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뜻밖의 결정
열광하는 관객을 보던 국장이 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면 반칙 아니에요?”
“반칙이요?”
“그렇잖아요, 오프닝 무대가 7개나 있는데, 여기에 다 모여 있으니 말이에요.”
국장의 말은 관객들이 곳곳에 흩어져서 공연을 봐야 하는데, 한군데에 모여 있는 게 문제라는 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그게 말입니다. 어제 리허설 때.”“그 얘긴 나도 들었어요.”
국장이 언짢은 투로 말을 끊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왜 미리 수습하지 않았느냐는 의미였다. 관객이 한곳에 모여 있으면 나머지 무대를 만든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뜻이기도 했다.
국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많이 모일 수가 있어요? 아이돌 콘서트도 아니고. 심각해요, 심각해.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해.”
국장이 머리를 저었다.
무대의 형평성을 신경 써야 하는 국장 입장에서는 머리 아픈 상황이었다. 목이 타는지 옆에 있던 생수병을 집어서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무대 앞에 빼곡히 모인 사람들을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이걸 어떡할 거야? 사람들에게 다른 무대로 가 달라고 부탁을 할 수도 없고.”“어떻게, 방송이라도 할까요?”
팀장이 개념 없이 말을 내뱉었다. 국장은 화가 치솟았다.
“방송이요? 뭔 방송이요? 여기 모여 있지 말고 다른 데로 가라고 할 거예요?”
지금 이 상황에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말하는 팀장이 이해가 안 갔다.
국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진행이 매끄럽지 않았느니,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었느니, 불만이 터져 나올 게 뻔한데. 그건 누가 책임질 거예요?”
“그거야…….”
“그거야 바로 나 아닙니까? 바로 당신 앞에 서 있는 나 말이에요!”
국장은 팀장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팀장이랑 더 이상 대화하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애써 감정을 추스리며 말을 이었다.
“불만이 터져 나오면 화살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올 게 뻔한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예요? 뭔가 대책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네, 맞는 말씀입니다.”
‘허…….’
앵무새처럼 대꾸만 하는 팀장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다시 톤을 가다듬었다.
“특히나 내일은 마지막 날이잖아요. 기자도 몰려들 거고, 실시간으로 방송까지 나가는데 이런 모습을 계속 연출할 수는 없잖아요.”“맞습니다. 국장님”
“거, 맞다는 말만 계속하지 말고 아이디어 좀 내봐요. 앵무새예요?”
국장이 눈을 흘겼다.
“네, 국장님……. 아, 죄송합니다.”“거참, 누가 국장이고 누가 팀장인지 모르겠네, 쩝.”
한숨을 쉬는 국장의 눈에 축제 플래카드가 보였다.
“잘못하다간 협찬사와도 껄끄러워지겠어요. 이번 축제엔 지원도 많이 했는데.”
모든 게 부정적으로 보였다.
국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무대를 바라봤다. 사람들이 무대 앞에 모여서 열렬히 환호하고 있었다.
국장은 뭔가 작심한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당장 긴급회의를 해야겠어요. 프로그램 담당자와 출연자 관리팀장, 무대 담당자와 메인 무대 연출 감독도 부르세요.”“알겠습니다, 국장님.”
국장은 관객들이 앙콜을 외칠 무렵,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조직위 사무실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정말 많이 모였네, 어제보다 훨씬 많아.”
둘째 날은 첫째 날보다 사람들이 더 모여들었다. 유명 아이돌의 공연처럼 관객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어제보다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그만큼 입소문의 힘은 대단했다.
―한곳에 모여 있지 말고 다른 무대도 신경 쓰세요.
다른 밴드의 무대가 텅텅 비어서 스텝들이 가서 채우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정도였다.
밤새 인터넷을 타고 퍼진 소문 탓에 조직위 사람들과 기자들까지 구경 왔다. 멀리서 촬영하는 카메라도 보였다.
메인 무대에서나 보이는 광경이었다.
무대 연출과 조명은 더 화려해졌고, 당연히 관객들 열기도 어제보다 뜨거웠다.
“제대로 놀아 보자!”
사람들은 시작 전부터 광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이클과 같은 복장을 하고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어제의 흥분을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아온 사람도 보였다.
“분위기 탔어, 끝까지 달려 보자!”
멤버들은 열정을 불태웠다.
숨겨 놓았던 스티비 원더의 곡을 뽑아 들며 초반부터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와! 와!”
관객들의 함성은 섬 전체를 들썩였다. 메인 무대를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멤버들은 무대를 하얗게 불태웠다.
“앙콜! 앙콜!”
오늘도 관객의 열광적인 호응 때문에 앙콜 곡을 두 곡이나 했다. 그나마 두 곡으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관객들은 밴드가 사라질 때까지 ‘한 곡 더!’를 외쳤다. 자신들의 흥을 더 채워 달라는 외침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앙콜은 오버였다.
“정말 하얗게 불태웠어.”
멤버들은 오늘도 에너지를 다 쏟아붓고 무대를 마무리했다.
* * *
공연이 끝나고 음향 시스템을 정리하던 오퍼레이팅 엔지니어에게 진행 요원이 급하게 뛰어왔다.
“저기, 엔지니어님.”
“네?”
“조직위 사무실로 좀 가셔야겠어요.”“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왜 갑자기.”“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어요, 긴급회의가 있어서 오시라는 호출만 받아서 전해 드리는 거예요.”
“긴급회의요?”
엔지니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긴급회의인데 엔지니어까지 부르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지금 가야 하나요?”“네, 지금 오시래요.”
“알겠어요.”
엔지니어는 정리하던 전선 줄을 내려놓고 조직위 사무실로 향했다. 소식을 전한 진행 요원은 엔지니어가 떠나자 출연자 대기실로 뛰어갔다.
* * *
멤버들은 지쳤지만 표정이 밝았다.
어제 공연을 한번 해 본 탓에 오늘은 금방 여유를 되찾았다.
“몸은 힘든데 공연 더 하라면 할 거 같아. 이런 반응을 언제 또 느껴 볼 거야?”
조금 전까지 탈진한 것 같았던 드러머는 상기된 얼굴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제보다 많은 관중에 신이 났다. 체력 소모가 많은 드러머인데도 공연을 더 하겠다는 말을 했다.
다른 멤버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지친 모습은 사라지고, 좋아서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밝은 미래가 보이는 거 같았다.
그때 진행 요원이 뛰어 들어왔다.
“잠시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멤버들의 시선이 진행 요원에게 향했다.
“가시지 말고 대기실에서 30분만 기다려 주세요.”
“30분이요? 왜요?”
“급한 결정 사항이 있어서 조직위에서 회의 중인데, 결과를 알고 가셔야 해서요.”
‘회의? 결과?’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무슨 결과를 말하는 거예요?”“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30분만 기다려 달라는 요청만 받았어요.”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조직위의 요청이라는데 딱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눈인사를 하고 뛰어나가던 진행 요원이 다시 돌아봤다.
“아, 참.”
“……?”
“오늘 공연 정말 멋있었어요. 관객들 반응도 엄청났고요.”
양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감사해요. 스태프분들도 수고 많으셨어요.”“내일도 멋진 공연 부탁드릴게요.”“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멤버들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린 멘트로 대꾸했다.
소식을 전한 진행 요원은 다시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국장과 각 파트의 담당자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전체 무대를 연출하는 총감독도 보였다.
“무대를 옮기는 게 가능하겠어요?”“네, 가능합니다. 오늘 공연을 마지막으로 빠지는 해외 초청 팀이 세 팀 있습니다. 무대를 축소할 계획이었는데, ‘컬러풀 SA’를 메인 무대로 옮긴다면 지금 세팅된 그대로 진행하면 됩니다.”
프로그램 담당 팀장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인력은 어떻습니까?”“인력도 여유가 있는 상황입니다. 해외 팀도 빠졌지만, 국내 팀도 개인 사정으로 빠진 팀이 두 팀 있습니다. 그만큼 인력도 넉넉합니다.”
스텝을 관리하는 팀장도 긍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조명과 음향은 어때요?”“조명은 아직 그대로 있지만, 음향은 지금 철수하고 있습니다. 멈추라고 할까요?”“아니에요. ‘컬러풀 SA’의 오프닝 무대가 폐쇄되면, 담당 엔지니어가 같이 옮겨 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여기로 오시라고 했으니까 의견을 들어 보고 결정하면 될 겁니다.”
국장은 모인 사람들을 휙 한번 둘러본 후 테이블 위에 손을 모았다.
“오케이, 그럼 그렇게 진행합시다. ‘컬러풀 SA’를 메인 무대로 옮깁시다.”
국장의 결정은 축제의 흥행과 오프닝 무대의 형평성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컬러풀 SA’의 흥행은 이미 검증되었고, 메인 무대로 옮겨가면 축제의 흥행에도 영향을 미칠 게 뻔했다. 그리고 ‘컬러풀 SA’가 옮겨가면 다른 오프닝 밴드도 잃었던 관객을 되찾을 수 있다. 이미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희도 오프닝에 집중했죠.”
어이없는 불만도 터져 나왔다.
이대로 놔둔다면 다른 밴드들의 불만도 폭주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흥행과 형평성 두 가지를 모두 잡고자 국장이 내놓은 묘책이었다.
그때 엔지니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찾으셨다고요?”
들어서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국장이 손을 내밀어 자리를 가리켰다. 엔지니어가 자리에 앉자 국장이 물었다.
“거기 공연장 분위기는 어떻습니까?”“아주 좋습니다. 관객들 호응도 대단하고요. 무엇보다 밴드의 실력이 출중합니다. 메인 무대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그렇군요. 그래서 내일은 그 무대를 폐쇄할 계획입니다.”
“네?”
엔지니어의 눈이 커졌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무대를 더 키워도 부족한 상황에 폐쇄한다니, 더군다나 관객이 가장 많이 모이는 마지막 날을 앞두고 말이다. 국장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지 마세요. 내일 그 무대를 메인 무대로 옮길 계획입니다.”
“……?”
“물론 엔지니어님도 같이 가시면 됩니다.”
“아, 역시! 옳으신 결정입니다!”
그제야 엔지니어의 얼굴이 펴졌다.
“내일 ‘컬러풀 SA’의 메인 무대 데뷔의 오퍼레이팅을 맡아 주세요.”“네, 잘해 보겠습니다!”
메인 무대는 무대가 큰 만큼 음향 장비도 더 들어간다. 당연히 대여비도 상승한다. 엔지니어는 흔쾌히 승낙했다.
* * *
“내일은 몇 명이나 모일까?”
멤버들이 커피를 마시며 잡담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내가 대기실에 불쑥 들어왔다.
조직위의 결정을 전하러 온 프로그램 담당자였다.
“안녕하세요. 축제 프로그램 담당자입니다. 급하게 전할 내용이 있어서 직접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멤버들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했다.
“우선 공연의 흥행이 잘된 점 축하드립니다. 조직위에서도 고무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간단한 축하 멘트를 던진 담당자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일은 9시, 메인 무대에서 공연을 하시게 될 겁니다.”
느닷없는 통보에 놀란 멤버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저희가 메인 무대에 선다고요?”
다혜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조금 전 조직위에서 결정한 겁니다.”
“와…….”
멤버들은 좋아서 소리를 지르려다 멈칫했다. 담당자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유가 궁금했다.
“무대 관계자의 평가와 관객의 호응도를 고려한 결정입니다. 축하합니다.”
담당자는 소식을 전하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그만큼 관계자들의 평가와 관객의 호응이 좋았다는 얘기다.
“와우! 하이파이브!”
멤버들은 그제야 손바닥을 부딪치며 좋아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좋던 분위기는 바로 곤두박질쳤다.
“자작곡은 있으시죠?”
“자작곡이요?”
“네.”
담당자가 느닷없이 자작곡을 물었다. 당연히 있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저흰 아직 자작곡이 없는데요.”
다혜가 뻘쭘하게 대답했다.
순간 담당자의 표정이 변했다.
“자작곡이 없으세요?”
“네, 아직은…….”
다혜가 말끝을 흐렸다.
“이거 난처한 상황이 발생했군요. 당연히 자작곡이 있는 줄 알고 결정했는데. 저희가 성급했나 봅니다.”
담당자는 조직위의 성급한 결정에 난감해했다.
“자작곡이 필요한 이유가 있나요?”“메인 무대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이 있는 뮤지션으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카피 밴드는…….”
담당자는 말끝을 흐리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남의 음악을 카피하는 밴드는 메인 무대에 설 자격이 없다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자작곡이 필요한 이유는 페스티벌에 참여한 뮤지션들의 공식 옴니버스 앨범인 ‘The Island’ 때문입니다.”“앨범도 발매하나요?”“네, 아일랜드 뮤직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음악으로 만드는 신비로운 섬 이미지를 부각하고, 참여 뮤지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기획한 앨범이에요. 앨범 수익금은 아이들에게 악기를 지원하는 단체인 ‘멜로디 키드’에 기부됩니다. 그래서 메인 무대에 서는 뮤지션은 자작곡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군요.”
다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담당자가 자작곡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할수록 다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이때 잠잠히 듣고 있던 수철이 앞으로 나섰다.
“하겠습니다.”
“네?”
“저희도 내일 공연에 자작곡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