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원시 악기
다혜가 코러스를 넣어서 은주와 같이 후렴구를 몇 번 더 반복하고서야 노래는 끝이 났다. 노래를 부른 사람도, 들은 사람도 모두 표정이 밝았다.
와이 트리오가 원래 하려던 곡은 ‘No woman No cry’가 아니었다. 준비한 곡이 있었다. 그런데 수철의 제안으로 무대에 서기 한 시간 전에 급하게 곡을 바꿨다.
그래서 신디사이저 한 대로 반주를 익히고, 노래를 연습한 터라 편곡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기존의 곡을 카피하는 정도로 급하게 연습을 마쳤다.
수철은 그동안 예선에 떨어져서 실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봤다.
그럴 때마다 괜히 참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다음.”
심사 위원들은 참가자들에게 가혹했다.
망설임 없이 불합격 판정을 내렸다. 사람들의 간절한 도전을 쉽게 꺾어 버렸다.
오디션의 특성상 누군가는 통과하고 누군가는 탈락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수철은 심사자들의 기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악 재능으로 뽑는 건 아니었다.
‘이건 아니지.’
음악 재능으로 뽑겠다고 하고 음악 재능을 보지 못하는 그들이 우습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수철이 음악을 바꾸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오늘 아침이었다.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출발할 때 창가에 붙어 손을 흔들며 성공을 기원하는 가족들의 간절함을 봤다.
안타까웠다.
이 중 대부분은 가족들에게 탈락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들의 무거운 마음이 수철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수철은 멤버들과 산책을 하면서 급하게 제안을 했고, 멤버들도 수철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잘 들었어요. 와이 트리오의 생각에 저도 뮤지션의 한 사람으로서 공감합니다.”
노래가 모두 끝나자 심사 위원들은 각자 짧게 자신의 소감을 얘기했다.
와이 트리오의 무대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그리고 심사 위원 만장일치로 50명에 선발됐다.
* * *
“다 모이라고 해.”
긴급하게 제작진의 회의가 벌어졌다. 수철의 돌발 영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회의였다.
“본선 첫 무대인데, 이 장면을 내보낼 수는 없죠.”“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심사 위원과 주고받는 얘기를 잘 편집해서 훈훈한 분위기로 마무리하는 게 좋겠어요. 아무리 편집을 잘한다고 해도 저 발언은 집어넣기 어렵습니다.”
“음.”
장 피디는 스텝들의 의견을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철의 발언이 이까짓 오디션이 아니라, 이까짓 심사 위원이 뭐라고로 바뀌었으면 딱 좋았는데.’
아쉬웠다.
장 피디가 기대한 것은 그런 그림이었다. 그래서 문해준까지 데려다 앉혀 놨는데, 레게를 하며 장 피디의 의도를 무너트려 버렸다.
장 피디는 아쉽지만, 선택해야 했다.
“오케이, 심사 위원들 멘트와 잘 섞어서 훈훈하게 가편집하고, 돌발 영상도 일단은 킵해 놔.”
* * *
“이럴 거면 리조트에 왜 데리고 온 거야?”
첫날부터 50개 팀이 탈락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짐을 싸서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미리 공지를 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할 줄은 몰랐다.
애초에 리조트의 객실을 50팀에 맞춰 잡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쨌든 본선 첫 경합에서 탈락한 50명은 숙소에 묵지도 못하고, 리조트를 떠나야 했다.
통과한 누군가는 기뻐서 환호했지만, 탈락한 누군가는 어깨가 축 처져 버스에 올랐다.
그것이 오디션의 풍경이자 민낯이었다. 약육강식의 현장이었다.
서로 축하도 위로도 할 수 없었다.
못 본 척 외면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들은 타고 온 버스에 다시 올라서 해가 지는 도로 위로 사라졌다.
* * *
“으자자!”
살아남은 50팀은 리조트에서 아름다운 아침을 맞았다.
바깥 풍경을 보며 두 팔을 쭉 뻗었다.
산속의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아이우에오~!”
여기저기서 성대를 풀며 발성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으로 조깅하는 모습도 보였다.
“잘 먹겠습니다.”
참가자들은 식당에 모여 다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컨디션에 신경 쓰며 간단하게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는 사람도 있었고, 노래하려면 힘이 필요하다며 남들보다 두 배의 식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는 맛있었다. 특히 수프는 정말 맛있었다. 수철도 빵에 수프를 찍어서 두 그릇이나 먹어치웠다.
“식사하고 10시까지 1층 연회실에 모여 주세요.”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다시 일정이 시작됐다.
넓은 연회실에 모인 참가자들은 하루 적응한 탓에 어제보다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내일부터는 자유곡이 아닌 저희가 주는 과제를 수행해야 합니다. 이미 다 얘기를 들으셨겠지만,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리면…….”
본선 1차를 통과한 50팀에게는 자유곡이 아닌 과제를 줬다.
2차부터는 자유곡이 아닌 랜덤 뽑기를 해서 국내 가수들의 곡을 해야 했다.
진출자들이 팀을 만들어서 과제를 진행하는 방식은 사라졌다.
그간 발생했던 진출자 간의 마찰과 불필요한 시비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이번엔 방식을 좀 수정해야겠어.”“네, 그게 좋겠어요. 그동안 팀원들끼리 다툼도 많았고, 한 명의 실수로 전원 탈락하는 게 뭐냐고. 무슨 군대냐는 시청자 항의도 많았어요.”
그래서 이번엔 깔끔하게 50명 전원에게 과제를 줬다.
랜덤으로 뽑은 가수의 노래 중에 한 곡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부르면 된다.
단 주어진 시간은 24시간.
내일 오전까지 편곡과 노래 연습을 모두 마쳐야 한다.
물론 이들에게는 실력 있는 트레이너들이 대기하고 있다. 트레이너에는 편곡가, 가수, 댄서, 퍼포먼스 디자이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참가자의 음악 퀄리티를 높이고 방송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형, 잘 부탁해요. 형이 맡은 팀들은 특히 신경 좀 써 줘요. 아시겠지만 프로그램 끝나면 갈 곳이 정해져 있는 아이들이에요.”
장 피디가 유명 작곡자이자 교수인 김명석에게 부탁했다.
“애들 악보도 못 보잖아. 말이 편곡이지, 노래방처럼 다 찍어 줘야 하는 거 아냐?”“에이, 다 알면서 또 왜 그래요.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면서.”“그래도 이거 은근히 스트레스 많이 받아. 애들 어차피 기획사 넘어가면 다 배울 텐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형, 다음에 새 프로그램 들어갈 때 음악 감독으로 모실 테니까, 이번에 신경 좀 써 줘요. 나 이거 잘돼야 다음 것도 하죠.”“쩝, 알았어. 약속 지켜.”
“고마워요. 형.”
이들 트레이너는 몇 개 팀씩 맡아 편곡을 도와주고 발성 연습과 춤을 도와준다.
무대에서 그림 잡는 것과 의상까지 세세히 도와준다.
명색이 본선 2차 진출자들인데 음악 실력이 형편없다는 게 드러나면 프로그램의 격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시청률도 곤두박질친다.
좋은 연출을 하기 위해선 실력 있는 트레이너들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한 명씩 나와서 선택하세요.”
랜덤 뽑기가 시작됐다. 와이 트리오는 다혜가 대표로 나섰다. 다혜가 뽑은 음악가는 유재하였다.
“예스!”
다혜는 자신이 역시 뽑기를 잘한다며 좋아했다. 수철도 다혜가 뽑은 음악가가 마음에 들었다.
곡 선택도 다혜가 했다. ‘지난날’이라는 곡이었다.
“편곡을 도와줄 트레이너 필요해요?”
작가는 뻔히 알면서 형식상 와이 트리오에게 물었다.
“아니요, 저희는 괜찮아요.”“알겠어요. 댄스 트레이너도 필요 없고. 그럼 무대 연출자가 그림 잡는 거만 좀 도와주면 되겠군요.”“네, 대신 한 가지 요청할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수철이 나서서 말을 했다.
“저희 이번에 쓰고 싶은 악기가 있어서요.”“그건 음향팀에서 체크하러 올 거예요. 그때 말씀하시면 돼요.”“아마 여기에 없을 거예요.”“어떤 악기를 쓰시려고요?”
작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미심쩍은 얼굴로 쳐다봤다.
“호주 원주민이 쓰는 악기인데, 이번에 저희가 할 음악에 붙이면 딱 좋을 거 같아서요.”“악기 이름이 뭐예요?”“디저리두(Didjeridu)예요.”“알았어요. 음향팀에 확인해 보고 없으면. 사용 가능한지 알아보고 다시 얘기해 드릴게요.”
* * *
“디저리두? 그게 무슨 악기야?”“호주 원주민들이 쓰는 전통악기예요. 이것 한번 보세요.”
작가가 휴대전화에 뜬 디저리두의 사진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이게 악기야?”
장 피디의 눈에 보인 건 길쭉한 나무관이었다.
“네, 나무로 만든 관악기예요. 이상하게 생겼지만 악기 맞아요.”
디저리두는 악기의 길이가 길고, 내부는 원뿔형으로 단순하게 생긴 악기다. 얼핏 보기에 멜로디 악기로 보이지만, 관 안에서 저음의 굵은 소리를 울려 리듬을 만든다.
“정말 특이하게 생겼네, 쓰라고 해. 좋은 그림 나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공정성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요.”
“무슨 공정성?”
“와이 트리오만 특혜를 줄 수는 없잖아요. 이 사실을 알면 다른 참가자들도 독특한 악기를 반입하려고 할 텐데요. 시선을 끌 수 있는데 안 할 이유가 없잖아요.”“다른 팀들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럼 우린 편하게 좋은 그림 잡는 거고.”“그렇게 하면 트레이너들이 다 그만둔다고 할걸요? 편곡도 다시 해야 하고, 그림도 다시 잡아야 하니까요. 음향도, 무대도 다시 세팅해야 하는데 가만있겠어요? 오늘 안에 다 해야 하는데요.”“그래, 그렇지. 그걸 깜빡했네, 음, 어쩐다…….”
작가가 보여 준 디저리두를 무대에 올리면 시청자의 시선을 끌 거 같았다. 게다가 수철이 무대에서 그걸 연주한다면 더 좋은 그림이 나올 게 뻔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요?”
“참가자 전원에게 바로 공지해. 쓰고 싶은 악기 있으면 얘기하라고. 그럼 우리가 준비하겠다고.”
“어쩌시려고요?”
“아마 대부분은 여기에 있는 악기들로 커버가 될 거야. 와이 트리오처럼 특이한 원주민 악기를 쓸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트레이너들한테 따로 얘기해. 참가자들이 다른 악기를 쓰려고 하면 알아서 설득하라고. 시간도 없고, 너희들 실력이면 악기 연주하다 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하면 아무도 별도의 악기를 쓰려고 하지 않겠지. 그러면 와이 트리오만 자연스레 새로운 악기를 쓰면 되고. 편곡도 알아서 다 할 테니까.”“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트레이너분들께는 피디님이 직접 얘기하실 거죠?”“내가 그것까지 해야 해? 그건 작가들이 가서 얘기해. 작가 일이잖아.”“그분들이 예민해서요. 오전에도 충돌이 있었거든요.”
“그래?”
“네.”
“그럼 고 피디 오라고 해.”
* * *
작가가 다시 와이 트리오의 방을 찾았다.
“오늘 안에 악기가 올 수 있나요? 당장 연습하고 음향 체크도 해야 하는데. 내일 오전에 바로 시작하려면 말이에요.”
“네, 충분해요.”
“알겠어요. 그럼 주문하시고, 악기가 도착하면 알려 주세요.”
“네.”
작가가 가고 나자 수철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걸 본 다혜가 얼굴을 찡그렸다.
“쌤 그런 거 싫어하실 텐데.”“여쭤보고 안 되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자.’
수철은 망설이지 않고 번호를 눌렀다. 전화기 너머에서 박 대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수철아. 지금 이 시각에 어쩐 일이야? 거기 공기 좋지?”“네, 좋아요. 나중에 같이 와요.”“그래, 너희 상금 받으면 그 돈으로 거기 가서 며칠 묵자. 맛있는 것도 먹고.”“네, 좋아요. 그런데 쌤. 부탁드릴 게 있어요.”“뭔데? 어쩐지 느낌이 싸했어.”
박 대표는 부탁할 때만 전화한다는 뜻으로 수철에게 핀잔을 줬다. 수철은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을 얘기하고 디저리두를 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내가 그런 것까지 해야 해?”
다혜의 예상대로 박 대표는 불편해했다. 여기저기 부탁하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우승하면 쌤 이름 외치면서 모든 영광을 쌤에게 돌린다고 말할게요.”“야! 그런 거 절대 하지 마! 나 그런 거 정말 싫어해. 그런 거 안 하겠다고 약속하면 내가 구해서 보내 줄게.”
“감사해요. 쌤.”
“쩝. 또 말렸네.”
“헤.”
“그런데 디저리두는 길어서 오토바이로 싣고 가긴 힘들어. 차로 가야 하니까 운송비는 각오해야 할 거야.”“네, 제가 올라가서 드릴게요.”“알았어. 구해서 보내 줄게. 거기 주소 문자로 찍어서 보내.”
“쌤. 감사해요.”
“피자 앤 콜라.”
“네, 바로 보내 드릴게요.”
* * *
“와, 정말 잘 어울린다.”“진짜 음악이 착착 감기네.”
다혜와 은주의 입이 벌어졌다.
디저리두로 시작하는 지난날은 인트로부터 입체감이 넘쳤다.
유재하의 지난날을 넘어 인류의 지난날을 얘기하는 원시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거, 무슨 소리예요?”
작가가 놀란 눈을 하고 심사 위원 김명석과 함께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