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잔고가 늘다.
“미친 피아노에 미친 기타까지, 수철 씨는 정말 재미난 사람이에요.”
“네?”
수철은 자신을 빤히 보며 잘 안다는 듯이 얘기하는 사내가 불편했다. 초면인데 예의가 없었다.
이를 눈치챈 사내가 바로 표정을 바꿨다.
“하하, 미안해요. 볼 때마다 놀라서 그래요.”
‘볼 때마다?’
수철은 다시 한번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내를 만난 기억이 없다. 얼굴도 낯설다.
‘누구지?’
사내는 그런 수철의 표정을 읽었는지 빙그레 웃었다.
“아무리 그렇게 봐도 날 기억하진 못할 거예요. 우리가 직접 만나서 인사를 한 적은 없으니까요.”“그런데 절 어떻게?”
사내는 의아해하는 수철과 눈을 마주쳤다.
“2년 전, 낙원상가.”
“2년 전, 낙원상가? 아……!”
수철은 뒤늦게 낙원상가에서 피아노를 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도 현장에 있었어요. 정말 대단한 연주였죠.”
그제야 사내가 아는 척한 이유를 알았다.
사내는 바로 몇 년 전 낙원상가에서 수철의 피아노 연주를 지켜봤던 문해준 밴드의 실장이었다.
그날 수철에게 눈독을 들인 그는 수철을 찾으려고 수소문하며 애를 썼지만 끝내 찾지 못했었다.
그러다 축제 때 기타 치는 모습을 발견하고, 바로 컨택을 해 온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수철의 존재가 궁금해했었다고 한다. 보자마자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만날 사람은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그는 수철과의 만남을 운명으로 엮었다.
“저는 축제 때 수철 씨를 보자마자 알아봤어요. 낙원상가 음악 괴물이 이번엔 축제에 출현했다는 것을!”
“네?”
“하하, 미안해요. 우리끼리 수철 씨를 음악 괴물이라고 불렀거든요. 암튼 수철 씨를 보자마자 반가워서 껴안고 싶을 정도였어요. 하하.”
“아, 네.”
“명함을 주고 전화를 기다렸는데, 연락이 없어서 좀 섭섭했죠.”
실장은 낙원상가에 찍힌 CCTV를 많이 봐서인지 수철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수철을 바라봤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다 생략하고, 그냥 우리 회사에 들어와요. 수철 씨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줄게요. 유학이면 유학, 스타가 되고 싶으면 스타로 만들어 줄 거고, 클래식이 하고 싶다면 그쪽으로 밀어줄게요.”
실장은 수철에게 완전히 꽂혀 있었다. 뭐든 수철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겠다는 거였다. 백지수표라도 던질 기세였다.
“들어오기만 해요. 팍팍 밀어줄 테니까.”
말을 하면서 실장은 눈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알아 달라는 거였다.
수철은 계속되는 연락이 불편해서 거절할 생각으로 만났었는데, 실장의 적극적인 어필이 조금은 솔깃했다.
다른 기획사들처럼 무엇을 하라는 요구 사항도 없고, 불편한 질문도 없었다.
클래식까지 밀어주겠다는 것을 보면 음악 장르를 제약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냥 몸만 오면 어떤 것이든 다 해 주겠다는 것이다.
“음…….”
수철은 앨범 한 장 정도는 같이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답은 다른 기획사와 똑같이 했다. 생각할 시간을 갖겠다는 거였다.
“좀 더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그래요, 충분히 생각해 봐요. 2년 기다렸는데, 몇 달을 더 못 기다릴까? 시간 걱정 말고 편하게 생각하고 연락 줘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 결정 기다릴게요.”
실장은 끝까지 수철에게 자신의 마음을 어필했다.
* * *
“거긴 아니야.”
수철의 얘기를 들은 박 대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아마 이 실장이지?”
박 대표는 문해준 밴드의 실장을 알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나 본데, 그래도 그렇지 책임 못 질 말을 하면 안 되지. 그 사람이 허풍이 좀 심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박 대표는 이 실장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번째 회사를 좋게 말했다.
“GN 엔터 정도면 괜찮지. 자본력도 탄탄하고, 사장 마인드도 좋은 편이야. 성과도 많이 냈고. 넌 잘 모르겠지만 곧 상장도 하는 회사야.”
박 대표는 수철의 생각과 달랐다. 사람보다는 회사를 얘기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암튼 이 실장의 회사는 비추천이야. 자본력도 약하고 무엇보다 문해준 밴드가 무너지면 끝나는 구조야. 거기는 잊어버려.”
박 대표는 수철의 얼굴을 잠시 살핀 뒤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딸랑 앨범 한 장만 계약하는 회사는 없어. 적어도 3장이고, 기본 5년이야. 그것도 가수에 한해서 말이야. 작곡자는 기본 10년 이상 묶어 놓으려고 해.”
“아, 몰랐어요.”
수철은 몰랐던 사실이다. 10년이나 묶여 있다니, 말만 들어도 끔찍했다.
“기획사는 앞으로 많이 만날 수 있어. 지금 네가 만난 회사들보다 훨씬 탄탄하고, 외국에 지사를 가진 회사도 많아. 해외 진출도 가능하다는 얘기지. 너는 때가 되면 그런 회사랑 같이 일할 수 있으니 조급하게 결정하지 마.”
“네.”
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쌤이라 부르다 보니 박 대표가 기획사 대표라는 걸 까먹고 있었다.
“넌 분명 한국을 떠나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때가 올 거야. 여긴 네가 재능을 펼치기엔 너무 작은 곳이야. 그때가 되면 내가 좋은 회사를 소개해 줄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 선택을 하는 게 우선이야.”
“네.”
박 대표는 수철의 미래를 보기라도 한 듯 확신에 차 얘기했다. 수철은 외국에 가지는 않더라도 외국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든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번 더 얘기하면, 잘 모르고 덥석 계약했다가 나중에 불화가 생기면 음악도 못 하고 계약이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 해. 잘못하면 손해배상도 하는 상황이 벌어져. 특히 수철이, 너 같은 스타일은 그럴 확률이 높아. 부딪칠 확률 말이야.”“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수철은 박 대표의 말에 공감했다. 자신이 그런 상황에 부딪치는 걸 상상도 하기 싫다. 묶여 있고 갇혀 있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녀석, 인정은 빠르네. 암튼 아직 어린 너에게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이 바닥엔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이 많아. 그러니까 잘 모르겠으면 나한테 먼저 물어봐.”
“네.”
박 대표는 수철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게 많은지 꼰대처럼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기획사랑 계약하는 가장 큰 이유가 회사가 가진 홍보력으로 자신의 재능을 알리고 싶어서인데, 너 같은 경우는 그럴 필요가 없어. 가만히 있어도 계속 알려질 테니까. 나중이 되면 기획사는 네 매니저 역할만 해 주면 될 거야. 어차피 넌 기획사의 힘이 아니라 네 힘으로 클 테니까.”
“네.”
해프닝은 있었지만 어쨌든 이번 기회에 기획사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다.
“앞으로 이런 일은 더 자주 벌어질 거야. 갈수록 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까.”“기획사 사람들은 인제 그만 만날래요. 앨범은 그냥 제힘으로 내면 되죠.”“그래, 그게 편할 거야.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렇게 해 봐.”
“네.”
수철은 아쉽기는 하지만 기획사는 접기로 했다. 앨범 한 장 내려고 10년을 묶여 있고 싶지는 않다.
박 대표는 이런 수철의 아쉬움을 아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기회는 계속 생길 거야. 벌써 많은 사람이 너에 대해서 떠들고 있고.”“저에 대해서 떠든다고요?”“너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말이야.”
“누가요?”
“그건 때가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우선은 네가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가 중요해. 사람들이 뭐라 하든 넌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면 돼.”“음, 저는 우선 쌤이 주신 편곡이랑 작곡을 먼저 하고 싶어요. 그러면서 제 곡도 만들고 싶고요. 공연은 제가 빠지면 안 되니까 같이할 생각이고요. 트럼펫 선생님과 방송을 하기로 했으니까, 그것도 할 생각이에요.”
수철은 박 대표가 선택하라는 말에 자신의 생각을 쭉 얘기했다. 박 대표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공연과 방송은 그때그때 하면 되니까 문제 될 건 없고, 넌 작곡을 해서 네 앨범을 우선 하고 싶은 거네?”“네, 맞아요. 그리고.”
수철은 뜸을 들이며 박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뭐?”
“앨범 제작도 배우고 싶어요. 쌤이 가르쳐 주시면요.”“제작까지? 하하, 욕심도 많네, 수철아, 너 이제 고작 19살인데 제작까지 배우겠다고? 아직 네가 경험할 재미난 게 많아. 제작은 피곤한 일이야.”“그래도 제가 만든 음악을 앨범까지 스스로 제작해 보고 싶어요. 쌤이 안 가르쳐 주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헐, 이 녀석 이제 날 자극까지 하네? 너 이러다 몇 년 지나면 날 갖고 놀겠다.”
“헤…….”
“알았어.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진행하고, 그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 보자.”
“네.”
* * *
삐삐삐삐. 삐. 찰칵!
다음 날부터 수철의 이중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낮에는 작업실에서 박 대표가 맡긴 편곡과 CM송 작업을 했고, 저녁에는 새로운 알바생이 들어올 때까지 도어스에서 알바를 했다.
박 대표가 바빠서 작업실을 비울 때에도 수철은 혼자서 계속 작업을 했다. 그 결과, 편곡과 CM송 작곡을 3일 만에 끝냈다. 3일 만에 500만 원을 번 것이다. 아직 보컬 녹음이 남아 있지만 그건 스케줄에 맞춰 진행하면 되는 거였다.
박 대표가 준 일을 마무리하고 수철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일주일 만에 5곡을 마무리 지었다.
“야, 너 좀 무섭다.”
박 대표가 혀를 내둘렀다. 수철은 매번 박 대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젠 놀라움을 넘어 무섭다고 했다.
“그래서 며칠 만에 앨범 한 장을 뚝딱 다 한 거야”“아직 두 곡 남았어요. 좀 더 생각하고 만들려고요. 그리고 5곡도 이제 스케치 정도 한 거예요.”“스케치가 아니고 거의 파이널이던데?”“여기까지 하고 생각날 때마다 다듬으려고요.”“그래서 앨범은 언제 내려고?”“아직 멀었어요. 쌤이 앨범을 제작하는 법을 알려 주면 그때 내려고요. 헤헤.”“너, 묘하게 사람 엮는 재주까지 있네? 기획사 사장해도 잘하겠다.”
“헤…….”
수철은 작업하면서 축제에서 기획한 자선단체 기부 앨범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앨범은 명목상일 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그것보다는 시청 앞 공연이 좋았다. 관객들의 호응도 좋았고, 그 공연을 본 관계자들의 요청으로 다음 공연까지 연결됐다.
“우후, 예에~!”
멤버들은 기분이 찢어지라 좋아했다. 스타라도 된 듯이 그동안 연습한 사인을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공연을 한번 할 때마다 한 달 알바비가 뚝딱 들어왔다. 연예인들이 행사에 목매는 이유를 알았다.
수철은 무엇보다 통장에 잔고가 늘어가는 것이 좋았다. 이렇게 몇 달 지나면 작업실도 차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축제에서 관계자에게 솔깃한 얘기를 들은 편집장은 수철에 관한 정보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수소문을 해서 수철이 다녔던 고등학교를 알아냈다. 담임을 찾아갔다.
“무슨 일로 그러세요? 졸업생에 관한 정보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오랜만에 고등학교를 오니까, 저도 학창 시절 담임 선생님이 생각나네요. 고마우신 분이었는데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어요. 선생님을 뵈니까 더 생각납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담뱃값이라도 하세요.”
편집장은 경계심을 드러내는 담임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선생은 몇 번 거절하다가 주위를 한 번 살피고는 받아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