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기획사 행렬
두 번째 연락 온 사람은 다름 아닌 트럼펫 연주자였다.
“수철 씨, 잘 쉬었어요?”“네, 저는 푹 쉬었어요. 교수님도 잘 쉬셨나요?”“네, 저도 푹 쉬었어요. 제가 전화한 건 교육 방송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출연 요청을 받았는데, 수철 씨가 피아노를 좀 쳐 줬으면 해서요.”
“피아노요?”
“네, 선배님께서 수철 씨가 피아노 실력이 출중하다고 칭찬을 많이 해서 같이해 보고 싶어요.”
어제까지 기타를 쳤었는데, 느닷없이 피아노를 부탁하는 걸 보면 박 대표가 무슨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잘 맞는다면 다음엔 더 좋은 제안을 할 수도 있어요.”
수철의 예상대로 트럼펫 연주자는 박 대표가 극찬한 수철의 피아노 실력이 궁금했다. 기타가 그 정도인데 피아노는 더하다는 얘기에 궁금증이 커졌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같이해 보고 실력이 좋으면 몇 달 후 잡혀 있는 뉴욕 공연까지 제안할 생각이었다.
“네, 좋아요. 해 볼게요.”
수철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유가 있었다. 연주가 마음에 들어서 같이 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앞으로 만들 곡에 세션으로 참여시키고 싶어서였다.
일종의 기브 앤 테이크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들에게 관악기에 관해서 설명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작은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하고요. 트럼펫뿐만이 아니라 다른 관악기도 연주할 계획이에요. 곡은 3곡 정도 할 예정인데, 2곡은 반주 정도면 충분하고요. 한 곡은 트럼펫과 피아노 임프로바이제이션(Improvisation) 형태로 진행할까 해요.”
마지막 한 곡에서 수철의 피아노 실력을 확인해 보겠다는 얘기였다.
“프로그램은 2주 후에 촬영이고요, 그전에 만나서 같이 한번 악기를 맞춰 보죠.”“네, 전 좋아요. 시간과 장소만 알려 주세요.”“그래요. 그럼 같이하는 거로 알고, 합주 시간을 정해서 다시 알려 줄게요.”
“네.”
수철은 섭외가 온 공연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트럼펫 연주자와 방송 출연을 먼저 하고 싶었다. 그만큼 그의 연주가 마음에 들었다.
전화를 끊고, 수철은 공연에 사용했던 기타를 꺼내 지판을 닦았다. 기타 줄도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공연이 끝났으니 박 대표에게 기타를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기타를 하드 케이스에 담아 들고 집을 나서는데, 또 전화가 진동했다.
“안녕하세요. ‘아뮤페’ 프로그램 담당자입니다.”
축제 조직위 프로그램 담당자의 전화였다.
“제가 두 달 후 제주도에서 열리는 축제의 감독을 맡게 됐습니다.”
두 달 후 열리는 축제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항공료에 숙박비 그리고 출연료까지 꽤 괜찮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수철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우선 잡힌 공연과 방송부터 먼저 하고, 남은 시간엔 무엇보다 곡 작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멤버들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하기에 바로 거절을 하진 않았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멤버들과 상의하고 전화드릴게요.”“네, 그럼 전화 기다리겠습니다.”
수철은 통화를 마친 후 기타를 들고 박 대표의 작업실로 향했다.
* * *
“쌤, 기타 잘 썼어요.”
수철은 감사함을 표하면서 박 대표에게 기타를 건넸다.
“마틴 기타 써 보니까 어때?”“좋았어요. 특히 찰랑거리는 스트로크 소리가 좋았어요.”“그게 마틴의 장점이지. 손가락은 안 아팠어?”“처음엔 좀 아팠는데, 금방 굳은살이 배겨서 괜찮았어요.”
박 대표는 수철이 내민 손가락을 보며 빙그레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너도 한 잔 줄까?”
“네, 주세요.”
박 대표는 커피 두 잔을 타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수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쌤, 오늘 전화를 3통이나 받았어요.”
수철은 웃으며 오늘 받은 전화를 박 대표에게 얘기했다.
“거봐, 내가 하고 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축하한다.”“감사합니다. 다 쌤 덕분이에요.”“내 덕분은, 다 네가 잘한 덕이지.”“아니에요,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합주실에 트럼펫 선생님까지…… 제가 피자랑 콜라 쏠게요.”“오케이, 그건 내가 거절 안 하지. 그런데 나도 너에게 맡길 일이 있어.”
“일이요?”
“그래, 편곡도 있고 작곡도 있어. 아마 네가 공연해서 받는 출연료보다 더 짭짤할 거야.”“얼마나 되는데요?”
“편곡은 프로그래밍까지 다 해서 200만 원, 작곡은 CM송이야. 기업 광고 음악이지. 금액은 아직 조율 중이지만 보컬 녹음까지 해서 300만 원쯤 될 거야.”“와, 진짜 많네요. 그런데 원래 쌤이 하시던 거 아니에요? 왜 저한테 주시려고요?”“편곡은 네가 잘하니까 너한테 맡기는 거고, 광고 음악은 내가 시간이 안 돼. 이번 달은 외부에서 일이 많아.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너한테 넘기는 거야.”
“진짜세요?”
“당연하지. 내가 널 위해서 양보할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 나도 배고픈 사람이야.”“감사합니다. 그런데 CM송은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는데요.”“걱정 마. 내가 레퍼런스 줄 테니까. 한번 들어 보면 금방 감 잡을 거야. 특히 넌 뭐, 그냥…… 암튼 쉬울 거야.”
수철은 갑자기 일이 많아져 좋으면서도 조금은 어리둥절했다. 박 대표는 그런 수철을 재미난 얼굴로 바라봤다. 농담까지 던졌다.
“너, 앞으로 바빠지면 스케줄 매니저 한 명 둬야겠다.”
박 대표의 말대로 3일간의 축제는 수철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수철은 이제 생활비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그전에 결정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오늘도 작업할 거야?”“아니요, 오늘은 가게 가서 청소 좀 하려고요. 사장님께 드릴 말씀도 있고요.”“그래, 그럼 내일 봐.”“네, 내일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 * *
수철은 오랜만에 도어스를 깨끗이 청소하고 사장을 기다렸다.
오후 늦게 나타난 사장은 수철이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오프닝 밴드 한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솔직히 네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정말 배신감 느꼈다.”
사장은 수철을 보자마자 축제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그동안 자기를 속인 수철에게 섭섭해했다.
“완전 프로 이상의 수준이던데? 언제 그렇게 연습을 한 거야?”
사장은 수철이 연습을 많이 해서 기타를 잘 친다고 생각했다.
“형님, 저 이제…….”
수철은 잠시 망설이다가 도어스를 떠나겠다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도어스는 수철에게는 집 같은 곳이다.
떠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계속 알바를 빠지는 게 너무 미안했다. 축제는 끝났지만 앞으로도 빠질 일이 많다. 그래서 결정을 해야만 했다.
“죄송해요.”
사장은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할 말 있다고 했을 때 예감했어.”
사장은 수철이 떠나겠다는 얘기를 할 줄 알고 있었다. 축제 공연 실황을 보는 순간 예감했었다. 뮤지션의 길이 열렸는데 알바를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쩝,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나도 음악 하는데 이해해야지.”
“고맙습니다.”
“내가 처음 볼 때 말했잖아, 너한테 뮤지션의 필이 흐르고 있다고.”
“네, 헤헤.”
“대신 알바생 구할 때까지는 계속해야 해.”“네, 그렇게 할게요.”
수철은 멋쩍게 웃었지만, 사장은 여전히 아쉬운 표정이었다.
“너, 잘나가도 여기 도어스 잊으면 안 돼!”“절대 잊을 수 없죠, 여긴 저한테 집 같은 곳인데요. 자주 놀러 올게요.”“그래, 언제든지 놀러 와. 여긴 항상 열려 있으니까.”
* * *
방송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잡지사 기자의 인터뷰 요청이 계속됐고, 공연 문의는 수철뿐만 아니라 다혜를 통해서도 이어졌다.
기획사에서도 찾아왔다. 명함을 주고 간 기획사는 수철이 연락이 없자, 직접 찾아왔다.
그것도 한 군데가 아닌 세 군데나 됐다.
“낮에 보니까 더 잘생겼네요.”
첫 번째 기획사는 흔한 작업 멘트로 말문을 열었다.
자신을 실장이라고 소개한 여성은 수철이 별 대꾸가 없자 딱딱한 분위기를 풀려고 가벼운 농담도 던졌다.
“수철 군은 시크한 눈빛까지 갖췄군요. 맘에 들어요, 요즘은 시크가 트렌드죠.”
그러고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오랫동안 준비한 아이돌 그룹을 띄울 건데, 거기에 수철 군이 합류하면 어떨까 생각해요. 이미 6명이 연습 중이에요. 메인 보컬도 있으니까, 수철 군은 랩과 춤 연습만 좀 하면 돼요. 물론 전문 트레이너가 붙어서 수철 군을 컨셉에 맞게 가르쳐 줄 거예요.”
그녀는 수철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자신의 말만 쭉 늘어놓았다.
수철은 그녀의 말이 귀에 거슬리고 듣기 불편했다. 하지만 별 대꾸 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수철의 눈치를 살피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물론 거기서도 작곡하고 악기 연주도 할 수 있어요. 힙합은 할 줄 알죠?”
“…….”
수철이 무뚝뚝한 얼굴로 대꾸가 없자, 그녀는 당황한 듯 말을 돌렸다.
“뭐, 큰 상관은 없어요. 수철 군 실력이면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금방 잘할 테니까. 그리고 수철 군의 비주얼이면 아이돌 좀 하다가 배우로 빠져도 되고, 길은 많아요.”
그녀의 얘기는 두서가 없었다. 수철의 외모와 악기 실력만 보고 막무가내로 찾아온 거 같았다. 그녀의 질문은 계속됐다.
“키는 어떻게 돼요? 노래 실력은? 춤은? 랩은?”
수철은 시큰둥한 얼굴로 짧게 대꾸했다.
“잘 모르겠어요. 안 해 봤어요.”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계속 수철이 아이돌을 해야 하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문득 궁금해진 수철이 물었다.
“미성년자는 어떻게 되는데요?”“보호자 동의가 있어야죠. 그건 왜 물어봐요? 수철 군, 20살 아니에요?”“아니요, 저 미성년자예요. 그리고 보호자도 없어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잠깐!”
수철이 일어서려는 데 그녀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나 같은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그 말에 수철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녀 같은 사람 또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잡은 손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가 급하게 내뱉었다.
“스타 되고 싶지 않아요?”
수철은 대꾸 없이 잠시 멀뚱히 쳐다보다 밖으로 나와 버렸다.
첫 번째 기획사는 수철의 마음을 끄는 데 실패했다. 수철의 오디션에서 첫 번째 기획사는 탈락했다.
* * *
두 번째 기획사는 첫 번째와는 달랐다. 수철도 들어 본 적이 있는 GN 엔터테인먼트였다.
그들은 축제 공연도 지켜봤다고 했다. 접근부터가 달랐다. 말에도 무게감이 있었다.
프로듀서와 팀장이라고 소개한 두 사람은 잠시 분위기를 푸는 인사를 나누고는 본론을 꺼냈다.
“어때요? 우리와 패밀리가 돼 보지 않겠어요?”
수철은 대꾸 없이 두 사람을 무뚝뚝하게 쳐다봤다. 그들이 얘기하는 패밀리가 뭔지 이해 못 했다. 이를 눈치챈 팀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패밀리 중에 발라드에선 민혁이 최고고, 힙합에선 TP가 요즘 제일 잘나가죠. 이번에 1위 한 ‘어서 덤벼’도 TP의 작품이예요.”
자신의 회사에 있는 유명 작곡자의 이름을 나열했다. 그들이 말한 패밀리는 작곡가 그룹을 말하는 것이었다. 수철에게 그 그룹에 들어와서 가족처럼 지내자는 말이었다.
“소속 가수와 아이돌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거예요. 궁금하면 인터넷 찾아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
수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굳이 찾아볼 생각은 없었다.
“상상해 봐요. 수철 군이 만든 힙합이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모습을, 수철 군이 만든 힙합 리듬에 맞춰 사람들이 춤추고 있는 걸 상상하면 정말 신나지 않아요?”
그들도 장르를 힙합으로 한정 지어서 얘기했다. 팀장은 자신이 힙합 작곡자라도 된 듯이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
수철이 대꾸가 없자, 그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제안을 했다.
“작곡가가 싫으면 다른 길도 있어요. 노래가 되면 싱어송라이터를 해도 되고, 수철 군은 비주얼이 되니까 아이돌 좀 하다가 연기를 해도 되요. 회사에 유명한 연기 선생님이 계시니까 레슨은 거기서 받으면 되고. 수철 군은 들어오기만 하면 길은 여러 갈래야.”
결국 두 번째도 첫 번째 기획사와 별 차이가 없었다. 수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들의 말은 달콤했지만, 수철의 마음은 답답했다.
수철은 그들의 마네킹이 될 생각은 없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수철은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음악을 다 하고 싶었다. 그런데 기획사에선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가 제안하는 컨셉에 맞게 음악을 만들고, 히트곡을 찍어 내고, 회사가 정해 주는 음악을 해야 하고.
수철은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자꾸 연락이 와서 만나기는 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기획사는 없다는 걸 확인했다.
* * *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흥미로운 기획사가 등장했다.
그는 수철을 보자마자 잘 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