대표가 보기엔 이건 너무 쉬운 얘기다. 천재를 만난 탓에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끝나는 일이다.
‘음…….’
교수의 갈등 장면, 이 장면은 박 대표가 많이 본 장면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재능을 가진 천재를 옆에 두고 보고 싶은 마음.
천재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하고 싶은 마음.
그런데 그건 착각이다.
아름다운 착각 같지만 그건 욕심이고 집착일 뿐이다.
좋지 않은 결말을 박 대표는 많이 봤다.
말없이 커피를 마시던 교수가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의 결정을 했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수철의 재능이 부러워서 너무 욕심낸 것 같습니다.”“캬~ 역시 자넨 똑똑해, 이러니까 학교에서도 자네에게 큰 기대를 거는 거지.”
박 대표는 깊은 고심 끝에 좋은 결정을 한 교수를 칭찬했다.
“대표님께서 이쪽으론 전문가니까 수철의 좋은 친구가 돼 주세요.”“그래, 그렇게 할게. 자네도 다 잊어버리고, 이젠 자네의 길을 가.”
교수는 박 대표에게 수철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 * *
―지이이잉.
테이블 위에서 전화기가 또 진동했다.
박 대표는 머리 위를 더듬어 탁상시계를 잡았다. 부스스한 얼굴로 한쪽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에이, 녀석. 또 일찍 왔네.”
투덜거리며 츄리닝 바지를 주섬주섬 입었다.
“어저께 그렇게 얘기했는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며 계속 투덜거렸다.
하지만 전화를 받으면서 이내 표정을 바꿨다.
“수철아, 굿모닝.”
―네, 쌤. 지금 작업실 앞인데 문이 잠겨 있어서요.
“금방 열어 줄게.”
박 대표는 부스스한 머리로 허연 이를 보이며 문을 열었다.
“어서 와.”
“제가 너무 일찍 왔죠?”
“어, 조금. 뭐.”
“오다 보니까 빨리 오게 됐어요.”“괜찮아, 그럴 수 있지. 커피 한 잔 줄까?”“아니요, 전 괜찮아요.”
박 대표는 잠을 깨려고 뜨거운 블랙커피를 후후 불며 들이켰다.
“너, 아르바이트 새벽에 끝나지 않아?”
“새벽 한 시요.”
“그럼 잠은?”
“가게에서 자고 왔어요.”
“몇 시간?”
“다섯 시간이요.”
“그 정도 자면 부족하지 않아? 나 같으면 쓰러졌을 텐데.”“전 괜찮아요, 가게 열기 전에 한 시간씩 낮잠 자거든요.”“오, 그런 비법이 있었네, 역시 뭔가 달라.”
“헤헤.”
박 대표는 멋쩍게 웃는 수철에게 생각난 김에 말했다.
“수철아, 너 내일도 올 거지?”
“네.”
“그럼 여기 비밀번호를 알려 줄 테니까 그냥 열고 들어와. 내가 자고 있어도 괜찮지?”
“네.”
“비밀번호는 4321#이야. 쉽지?”
“네, 쉽네요.”
“내가 잘 까먹거든. 그래서 1234에서 바꾼 게 4321이야.”“와, 똑똑하시네요.”
“놀리는 거야?”
“아니요.”
박 대표는 수철에게 간단한 주의 사항을 알려 줬다.
“다른 건 차차 알아가면 되니까, 우선은 전기만 신경 써. 나갈 때 확실하게 다 꺼졌는지 점검하고.”
“네, 알겠어요.”
“내가 없더라도 편하게 와서 작업해.”
“그래도 돼요?”
“응, 대신 다른 사람이 오는 건 안 돼. 비밀번호를 알려 줘서도 안 되고.”
“네, 알겠어요.”
주의 사항을 알려 준 박 대표가 손을 부딪치며 일어났다.
“오케이, 그럼 오늘은 신라면으로 시작해 볼까? 너도 먹을 거지?”
“네, 좋아요.”
박 대표가 물을 끓이는데 수철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시디였다.
“무슨 시디야?”
“퀸시 존스(Quincy Jones)요. 여기 스피커로 들어 보고 싶어서 가져왔어요.”“틀어 봐. 나도 들어 보자. 퀸시 존스는 언제나 리스펙트지.”
수철은 집중하며 음악을 들었다. 작업실 스피커의 장점인 중저음 음역대의 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음악이 끝나고 컵라면을 먹던 박 대표가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같이하기로 했어?”
“뭘요?”
“다혜가 하자는 페스티벌 말이야.”“아직 생각 중이에요.”“다른 건 빠른 녀석이 그건 왜 뜸을 들여?”
수철이 머뭇거리다 대꾸했다.
“그거 하려면 같이 연습도 해야 하는데, 사장님께 말씀드리기가 그래서요.”“알바 때문에 그러는구나?”
“네.”
“연습 시간이야 조절하면 되지. 낮에 하면 되잖아.”“낮엔 여기 와야 하니까요.”
“컥!”
박 대표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수철아.”
“네.”
“여기 꼭 와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여긴 언제든지 열려 있잖아? 비밀번호도 알았겠다, 뭐가 걱정이야?”“음악 작업을 하고 싶어서요.”“짬짬이 하면 되지. 어차피 네 머릿속에 다 들어 있잖아. 여기선 프로그램에 음표 찍고 들어 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그래도 아직 모르는 장비도 많고.”
“컥!”
박 대표가 다시 젓가락질을 멈췄다.
“여기 장비 다 알아서 뭐 하게? 녹음실이라도 차리려고?”“쌤은 다 아시잖아요.”“난 오래 했잖아. 그리고 나도 장비 다 몰라. 필요한 것만 쓰는 거지. 너도 작곡하는 데에 필요한 프로그램만 익히고 나머지는 엔지니어에게 맡기는 게 좋아. 엔지니어도 먹고살아야지.”“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궁금한 게 많아서요.”“너, 자꾸 그러면 비밀번호 바꿔버린다? 전화기도 꺼 놓고.”
“…….”
박 대표의 엄포에 수철이 슬픈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박 대표는 한발 물러났다.
“아니, 말이 그렇다고! 진짜 그렇게 하겠다는 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