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실장은 장 피디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문해준을 수철의 심사 위원으로 세워서 돌출 영상을 기대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수철은 자신의 회사로 끌어들이려 했던 뮤지션이다. 그것도 열 받는데 잘못하다간 적대자가 되게 생겼으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고. 짜증 나네.”
이미 하기로 한 상황이라 갑자기 꼬리 내리고 도망갔느니 하는 뒷말은 듣기 싫었다.
“형, 이제 도착할 때 다됐는데 무슨 그런 얘기를 해요. 일찍 왔으니까 얼굴도장 찍고, 근처에서 맛있는 거나 먹자고요.”
잠자코 뒷좌석에 앉아 있던 문해준이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디 놈 잔머리 굴리는 게 짜증 나서 그렇지. 이놈들은 대체 인격이란 게 없는 놈들이야.”“형, 걱정 마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심사 하나 하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걱정하는 거 아냐. 열 받아서 그러는 거지.”
문해준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심사 위원석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계속 멘트를 생각했다. 다양한 생각이 오갔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무조건 칭찬. 환호하고 감동하고 다시 칭찬.
상황을 봐서 기립 박수도 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장 모르게 뒷좌석에서 표정 연습도 살짝 했다.
“벌써 다 왔네.”
차는 경기도의 한 리조트에 들어섰다. 숲속에 있는 리조트는 주위 풍경이 아름다웠다. 차에서 내린 실장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래도 밖에 나오니까 공기가 좋다. 으자자!”
차에서 내린 실장과 문해준은 번갈아 기지개를 쭉 켰다.
* * *
마지막 예선까지 통과한 100여 팀의 솔로와 그룹은 서울의 한 체육관에 모여 방송국에서 준비한 대형 버스 4개에 나눠 탔다.
본격적인 본선이 벌어지는 경기도의 리조트로 가기 위해서였다.
버스에 오른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소풍을 가는 아이처럼 싱글벙글 좋아서 연신 웃고 있는 사람, 긴장해서 몸이 굳어 있는 사람, 자신은 꼭 최종까지 오르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사람,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도 보였다.
이 중에 수철, 다혜, 은주의 모습도 보였다.
“넌 긴장 같은 거 안 되지?”
다혜가 몸을 기울이며 수철에게 물었다.
“무슨 긴장?”
수철이 되묻자, 다혜는 아니라며 손을 휘저었다. 다혜의 옆에 앉은 은주는 창문에 입김을 불어 글씨를 새기고 있었다.
‘얘들아, 언니 잘 갔다 올게.’
버스 창밖에는 참가자들을 응원하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보였다.
버스가 출발하려 하자 이들은 따라 움직이며 손을 흔들었다. 파이팅을 외쳤다.
많은 이들의 염원을 실은 버스는 출발 한 시간 만에 경기도의 한 리조트에 들어섰다. 리조트엔 스키장도 보이고, 방문자들을 위한 갖가지 위락 시설도 눈에 띄었다.
[‘내가 슈퍼스타다!’ 참가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리조트 입구에는 스텝들이 걸어 놓은 현수막과 본선 진출자들을 환영하는 리조트의 현수막이 동시에 걸려서 버스에서 내리는 이들을 반겼다.
“이제 실감 나네.”
차에서 내린 참가자들의 얼굴이 조금씩 상기되기 시작했다. 리조트 앞 넓은 잔디에는 유명 가수의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무대들이 세워져 있고, 음향 장비와 영상 장비도 세팅이 되어 있었다.
스텝들은 그 앞을 분주히 움직이며 오늘 벌어질 일정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와, 좋다.”
배정받은 방의 문을 열어본 참가자들은 좋아서 입이 벌어졌다. 오성급 호텔 같았다.
“아자, 파이팅.”
참가자 중 몇몇은 가볍게 파이팅을 외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철과 다혜, 은주는 무엇보다 리조트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호수도 있고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가 있어서 좋았다.
“여기 진짜 마음에 든다. 나중에 다시 와서 음악 작업해야겠다.”
“나도.”
수철의 말에 다혜도 동의했다. 와이 트리오 멤버들은 잠시 밖을 거닐었다.
“저기 봐!”
참가자들이 방 창문에 붙어 밖에 경치를 보며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소풍을 온 듯 즐거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여유로움도 잠시, 곧바로 경선이 시작됐다.
“한 시간 후에 바로 시작할 거니까, 모두 준비해서 나오세요.”
본격적인 본선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다시 경쟁 모드로 바뀌었다. 현장에 나타난 심사 위원들도 예선 때와는 달랐다.
기획사 대표도 있었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 가수도 있었다.
“마지막엔 박 군과 양 군도 나온다던데?”“나도 그 사람들한테 평가받아 보고 싶다.”
참가자들은 뒤로 갈수록 더 유명한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농담 삼아 그들의 이름을 말하면서 평가받고 싶다는 말을 했다. 최종 후보에 들고 싶다는 뜻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27번…….”
첫날부터 바로 경쟁이 시작됐다. 잠시 풀어졌던 얼굴은 다시 긴장된 얼굴로 바뀌었다. 모두 입을 꽉 다물었다.
* * *
문해준은 근처 맛집을 찾아서 실장과 같이 점심을 먹고 무대 앞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오랜만이야. 반가워. 잘 지내지?”
이미 도착한 선후배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정해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세팅이 끝난 무대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시빗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설마 덤벼들기야 하겠어?’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픽 웃음이 났다. 신출내기 참가자 한 명 때문에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승미 누나가 참교육 당했다고 나까지 쫄 필요는 없지. 승미 누나보다는 아무래도 내가…….’
이승미보다는 자신이 락에 대해선 한 수 위라는 생각을 했다.
“안녕하세요, 와이 트리오입니다.”
몇 명의 참가자가 지나가고 드디어 ‘와이 트리오’가 등장했다.
“지난 심사 위원들의 칭찬이 대단하더군요.”
“감사합니다.”
“셋은 친구들인가요?”“네, 다 동갑내기 친구들이에요.”“그렇군요, 오늘도 멋진 음악 기대할게요.”
와이 트리오는 다른 심사 위원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바로 음악을 시작했다. 문해준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런데,
‘어랏? 락이 아니네?’
건반의 오르간으로 시작한 멜로디는 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쿵 짝! 쿵 짝!
약한 박자에 힘을 준 리듬은 성인가요처럼 들렸다.
‘뭐지?’
곧이어 수철의 퍼커션이 건반의 리듬을 파고들었다. 그제야 문해준은 장르를 눈치챘다.
‘레게!’
문해준의 시선이 수철에게 고정됐다.
와이 트리오가 들고나온 음악은 밥 말리(Bob Marley)의 ‘No woman No cry’였다.
‘허…….’
헛웃음이 나오며 잔뜩 모여 있던 문해준의 미간이 스르르 펴졌다. 곧이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허, 이 녀석 봐라?’
긴장했던 자세는 금세 풀어져서 탁자 밑으로 두 다리를 쭈욱 뻗었다.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은주는 지난번과 다른 모습으로 탬버린을 치고 몸을 흔들며, 레게 필을 듬뿍 담아 노래했다. 머리엔 레게를 상징하는 머리핀도 꽂고 있었다.
문해준의 긴장은 완전히 풀렸다. 머리를 끄덕이며 음악 감상 모드로 바뀌었다.
밥 말리는 레게 뮤지션뿐만이 아니라, 모든 뮤지션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를 음악의 혁명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음악을 들으면서 문해준은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했던 피디의 썩은 미소가 떠올랐다.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마 피디도 뒤늦게 알았을 것이다, 와이 트리오가 레게를 할 것이라는 것을.
‘이야, 잘생겼네.’
적대자로 생각했던 용수철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러면서 몇 년 전 낙원상가에서 피아노 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거기서도 사람 놀라게 하더니, 오늘도 한 방 제대로 먹었네, 낄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긴장이 풀린 건 문해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3명의 심사 위원도 비슷했다. 어깨춤까지 추며 레게 리듬을 즐기고 있었다.
대기실에서도 밥 말리를 아는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레게 리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간만에 경쟁이 주는 긴장감에서 벗어난 분위기였다.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말하는 후렴구가 계속 반복됐다. 그러자 심사 위원 중 몇몇은 나지막이 따라 불렀다.
특별하게 튀지 않는 와이 트리오의 본선 첫 무대는 그렇게 끝이 났다. 예상을 뒤엎은 와이 트리오의 무대에 심사 위원들은 놀라기보단 좋아했다.
음악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들이 문해준이 질문을 던졌다.
“레게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모두가 궁금한 물음이었다.
“좋아서요.”
은주는 심플하게 답했다.
“그렇죠, 레게 좋죠. 레게만의 매력을 저도 좋아해요. 특히나 밥 말리는 많은 사람들의 우상이죠.”
“네.”
“그런데 밥 말리의 많은 곡 중에 특별히 이 곡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문해준의 질문이 길어지자, 은주가 마이크를 수철에게 넘겼다. 수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이후로도 문해준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밥 말리 음악 중에 가장 유명한 곡이라서 한 건가요? 아니면 이 곡을 선택한 다른 이유가 있나요? 이전과는 다르게 특별히 편곡에 변화를 준 것 같지 않아서 물어보는 거예요.”
수철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오디션에 참석했다가 탈락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곡이에요.”“탈락한 사람들이요?”
문해준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몸을 움찔했다.
“본선에 오지 못하고 탈락한 사람들과 또 오늘 떨어질 사람들에게 바치는 음악이에요.”“아, 그렇군요. 뭔가 심오한 뜻이 있었군요.”“심오하기보다는 오디션에 떨어졌다고 음악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힘내라고요. 원하는 음악을 계속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선택했어요. 우리도 곧 떨어질 거니까요.”
“떨어져요?”
심사 위원 모두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심사 위원뿐만이 아니라 대기실에서도, 작가들도, 장 피디의 눈도 동그래졌다.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가 자신들도 곧 떨어질 거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모두 놀랐다. 하지만 무대에 같이 서 있는 은주와 다혜는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뭔가 아는 눈치였다.
“아니, 그래도 본선까지 왔으면 끝까지 경쟁을…….”“음악이 경쟁은 아니죠, 이깟 오디션이 뭐라고요.”
“컥!”
순간, 문해준의 숨이 막혔다. 문해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심사 위원, 아니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의 숨이 막혔다.
수철의 돌발적인 이 한마디가 음악의 정체성을 짚으면서 동시에 오디션의 명분을 무너트리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수철의 말대로 음악은 경쟁이 아니다. 수철의 이 말에 반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정도면 방송 사고 아닌가?”
촬영하던 감독도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옆에 감독을 쳐다봤다.
“나도 모르겠어. 이게 갑자기 뭔 상황이지?”
팔을 벌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중단하라는 특별한 지시가 없어서 촬영은 계속됐다.
수철은 사람들의 놀란 모습을 보다가 다시 건반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혜도 따라서 오르간을 쳤다. 은주도 다시 탬버린을 흔들며 노래를 시작했다.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모든 게 다 잘될 거예요.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모든 게 다 잘될 거예요.”
은주가 머리 위로 팔을 흔들며 계속 후렴구를 반복하자, 심사 위원도 정신 놓고 한두 명씩 같이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참가자들도 후렴구를 따라 부르며 같이 팔을 흔들었다.
유일하게 팔을 못 흔드는 사람은 콘트롤 룸에서 지켜보는 장 피디와 고 피디였다.
고 피디는 같이 흔들고 싶었지만, 장 피디의 눈치가 보여서 못 하고 있었고, 장 피디는 상황 파악이 안 됐다. 지금 상황이 호재인지, 악재인지 판단이 안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