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영화 없는 영화음악
박 대표가 한발 물러나자, 수철도 한발 물러났다.
“알았어요, 해 볼게요. 그런데 아직도 제가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잖아요.”“얻는 게 많아서 해 보라는 거야.”
“어떤 거요?”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생길 거야. 음악 관계자들도 많이 만나게 될 거고, 너한테 관심 두는 팬들도 생길 거야. 네가 음악만큼 비주얼도 뛰어나잖아. 하하.”
박 대표는 웃으며 수철이 페스티벌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걸 싫어하는 수철은 오히려 흥미를 잃어버린 표정이다.
박 대표가 다시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거 하게 되면 돈도 얻고, 친구도 얻어. 그거 하면 네가 앞으로 음악 하는 데도 편해질 거야. 공연 요청이 들어올 거고, 그렇게 되면 작업실도 빨리 만들 수 있어.”
박 대표는 마치 수철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처럼 말했다.
수철도 작업실을 빨리 만들 수 있다는 말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이 결정하자 박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을 집었다.
―다혜야.
―네, 쌤.
―작업실 들를래?
―지금이요?
―지금이면 더 좋고.
―알았어요.
박 대표는 문자를 보내고 나서, 수철이 궁금해하던 작곡 프로그램을 모니터에 띄웠다.
“이게 큐베이스(CUBASE) 최신 버전이야.”“궁금했었는데 여기서 보네요.”
수철이 눈을 반짝였다.
“일단 간단하게 중요한 툴(Tool)을 먼저 알려 줄게. 우선 여길 클릭해서 먼저 악기 트랙을 열고…….”
수철은 귀를 세우고 박 대표의 설명을 들었다.
“봐, 이렇게 하면 돼. 어렵지 않지?”“네, 생각보다 쉽게 되어 있네요.”“처음이 어렵지, 한 번만 음악 만들어 보면 그다음부터는 쉬워.”
“네.”
“여기 한글로 된 매뉴얼도 있으니까 참고하고,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네, 감사합니다.”
박 대표가 큐베이스의 매뉴얼을 보여 주고 있는데, 다혜가 지친 얼굴로 나타났다.
“쌤, 저 왔어요.”
“어서 와.”
“수철아, 안녕.”
“안녕.”
다혜가 인사하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요즘 자주 오네요.”
“그래서 싫어?”
“좋아요, 살은 좀 찌지만.”“작곡가는 좀 쪄도 돼.”
“쌤!”
“알았어. 쏘리. 쏘리.”
다혜의 눈에 수철이 보고 있는 작곡 프로그램이 들어왔다.
“용수철! 너, 뭐야? 벌써 큐베이스까지 시작한 거야?”“시작은 아니고, 배우는 중이야.”“야, 쌤한테 레슨 받으려면 비싸. 너, 알바 열심히 해야 할걸?”“나중에 갚으면 되지.”
수철이 박 대표를 쳐다봤다. 박 대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쌤, 근데 왜 오라고 하신 거예요?”“페스티벌 진행이 어떻게 돼 가나 궁금해서.”
“아직 더디죠.”
다혜가 힘이 쭉 빠져서 대답했다. 혼자 진행하려니 힘들다. 피곤해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수철이도 너랑 같이하기로 했어.”
박 대표의 말에 다혜가 수철을 봤다.
“결정한 거야?”
“응.”
수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혜는 뭔가 미심쩍은 얼굴로 다시 박 대표를 봤다.
“쌤이 협박이라도 한 거예요?”“내가 무슨 폭력배야? 수철이가 스스로 결정한 거지. 그렇지?”
박 대표가 수철과 눈을 맞췄다.
“네,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음? 뭐예요?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슨…….”
다혜가 게슴츠레하게 둘을 번갈아 봤다.
박 대표가 물었다.
“어떻게 진행할 건지 일정을 말해 봐. 내가 도움 될 일이 있을 거 같으니까.”
박 대표가 다혜를 부른 이유를 말했다. 다혜가 자세를 가다듬고 페스티벌 진행 계획을 설명했다.
“우선 베이스와 드럼은 원래 하던 친구들이 합류하기로 했고요, 수철이 기타를 친다면 보컬만 뽑으면 돼요. 보컬은 이번 주부터 오디션을 볼 거고요. 팀이 다 구성되면 바로 연습 시작해야죠.”“연습실은? 학교는 안 될 텐데.”“그래서 알아보고 있어요.”“알아보지 말고 여기를 써.”
그 말에 다혜의 눈이 커졌다.
“진짜요? 그래도 돼요?”
입이 벌어졌다.
연습실을 구하는 것 때문에 머리가 아팠는데, 박 대표가 한방에 걱정을 해결해 주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다혜가 기뻐하니 박 대표도 기분이 좋았다.
“여기가 웬만한 연습실보다 좋을걸?”“그럼요! 여긴 완전 좋죠! 쌤, 진짜 약속한 거예요.”
다혜가 좋아서 재차 약속을 확인했다.
“알았어.”
“고마워요. 쌤”
다혜가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
“그거론 부족해. 다음에 피자 기대할게.”
“핏.”
입을 삐죽였다.
“연습하고 그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어떻게 하다니요? 페스티벌에 나가는 거죠.”“모니터링은 안 해?”“무슨 모니터링요?”
다혜는 박 대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런 무대는 서기 전에 그림을 먼저 잡아야지. 클럽 잡아서 리허설 겸 공연하고, 영상으로 녹화한 걸 보면서 부족한 그림을 만들어야지. 무대는 그림이 중요한 거 몰라? 특히 페스티벌은 방송도 내보내잖아.”
“아, 그렇겠네요.”
다혜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박 대표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림을 만들고 무대에 올라가야 관객들의 반응을 확실하게 끌어내지. 관계자들도 많이 올 텐데 말이야. 그런 무대는 한번 잘못하면 그다음엔 안 불러. 두 번이라는 건 없거든. 기회가 왔을 때 잘해야지.”“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다혜가 확실히 감을 잡았다. 옆에서 수철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학교에서 안 가르쳐 주지?”
“전혀요.”
“알았어, 그럼 너희는 연습에만 집중해. 리허설을 할 클럽은 내가 알아볼게.”“와! 정말 고마워요, 쌤은 은인이에요! 피자 확정!”“뭔가 손해 보는 느낌인데.”
박 대표는 은근슬쩍 적극적으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 수철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팍팍 밀어주고 있다. 거기에다 다혜는 가장 아끼는 제자다.
“그런데 오디션은 어디서 보려고?”“학교 앙상블실을 빌려 보려고요.”“뭘 그렇게 번거롭게 해? 여기서 보면 되지.”“헐! 쌤, 오늘 무슨 일 있어요?”“무슨 일은, 내가 원래 쿨하잖아. 밀어줄 땐 확실히 밀어줘야지.”
“레알 진심?”
“진심.”
“아, 시원해.”
다혜가 상쾌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근데, 쌤.”
다혜가 갑자기 표정을 바꿨다.
갑작스런 박 대표의 전폭적인 지원에 의문이 들었다.
뭔가 수상하다는 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왜 그렇게 봐?”
“이러는 거 저 때문이에요, 수철이 때문이에요?”
“둘 다.”
뭘 그런 걸 물어보냐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쩝, 나라고 하길 기대했는데.”
박 대표가 손을 부딪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내친김에 나가서 드라이브도 좀 하고, 좋은 데 가서 저녁도 먹자. 갈 때는 내가 다 태워다 줄게.”
“헉, 쌤!”
“또 왜?”
“건강검진 받으셨어요?”“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이야?”“우리 큰아버지도 건강검진 받고 바뀌셨거든요.”
“……?”
다혜가 박 대표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암이라고…….”
“야! 왜 자꾸 날 그쪽으로 몰아가!”“너무 확 바뀌니까 이상해서 그렇죠.”
“다혜야.”
“네.”
“친하게 지내자, 나 자꾸 죽이려고 하지 말고.”“알았어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다혜가 말을 끊고 앞장섰다.
“시디나 좀 챙겨. 오랜만에 음악 들으면서 자유로 시원하게 달려 보자.”
“좋죠.”
“수철아, 내 차에 오디오도 좋거든? 함 들어 봐. 마음에 들 거야.”
“네.”
박 대표는 시간을 내서 드라이브에 저녁까지 먹고 둘을 데려다줬다.
* * *
―삐삐삐삐. 삐. 찰칵!
다음 날도 어김없이 아침에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일요일은 좀 쉬지.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박 대표는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시계를 확인하더니 다시 이불에 머리를 처박았다.
“…….”
수철은 문을 열고 들어오다 박 대표가 자는 것을 보고는 가게에서 가져온 과일을 한쪽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의자를 당겨 앉아 헤드폰을 쓰고 컴퓨터를 켰다.
―탁탁탁. 탁탁.
박 대표를 안 깨우려고 헤드폰을 썼는데, 박 대표를 괴롭힌 건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였다.
결국 박 대표가 머리를 비비며 소파에서 일어나 앉았다.
“수철아, 안녕.”
박 대표가 손을 들며 인사를 했지만, 수철은 듣지 못했다.
박 대표는 일어나서 바지를 입고 물을 마시다 수철이 가져온 과일을 발견했다.
“어, 웬 과일?”
그 역시 수철은 듣지 못했다.
“잘됐네, 과일 먹고 싶었는데.”
사과를 꺼내 한입 물고는 수철의 등을 툭 쳤다.
“아, 일어나셨어요?”
그제야 수철이 등을 돌리고 일어나 인사를 했다.
“괜찮아, 계속해. 그런데 뭐 하는 거야?”“오다가 새로운 곡이 떠올라서 만들어 보려고요.”
“오다가?”
“네.”
“참 부럽다. 누군 몇 달을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고민하는데, 넌 이렇게 쉽게 만들다니.”
박 대표가 모니터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헉! 이게 뭐야?”
작곡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던 박 대표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온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이만큼을 만들었어? 이 프로그램도 어제 배운 거잖아.”
고작 30분도 안 된 거 같은데 큐베이스 프로그램에는 드럼 트랙과 베이스 트랙이 다 만들어져 있고, 스트링도 절반쯤 화성이 잡혀 있었다.
“야, 넌 정말 감당이 안 된다.”
박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헤. 죄송해요. 주무시는데.”“죄송하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박 대표는 자신이 오히려 수철의 작업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 너 때문에 놀라서 심장병 걸리겠다. 이러다 다혜 말대로 요절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아니지, 이 나이면 요절도 아니지. 그냥 3류 제작자 자연사, 뭐 그렇게 기사 뜨겠네.”
“헤.”
“그런데 악기를 눌러 보지도 않고 화성을 붙이는 거야?”
“네, 헤헤.”
“정말 할 말이 없다.”
박 대표는 계속 너스레를 떨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수철은 대꾸 없이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얼른 박 대표의 말을 끊고 작업을 계속하고 싶은 눈치였다.
“알았어, 방해 안 할게. 어서 해, 30분 후에 라면 먹을 거니까 참고하고.”
“네.”
수철이 다시 작곡에 집중하자 박 대표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서 수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달라, 지금까지 본 애들이랑은 많이 달라.”
중얼거렸다.
자신이 지금까지 만나 본 천재들과는 다르다는 뜻이었다.
박 대표는 수철을 기다리며 컵라면 물을 몇 번이나 다시 끓였다.
수철은 한참 뒤에야 생각이 났는지 아차 하고 등을 돌렸다.
박 대표는 그사이 컵라면 뚜껑을 오픈해 놓고 졸고 있었다.
수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눌렀다.
물이 끓자 라면에 물을 붓고 5분 후에 박 대표의 무릎을 흔들어 깨웠다.
“쌤, 라면 드세요.”
“으음.”
그제야 박 대표가 입을 닦으며 눈을 떴다.
“아함.”
기지개를 켜고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잠깐!’
일어서서 멀찍이 있는 모니터를 쳐다봤다.
“수철아, 한번 틀어 봐. 들으면서 먹자.”“아직 어설픈데요?”
“괜찮아, 처음엔 다 그렇지 뭐. 한번 들어 보자.”
“네, 그럼…….”
수철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갑자기 웅장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사이에 바이올린과 플루트가 추가되어 있었다.
음악을 듣던 박 대표의 얼굴이 경직되며 시선이 그대로 멈췄다.
“흐흐흐.”
이상한 신음 소리를 냈다.
경련이 오는 듯 몸을 휙 한번 떨고는 수철을 봤다.
“이제 영화만 있으면 되네?”
“네?”
영화 없는 영화음악.
음악을 들은 박 대표의 느낌은 딱 그랬다.
음악을 듣는 동안 박 대표의 눈앞에는 한 편의 영화가 그려졌다.
오케스트라 같은 시작 부분에서는 남녀주인공이 설원 위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맑고 높은 바이올린과 플루트의 협주는 두 주인공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모습이, 그리고 행진하는 듯한 드럼 위에 꿈틀거리듯 움직이는 베이스 연주는 마치 주인공이 쓰러진 여주인공을 태우고 늑대가 끄는 썰매를 채찍질하며 눈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고작 현악기 두 개와 관악기 하나로 이런 사운드를 만들어 내다니.’
이건 작곡이 아니라 음악과 한 몸, 음악 그 자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