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컬러풀 SA
“나?”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던 수철은 다혜의 느닷없는 물음에 멈칫했다.
“이름 같은 거 지을 줄 모르는데.”
수철은 자신에게 그런 걸 기대한 다혜가 이상하게 보였다.
다혜도 그걸 알지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큰일이네, 빨리 지어야 하는데.”
다혜는 시름에 잠겼다.
“지난번 팀 이름은 뭐였어?”“특별한 이름 없이 그냥 그루브 케이(Groove K)로 활동했어. K는 학교 이니셜이고.”“이러다 진짜 마이클 말대로 광필이 밴드로 나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밴드 앞에 자신의 이름이 붙자 마이클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밴드 이름을 지어 오라는 요청에 마이클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광필이 밴드를 제안했다. 물론 다들 무시했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심 기대하던 마이클에게 다혜가 찬물을 끼얹었다.
특별히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어서 멀뚱거리고 있는데, 박 대표가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 아직 있었네?”
“안녕하세요.”
모두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연습은 다 끝났어?”
“네.”
“쌤. 저희 밴드 이름 좀 지어 주세요.”
다혜가 다가서며 박 대표에게 밴드 이름을 부탁했다.
“너희 이름을 왜 나한테?”“쌤이 이름 잘 짓잖아요?”“내가? 금시초문인데?”“노래에 제목도 붙이고, 앨범 타이틀도 만들잖아요.”“그건 해야 하니까 하는 거고.”“그러지 말고 하나 지어 주세요. 잘 안 지어져서 그래요.”
다혜가 울상을 지었다.
“음, 이런 건 밴드를 처음 봤을 때 딱 떠오르는 느낌으로 짓는 게 좋아. 너희는…….”
박 대표가 말을 멈추고 멤버들을 둘러봤다. 멤버들은 모두 박 대표의 입만 쳐다봤다.
“너희는……. 마이클에, 파랑 머리에, 문신에, 수철이와 다혜. 그리고 코러스 두 명이 더 있다고 했지?”
“네.”
“음, 동갑내기에 저마다의 색깔이 있으니까…….”
박 대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한번 멤버들을 쭉 훑어봤다.
“컬러풀 사. 어때?”
“컬러풀 사요?”
박 대표를 보는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색깔 있는 풀을 사라는 말로 들렸다.
“너희는 모두 색깔이 다채롭고, 동갑내기니까. 컬러풀(Colourful)한 세임 에이지(Same Age)잖아. ‘컬러풀 사’에서 ‘사’는 세임 에이지에서 S와 A를 합친 거지. 어때? 펑키한 느낌도 나고 괜찮은 거 같은데.”“컬러풀 사…… 컬러풀 사…….”
다들 입에 잘 붙지 않는지 계속 읊조렸다.
이름 짓는 게 머리 아팠던 다혜는 바로 오케이했다.
“난 좋은데? 너희는 어때?”“괜찮은 거 같아, 우리랑 잘 어울리는 거 같아.”“나도 그래, 음악이랑도 잘 맞는 거 같고.”
드러머와 베이시스트도 찬성했다.
수철과 마이클은 별다른 대꾸 없이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쌤, 고마워요.”
“밴드 잘되면 알지?”“알았어요, 피자 앤 콜라.”“캬, 역시 넌 내 맘을 잘 알아.”
* * *
둘째 날부터,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됐다.
처음엔 다혜가 나서서 이견을 조율하다가 힘에 부치자 결국 수철이 나섰다.
“우선, 원래 하던 대로 해 보자. 원곡 느낌을 살려서.”
같은 음악을 편곡하더라도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조율이 필요했다.
“라이브는 시디와 다르잖아. 라이브가 주는 쾌감을 최대한 끌어올려 보자.”
수철이 나서면서 합주는 급물살을 탔다.
“오케이. 다시 해 보자. 원 투 쓰리 포!”
수철은 다혜의 건반에 맞춰 기타의 리듬을 집어넣고, 빈 부분은 멜로디를 쳐서 채웠다.
연주 실력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자, 이것 봐 봐.”
새로운 편곡에 대한 악보가 필요한 사람에겐 바로 악보를 그려 줬고, 거슬리는 부분은 바로 지적해서 음악을 탄탄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시간도 단축됐다.
“햐, 벌써 끝났네, 순대나 먹으러 갈까?”
“콜!”
멤버 간의 팀워크도 쌓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다.
충돌이 있었다.
수철의 실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수철이 모든 악기에 관여하자 자존심이 상한 멤버들이 반발했다.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네가 드러머야? 베이시스트야?”
연습하다 말고 각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듣는 사람이 개운치가 않아. 어차피 할 거 제대로 하는 게 좋지 않아? 어려울 거 없잖아. 조금만 신경 쓰면 되는데.”
불끈하며 대들던 멤버들도 수철이 정확하고 명확하게 소리를 잡아내자 어쩔 수 없이 잠잠해졌다.
무엇보다 학교에 소문이 퍼진 천재 소년이 수철이라는걸 알고 나서는 입을 꽉 다물었다.
음악에서는 언제나 수철이 옳았다.
“이렇게 한번 해 보자. 너희도 마음에 들 거야.”
수철의 말대로 하니까, 속도도 빨라지고 음악도 더 다이내믹해졌다. 수철은 자연스레 밴드의 지휘자가 되었다.
연습이 계속될수록 멤버들은 수철의 스피드와 날카로움에 혀를 내둘렀다.
“마이클, 잠깐만!”
마이클의 음이 떨어지면 건반을 눌러서 음정을 잡아 줬고,
“거기 3번째 줄 좀 풀렸다.”
베이스 기타의 조율까지 챙겼다.
“다혜야, 라이브는 더 멋있고 실감 나게 해야지. 건반 화성을 나눠서 리듬을 만들자.’
모든 악기를 챙기며 사운드를 쥐락펴락했다.
코러스 라인도 만들어서 직접 연습시켰다. 7곡에 대한 코러스 연습을 단 두 시간 만에 끝냈다.
악기를 붙여서 합주를 해 보니, 예상대로 코러스 하모니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수철은 굳이 합주하지 않아도 이미 머릿속에서 사운드를 다 그리고 있었다.
이쯤 되니, 모두 수철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제 뭐 하면 돼?”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콤한 행복이라는 누구의 말이 떠올랐다. 수철에게 복종하니 몸도 마음도 편했다.
“조금만 힘내. 오늘 다 끝내 버리자.”
박 대표가 말한 것처럼 쇠뿔도 단김에 빼 버리는 수철의 실행 능력은 탁월했다.
수철은 알바까지 미뤄 가며 모든 곡의 편곡을 순식간에 마무리 지어 버렸다.
빡세게 일주일을 예상했던 연습은 단 3일 만에 끝나 버렸고, 새롭게 바뀐 곡들은 유명한 음악가들의 음악보다 더 그루브하고 화려해졌다.
축제에 얼른 서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공연 때 관객들 제대로 미치겠는걸?”
공연을 보게 될 사람들의 반응이 기대됐다.
합주가 끝나고 베이시스트가 드러머에게 속삭였다.
“솔직히 앙상블 교수보다 수철이 낫지 않아?”
“훨씬 낫지.”
그 정도였다. 그다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멤버들은 단 3일 만에 엄청난 성장을 했다.
하지만 수철이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의외로 허점도 있었다. 특히 음악 용어에 관해서는 그랬다.
“이 부분은 좀 바꿔서 가는 게 좋겠어. 음악이 너무 늘어지잖아.”
“어떻게?”
“박을 앞으로 당겨서 악센트를 주자. ‘타! 타타타. 타! 타타타.’ 두 번 다 첫 박에 센 박을 주지 말고, ‘타! 타타타. 타타타. 타!’ 이렇게 두 번째는 마지막 박에 센 박을 주면 조여질 거야.”“싱코페이션(Syncopation) 말하는 거지?”“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짝짝짝짝! 4번째 마지막 박을 강하게 쳐 주는 거지. 이렇게 당겨서 치면 박을 조여 주는 느낌이 들잖아.”
답답한지 손뼉까지 치면서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게 싱코페이션이지.”
“싱코…… 뭐?”
“하하, 바보. 그것도 몰라? ‘싱코 뭐?’래, 하하!”
다혜는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깔깔거리고 웃었다.
천재를 놀려 먹을 기회를 놓칠 다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웃을 일은 아니었다.
“저게 저렇게 웃을 일이야?”“쟤가 리더 자리를 뺏기더니 실성했나?”
멤버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 * *
다음 날, 다혜는 그동안 미뤄왔던 헤드폰을 사서 수철에게 건넸다.
헤드폰을 본 수철의 입이 벌어졌다.
“진짜 주는 거야?”
“달라면서?”
“고마워.”
“그리고 이거.”
“뭐야?”
“선물.”
“선물?”
“그래, 열어 봐.”
열어보니 두툼한 책이었다.
책에는 ‘음악 용어 백과사전’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고마워.”
수철은 씨익 웃었다.
수철이 전문용어까지 다 알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팀을 같이 하려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혜가 선물했다. 깔깔대고 비웃은 것도 마음에 걸렸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그거 찾아봐. 모르겠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이 누나가 친절하게 알려 줄게.”
모처럼 다혜가 어깨에 힘을 줬다.
“우린 오늘 동대문으로 가 볼까?”
시간이 촉박할 거라는 처음의 예상과 달리 시간이 남자, 다혜와 코러스는 무대의상을 보러 다니는 여유까지 생겼다.
수철은 남는 시간에 박 대표가 모아 놓은 영상들을 봤다. 뮤직비디오를 비롯해 공연 영상을 쉬지 않고 봤다.
박 대표가 얘기하는 그림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작곡에도 도움이 되겠어.’
작곡하는 데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만들 때, 밴드와 보컬이 무대에서 어떤 그림을 만들까? 상상하며 작곡을 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수철아. 직접 공연 현장 가 보면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그림은 현장에서 느껴야 하거든.”
박 대표는 쉬지 않고 영상을 보는 수철에게 그림을 제대로 알고 싶으면 공연 현장을 가 보라고 귀띔했다.
* * *
마지막 총연습 날도 박 대표의 작업실은 북적였다. 매니저를 하겠다고 따라붙은 녀석까지 왔다 갔다 하니 박 대표는 정신이 없었다.
혹시나 애들이 비싼 장비에다가 콜라라도 엎지를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다.
“얘들아, 믹싱 콘솔이랑 장비들 옆에는 콜라 놓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알아요.”
대답하면서도 금방 까먹고는 아슬아슬한 위치에 음료수를 올려놓았다.
박 대표는 애들의 말은 들리지 않고, 장비 가까이에 놓인 음료수만 보였다.
“자, 얘들아, 이것 봐 봐. 여기 빨간 글씨로 써놨으니까 들어오면서 한 번씩 봐.”
몇 번 얘기해도 아이들이 까먹자 부스 앞에 ‘콜라는 밖에서 마시고 들어와!’라는 문구까지 써 붙였다.
“어, 여기 컵라면이 있었네? 쌤 이거 먹어도 되죠?”“그래, 그러렴. 용하게 발견했네.”
아이들은 냉장고 뒤에 숨겨 놓은 컵라면까지 찾아서 먹었다.
쿵! 칙. 팍! 칙.
연습 시간이 되자, 멤버들은 부스 안에 모여 진지하게 마지막 연습을 했다.
“바로 다음 곡 해 보자.”
수철의 지휘에 따라 팀은 빠르게 모든 곡을 합주했다. 수철의 스피드를 쫓다 보니 마지막 총연습도 두 시간 만에 다 끝났다.
“이제 우리 뭐 해?”
지친 얼굴로 드러머가 물었다.
“내일은 하루 쉬고, 그다음엔 쌤이 얘기한 클럽에서 공연하면 될 거 같아.”
“알았어.”
수철의 얘기에 모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멤버들이 다 돌아가고 수철과 다혜가 박 대표와 마주 앉았다.
“쌤. 클럽 잡아 주세요.”“음악은 다 맞췄어?”“네, 수철이 덕분에 일찍 끝났어요.”“그럼 언제 잡아 줄까?”“모레 하면 될 거 같아요.”
“알았어. 잠시만.”
박 대표가 휴대전화를 들고 일어섰다.
―네, 형님.
전화기 너머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대에서 클럽을 운영하는 최 사장이었다.
“지난번에 내가 말한 공연 말이야. 그거 모레 가능할까?”―네, 형님이 잡으라면 무조건 잡아야죠.
“고마워. 저녁 일곱 시 괜찮아?”―가능합니다. 그런데 팀 이름이 어떻게 돼요?
“‘컬러풀 사’라고, ‘사’는 영어로 SA야.”―알겠습니다. 밴드 홍보란에 올려놓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그날 봐.”―네, 형님. 그날 뵙겠습니다. 끝나고 오랜만에 한잔하시죠.
“그래, 그러자.”
전화를 끊고 박 대표는 그날 일정을 다시 설명했다.
“여기에 모여서 다 같이 네 시에 출발하면 될 거야. 그리고. 카메라는 내가 챙겨 줄 테니, 영상은 너희가 찍어서 모니터링해 봐.”
“네.”
“장소는 합정역에서 가까운 ‘롤링 버튼’이야. 사운드 체크도 할 겸 일찍 가자.”
“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