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새로운 시작
순간, 연주자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미친 재능을 가진 청년이 피아노엔 관심이 없다는 투로 말한다.
수철의 답변이 너무 명확해서 다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 그래요? 그런데 작곡 쪽으로 간다고 해도 한번 배워 봐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피아노 연주자도 작곡은 하는데……. 허허.”
연주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수철은 그런 그를 무뚝뚝하게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연주자도 음악이 있어야 연주를 하잖아요. 저는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그건…….”
연주자는 하려던 말을 멈췄다. 잘못하다간 자신과 수철의 관계가 어색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얘기는 이쯤에서 접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미안해요, 내가 괜한 간섭을 했군요. 사과할게요.”“아니에요. 저는 선생님과 같이 연주하는 게 좋아요. 설마, 제가 손 모양이 안 좋아서 벌써 잘린 건 아니죠?”“네? 그럴 리가요, 저는 수철 씨가 저를 자를까 봐 걱정했는데요. 휴…….”
연주자는 보란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다시는 테크닉 얘기를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 달 뒤 뉴욕 공연에도 수철 씨랑 같이 가고 싶은데, 수철 씨 생각은 어때요?”“와, 저도 좋아요. 외국은 한 번도 안 가 봤거든요.”“하하, 그렇군요. 우리나라와는 분위기가 또 달라요. 음악가에 대한 존중이 대단하죠. 수철 씨한테도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알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손 모양 연습 많이 할게요.”“허, 내가 괜한 말을 해서 상처가 됐군요. 미안해요.”“아니에요. 저는 상처 같은 거 잘 안 받아요.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네요. 좋은 성격이에요, 뮤지션에겐 필요한 성격이죠. 그러고 보니 수철 씨는 재능에 성격까지, 최고의 컨디션을 다 갖췄네요. 하하.”
“한 가지 빼고요.”
“한 가지?”
“손 모양이요.”
“허, 수철 씨. 상처 안 받는다더니.”“죄송해요. 제가 이런 장난을 좋아해서요. 헤…….”
수철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과하며 헤죽 웃었다. 트럼펫 연주자는 그런 수철을 가벼운 미소로 바라봤다.
“수철 씨는 볼수록 재밌는 사람이에요. 암튼, 뉴욕 공연은 수철 씨가 같이 하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
“네.”
“그리고 뉴욕 공연 끝나면 영국과 호주에서도 공연할 예정이에요. 혹시 모르니까 참고하세요.”“와! 모두 제가 가 보고 싶은 나라예요. 꼭 갈게요.”
수철은 며칠 뒤, 방송 출연료가 적힌 바우처(Voucher)를 보고 놀랐다.
“이거, 실화야?”
금액이 너무 적었다. 도어스 알바비와 차이가 없었다. 방송은 친분이 아니면 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 이럴 수가. 한참 좋았는데.”“그러게 말이야.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는데.”
멤버들의 얼굴에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쏘리, 맨.”
마이클이 기획사와 계약을 했다. 그래서 팀을 떠나게 됐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빠를 줄은 몰랐다. 멤버들은 당황하고 실망했다.
“헤이, 얼굴 펴, 맨. 어쩔 수 없잖아? 좋은 기회인데 놓치고 싶지가 않았어. 앨범 녹음도 하와이에서 할 거래. 쿨~ 맨! 하와이 멋지지 않아? 너희도 놀러 와.”
마이클은 미안해하면서도 기뻐했다.
아무도 마이클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마이클이 떠나면 ‘컬러풀 SA’의 생명도 끝난다는 게 문제였다.
한참 잘나가며 돈을 벌고 있는 상황에서 멤버들은 충격을 받았다. 가난한 뮤지션이 몇 번 돈맛을 봤으니 실망감이 큰 건 당연했다.
“딱 세 번만 더하면 진짜 하와이도 놀러 갈 수 있는데…….”
공연에서 번 돈으로 동남아 배낭여행을 갔다 온 드러머의 얼굴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수철은 마이클을 축하해 줬다.
“야, 마이클. 축하해. 얼른 잘나가서 더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
수철의 농담에 마이클은 씨익 웃었다. 고마우면서도 아쉬워하는 미소였다.
“요~ 맨! 넌 역시 쿨해. 헤이, 브라더! 하이파이브 한번 해.”
마이클은 멤버들의 실망은 외면한 채 자신의 기쁨을 마음껏 드러냈다. 수철도 괜한 위로보다는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초청 공연은 5번에 그쳤다. 모두 500만 원씩을 번 것이다. 아직 하나가 남아 있지만 그다음은 불투명하다.
“쩝, 어쨌든 축하해.”
“그래, 나도.”
멤버들도 한둘씩 마이클의 계약을 축하했다. 표정은 안 좋지만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한다고 바뀔 상황도 아니었다.
“마이클, 나중에 세션 필요하면 우리 불러야 해.”“오케이, 내가 매니저한테 얘기할게.”
다혜도 아쉬워하면서 축하해 줬다.
한참 밴드의 인기가 올라가서 팬클럽까지 생기려던 때여서 다혜의 아쉬움은 더 컸다.
“어디서 제2의 마이클을 구해 올 수도 없고.”
마이클은 그만큼 희귀한 존재였다. 기획사에서 달라붙는 건 당연했다. 똘끼가 넘치니 어디 내놔도 돈이 될 거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아쉽게도 ‘컬러풀 SA’의 수명은 여기까지였다.
“밴드 쫑파티 겸 마이클 송별회는 마지막 공연 끝나고 하자.”
멤버들은 마지막 공연을 마무리 짓고 파티를 하자며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마이클이 빠진 영향력은 바로 다음 날부터 드러났다.
“결국 그렇게 됐군요. 잘 알겠습니다. 다음에 좋은 공연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곤 연락이 없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섭외 요청은 하루아침에 뚝 끊어졌다. 마이클이 떠난 ‘컬러풀 SA’는 공연 기획자들에게 메리트가 없었다. 그만큼 마이클의 이미지가 강했다. 진짜 마이클을 불러오지 않는 이상 대체가 불가능했다.
축제 프로젝트 밴드는 마지막 한 번의 공연을 남겨 둔 채 아쉽게도 이렇게 끝이 났다.
멤버들은 축제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멤버들과 달리 수철은 계속 일이 있었다. 박 대표가 소개해 준 편곡 작업도 계속 이어졌고, 음향 엔지니어의 소개로 신인 가수 앨범에 세션으로도 참여했다.
“모두 잘하시는 선수들이시니까 한 방에 갈게요.”
“네.”
“3곡이니까 시간도 한 프로면 충분할 거라 생각해요.”
“네.”
각자의 악기를 들고 모인 세션맨 아저씨들은 기획사 실장의 얘기에 군말 없이 대답했다.
유일하게 수철만 젊은 청년이었다.
매니저의 얘기가 끝나자 녹음실 엔지니어가 말을 이었다.
“전자 기타는 밖에서 라인으로 받을 거고요, 나머지 분들은 부스 안에서 연주하시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엔지니어의 말에 아저씨들이 각자의 악기를 들고 우르르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실장이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는 신인 가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준비됐어?”
“네.”
“목은 다 풀었고?”
“네.”
“긴장하지 말고 불러. 어차피 지금은 가이드고, 보컬 녹음은 나중에 따로 할 거니까.”“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래, 파이팅.”
실장은 첫 녹음에 긴장하고 있는 신인 가수에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자, 그럼 시작할게요. 헤드폰에 메트로놈 드릴 테니까, 맞춰서 시작하면 돼요.”
부스 안에서 헤드폰을 쓰고 있는 아저씨들은 엔지니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도 콘트롤 룸에서 일렉 기타를 들고 앉아서 헤드폰을 썼다.
―똑. 딱. 똑. 딱.
“네가 떠나고 나서야, 난! 너의 소중함을 알았어~!”
반주가 시작되자 신인 가수는 감성에 젖은 눈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노래를 시작했다.
음악은 3곡 모두 흔한 발라드였다. 아저씨 세션맨들은 이런 음악이 익숙한지 쉽게 반주를 이어갔다. 수철도 아저씨들처럼 튀지 않고 반주를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수철은 점점 답답해졌다. 이런 음악에 일렉 기타가 왜 필요한지도 이해가 안 됐다. 그냥 피아노와 보컬로만 가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떠나기 전에 소중함을 알지 그랬어?’
열창하는 가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재미도 없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소개로 온 자리기에 말없이 적당하게 반주를 했지만 두 번 다시 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지 않은 연주를 하는 건 곤욕이었다. 앨범 세션은 수철과 맞지 않았다.
“수고했어요.”
“네, 실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사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세션맨 아저씨들은 녹음이 끝나자 앞다투어 실장과 엔지니어에게 인사를 했다. 다음에도 일거리가 있으면 또 불러 달라는 뜻이었다.
“젊은 친구가 기타 실력이 대단하군요. 언제 그렇게 실력을 키웠어요?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인사나 하고 지냅시다.”
실장이 준 세션비를 받아 들고 흡족한 얼굴로 밖에 나온 아저씨들은 수철에게 말을 걸었다.
기타를 친 것도 없는데 수철을 칭찬하며 손을 내밀었다. 수철도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저는 부탁으로 한번 녹음하러 온 거예요. 계속 세션을 할 건 아니라서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얼른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 * *
‘컬러풀 SA’의 마지막 공연은 경기도의 한 호수 공원에서 펼쳐졌다.
“와! 사랑해요! 컬러풀 SA!”
마지막 공연인 줄 모르는 관객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휴대전화에 불빛을 켜서 흔들기까지 했다.
‘You are Not Alone’을 부른 땐 모두 불빛을 흔들며 같이 따라 불렀다.
멤버들은 가슴이 뭉클했다.
“오늘 무대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해요!”
마이클은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어 보이며 마지막 멘트를 마쳤다.
‘컬러풀 SA’의 마지막 무대는 이렇게 끝이 났다. 아름다운 호수 공원에서 막을 내렸다.
“그동안 우리 참 대단했어.”“맞아, 오래 기억에 남을 거야.”
늦은 시각, 밴드의 해산식 겸 마이클의 환송회를 위한 파티가 시작됐다.
멤버들은 그간 있었던 에피소드를 나누며 생맥주 잔을 기울였다.
“비록, 컬러풀 SA는 이렇게 끝났지만 그래도 뮤지션의 삶은 계속된다. 건배!”“건배! 마이클, 잘살아! 꼭 성공해서 우릴 기억해 줘! 리벰버 미!”“돈 워리, 맨! 치얼스!”
모두 잔을 부딪치며 맥주를 들이마셨다. 그동안 열심히 한 서로를 칭찬하며 짧은 추억을 얘기했다. 모두 그렇게 컬러풀 SA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와! 저것 좀 봐!”
물끄러미 TV를 쳐다보던 드러머가 손가락을 뻗었다.
TV에서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있었다.
[글로벌 슈퍼 뮤지션 발굴 프로그램. 내가 슈퍼스타다! 이곳에서 음악 재능의 끝을 보여 주세요.]
광고와 함께 성우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신인 뮤지션을 발굴하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내가 슈퍼스타다!’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우승 상금 10억이 걸린 스타 뮤지션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은…….
“1등 10억?”
“컥, 10억?”
멤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0억이면 동그라미가 몇 개야?”“10억이면 평생 놀고먹겠다.”
커다랗게 실린 광고와 성우가 떠드는 카피 문구에 꽂혔다.
하지만 멤버들과 달리 수철의 시선을 끈 건, 맨 아래 적힌 작은 문구였다.
[본선 진출자에 한하여 자작곡에 가산점 부여함.]
자작곡을 노출해 음원 수익을 올리겠다는 기획자의 의도 같았다.
수철은 자작곡이란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자기가 만든 음악을 선보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앨범을 발매하지 않고도 많은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지난번 곡은 아쉬움이 많았다. 보컬 없이 트럼펫으로만 연주했고, 그마저도 마이클의 댄스에 묻혀 버렸다.
오디션에 참가해 방송을 타면 많은 사람에게 음악을 평가받을 수 있다. 게다가 축제 하나 하고도 이렇게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오디션까지 하고 나면 사진에서나 보던 멋진 작업실을 꾸밀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좋은 장비와 악기를 갖춘 자신만의 작업실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나가지?’
수철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때 드러머가 손가락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우리도 저기 나가자!”“그래, 그러자! 이제 할 일도 없는데 잘됐다.”“수철아, 네 생각은 어때?”
TV를 보던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수철에게 쏠렸다.
“뭐? 왜? 또 밴드를 하자고?”“싫어? 우릴 버릴 생각이야?”“버리긴 뭘 버려? 각자 길을 가는 거지.”
“각자의 길?”
“암튼 난 밴드는 안 해. 기타도 그만 칠 거야. 손가락 아파. 그리고 음악은 의리로 하는 거 아니라고 쌤이 그랬어.”“헐, 오디션에 나갈 생각은 있고?”“나가더라도 이렇게는 아니야. 새 술은 새 부대에. 몰라?”“새 술? 새 부대? 밴드 아니면 뭐 할 건데? 이번엔 네가 노래할 거야?”
“노래는 안 해.”
“그럼 뭐로 나갈 건데? 밴드 아니면 가수, 둘 중 하나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 연주자를 뽑는 것도 아니고, 작곡가는 더더군다나 아니고.”“그건 생각해 봐야지.”
이때 가만히 듣고 있던 다혜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나가긴 나갈 거라는 얘기네? 우릴 버리고?”“그렇게 보지 마, 다 버린다는 말은 아니니까.”
“……다?”
수철의 말에 다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