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마이클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가 이 음악을 들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아니지,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이 이 음악을 듣고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건가?’
박 대표가 음악을 들은 소감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수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쌤, 제가 뭐 도와드릴 일 없나요?”“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도와준다니?”“제가 쌤의 작업실을 너무 독차지하는 거 같아서 죄송해서요. 청소라도 할까요?”
수철의 말에 박 대표가 손을 저었다.
“아니야,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그냥 넌 편하게 하고 싶은 작업을 해. 나도 작업하고 싶으면 부스 안에서 하면 되니까.”“네, 감사해요. 그럼 과일이라도 드세요.”
수철은 자신이 가지고 온 과일을 가리켰다.
“그래, 잘 먹을게. 그런데 벌써 가게?”“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수철이 약속이 있다는 말에 박 대표가 신기하게 쳐다봤다.
“약속?”
“친구들이 가게로 놀러 오기로 해서요.”
“하하, 신기하네.”
“왜요?”
“넌 친구도 안 만나고 음악만 하는 줄 알았거든.”“저도 고등학교 친구들 꽤 있어요.”“그래, 음악도 쉬엄쉬엄해야지. 재충전도 해가면서 말이야. 친구들 만나서 재밌게 놀아.”
“네.”
수철이 가고 나자 박 대표는 헤드폰을 쓰고 수철이 작업한 음악을 다시 들었다.
“캬, 죽인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박 대표는 한 번씩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철이 만든 음악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내가 이래서 천재들을 좋아하지. 참을 수 없는 감동을 주거든.”
박 대표는 천재를 친구로 둔 행운을 마음껏 누렸다.
* * *
“야, 용수철!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오랜만에 고딩 때 친구들이 도어스로 찾아왔다. 수철은 친구들이랑 늦은 시각까지 어울리며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셨다.
친구들은 학생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가게에 있는 악기로 ‘스모크 온 더 워터’를 세 번씩이나 연주하고 노래했다. 다른 노래는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해가 뜰 때까지 밤새 떠들고 놀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점심이 다 되어서야 일어나 보니 다혜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내일 아침 10시에 보컬 오디션 볼 거니까 시간 맞춰서 와.
* * *
―삐삐삐삐. 삐. 찰칵!
수철이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늘은 작업하러 온 게 아니다. 오늘은 모두가 기다리던 보컬을 뽑는 날이다.
박 대표는 오디션에 방해된다고 생각했는지 약속이 있다며 일찌감치 사라졌다.
수철이 작업실을 정리하고 있는데 멤버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수철아, 일찍 왔네?”
“응, 어서 와.”
“쌤은?”
“약속이 있으시다고 나가셨어. 오늘은 안 오실 거래.”“우리끼리 하라고 자리를 피해 주신 거네.”
“그런 거 같아.”
오디션은 오전부터 진행됐다.
맴버들은 오디션을 볼 수 있게 부스 안에 마이크와 헤드폰을 세팅하고, 작업실에서 부스 안을 보며 심사할 수 있게 의자를 일렬로 배치했다.
그 의자에는 수철과 다혜를 비롯해 멤버 4명이 앉았다.
오디션을 보러 온 사람은 총 5명이었다.
작업실 밖 복도에 대기하면서 자신의 차례가 되면 한 명씩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MR(Music Recorded) 좀 틀어 주세요.”
맨 처음 오디션을 보러 부스에 들어온 여자 보컬은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준비한 반주 시디를 내밀었다.
그녀는 준비성도 좋았고 분위기도 범상치 않았다. 전문가의 포스가 풍겼다.
“Such a fool to hold you―!”
그녀는 예상대로 굵은 성량과 독특한 톤을 뽐내며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명곡 ‘I’m A Fool to Want You’를 불렀다.
“와.”
모두가 그녀의 노래 실력에 감탄했다. 심사 위원이 아니라 관객이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는 원곡과 상당히 비슷하게 불렀다. 실력이 대단해서 학생이라기보다 전문 재즈 보컬리스트 같았다. 모두 그녀의 소리에 매료됐다
“와. 정말 잘한다. 학교에서 얼굴은 몇 번 본적이 있는데 노래는 처음 들어봤어. 소문대로 정말 잘 부르네.”
다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빌리 홀리데이의 독특한 음악을 소화해 내는 게 놀랍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팀과는 색깔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빠르고 펑키한 음악을 소화해 내기에는 그녀의 창법이 한계가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분위기가 너무 재즈스러웠다. 그루브한 음악을 하며 흥겨운 리듬을 타야 하는 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보이스 컬러도 좋고, 노래 실력도 상당한데 아쉽다.”
다혜는 아쉬워했다.
이번엔 같이 못 하더라도 다음엔 같이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챙겼다.
다혜는 작곡을 하기에 앞으로 노래를 불러 줄 가수가 많이 필요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친구들이 적극 추천해서 나왔다는 두 번째 남자 보컬은 알앤비(R&B) 창법으로 가요를 불렀다.
하지만 말과 달리 그의 노래 실력은 실망스러웠다. 내심 기대를 했던 멤버들은 노래를 듣는 동안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지나친 자신감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모두가 탈락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안 되나요― 나를 사랑하면 조금 내 마음을 알아주면…….”
원곡을 부른 가수를 비슷하게 흉내 냈지만, 그뿐이었다.
소를 몰고 다니던 그의 창법은 얼마 안 가 울음소리로 변했고, 지나친 감정 탓에 노래가 끝나고도 울먹였다.
멤버들도 울고 싶었다.
‘남은 3명 중에 우리가 찾는 보컬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적당한 보컬이 없어서 우려가 커지고 있을 때, 드디어 문제의 3번째 남자가 나타났다.
부스 안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뽀글뽀글 파마머리 가발에 나팔바지를 입고 있었다.
“우리 학교 학생이야?”
“아닌 거 같은데?”
그가 나타나자 모두 수군거렸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부스 안에 들어오자마자 꾸벅 인사를 하고는 호주머니에서 하얀 장갑을 꺼내 오른손에 꼈다.
그리고 바닥에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음악을 틀었다.
멤버들은 소개도 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려는 그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음악이 시작됐다.
쿵! 칙. 팍! 칙. 쿵! 칙. 팍! 칙.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빌리 진(Billie Jean)이었다.
멤버들이 턱을 움직이며 리듬을 탔다.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하는 건 힘든 음악이다.
음악이 시작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의 손엔 페도라가 들려 있었다.
빰― 빰! 빰― 빰!
모자를 머리에 눌러서고는 리듬에 맞춰 엉덩이를 밑으로 뺏다 올렸다 하기 시작했다.
“헉!”
눈앞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 벌어지자 모두의 입이 벌어졌다. 자세히 보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다리를 들어서 몇 번 흔들고, 한 바퀴 빙글 돌더니 모자를 벗어서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어 발목을 비틀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She Was More Like A Beauty Queen From A Movie Scene. I Said…….”
‘원! 앤. 투 앤! 쓰리 앤. 포 앤.’
노래를 부르며 당김 박에 맞춰 움직이는 그의 동작은 예사롭지 않았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움직이는 동선은 마이클 잭슨과 맞아떨어졌고, 보이스도 거의 비슷했다.
“Billie Jean Is Not My Lover She’s Just A Girl Who Claims That…….”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목을 비틀며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진짜 마이클 잭슨 같았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마이클 잭슨의 판박이였다.
그는 분위기를 탔는지, 클라이맥스에선 바닥을 끌며 뒤로 가는 문워크까지 선보였다.
그의 무대는 완벽했다.
보컬을 뽑는 오디션인데, 마치 개인 콘서트라도 하듯이 열정을 쏟아 냈다.
음악이 다 끝나고 나서는 잠시 마지막 포즈를 유지하는 노련함도 보였다.
‘헉, 헉.’
그는 끼를 다 뿜어내고 나서야 가쁜 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와!”
짝짝!
멤버들은 본분을 잊고 소리를 지르며 기립 박수를 쳤다. 달려가 사인이라도 받을 기세였다.
그는 모자를 집어서 가슴에 대고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
그에겐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모든 동작이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피나는 연습의 결과일 것이다.
무대가 끝나고 나서야 그가 하얀 양말에 까만 구두를 신고, 반짝이는 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다.
의상을 준비해 온 것만 봐도 그가 오디션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알 수 있었다.
“나이가?”
“어느 학교?”
“머리 그거 가발?”
“반짝이는 어디서?”
노래가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다.
“잠깐! 내가 먼저 할게.”
다혜가 주위를 정리하고 나서 다시 물었다.
“우리 학교 학생이세요?”
가장 궁금한 질문이었다. 그가 같은 학교 학생이라면 분명히 봤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외모가 눈에 띄었다.
“아니요, 전 엄마 심부름 왔다가 복도에 붙어 있는 광고를 보고…….”
알고 보니 그는 카페테리아 이모의 조카였다. 이모를 보러 왔다가 학교에 붙은 보컬 구인광고를 본 것이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20살이요.”
생각보다 어렸다. 동갑이었다.
그때 웃으며 지켜보던 수철이 소리쳤다.
“합격!”
다혜는 당황했다.
“뭐 하는 거야? 상의도 없이. 뒤에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데.”“더 좋은 사람 못 찾아. 일단 합격시키고 뒤에 사람들 보면 되지. 딱 맞는 사람 나타났을 때, 어서 잡아야지.”“어서 잡긴, 저 사람이 어디 도망이라도 간대?”
다혜는 수철의 성급함에 핀잔을 줬다.
보컬이 밴드의 가장 중요한 자리라서 예민하게 귀를 세우고 있는데, 느닷없이 수철이 합격을 외쳤으니 그럴 만했다. 더군다나 뒤에는 아직 2명이 오디션을 보려고 기다리는 상황이다.
“잠시만 생각 좀 정리하자.”
다혜에겐 한 가지 더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보컬 오디션에 당연히 학교 학생들만 지원할 줄 알았는데 외부인이 나타난 것이다.
학교에 광고를 붙였기에 따로 자격 요건을 적지 않았다. 한두 명은 학교 학생이 아니어도 되지만 그래도 보컬은 다르다. 상식적으로 학교 학생이 해야 하는 게 맞다.
“너무 고민하지 마, 이건 운명이야.”
“내 생각도 그래.”
드러머와 베이시스트는 남의 속도 모르고 수철의 의견에 동의했다.
멤버들은 마이클의 등장에 들떠 있었다.
“저기, 마이클 씨. 이쪽으로…… 풉!”
수철이 손을 들고 마이클을 부르려고 하자, 다혜가 다급히 입을 막았다.
“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다혜는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듣기라도 했을까 봐, 고개를 내밀어 입구를 살폈다.
“그래도 남은 사람들 오디션은 봐야 할 거 아니야.”“당연히 봐야지. 보나 마나일 것 같긴 하지만.”
다혜는 겨우 수철과 나머지 멤버들을 진정시키고 남은 두 명의 오디션을 진행했다.
“마이클 씨는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고, 다음 분 들어오세요.”
“네.”
나머지 두 명은 모두 여자 보컬이었다. 두 명 다 꽤 수준 높은 실력을 보였고, 매너도 좋았다. 노래를 부르는 자세도 좋았고 음악적 감각도 좋았다. 둘 다 외모도 뛰어났다.
하지만 그녀들의 노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워낙 마이클이 강해서 머릿속엔 온통 마이클로 차 있었다.
쿵! 칙. 팍! 칙.
이미 머릿속에선 마이클이 밴드의 보컬이 돼서, 다리를 흔들며 노래하고 있었다.
“인제 그만 결정하지?”
오디션이 모두 끝나자 멤버들이 다혜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