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42화 (42/239)

#42화. 플랜B

은주가 노래를 마치고 자신의 느낌을 말하자, 다혜가 표현이 예술이라며 웃었다.

“이 부분은 편곡을 바꿔서 두 번씩 반복해 보자.”

수철은 ‘난 우리들의 미래를 비춰 보지’라는 가사에 힘을 실었다. 디저리두는 빠지고 건반과 보컬이 같이 3도씩 음을 높이며 스타카토로 두 번씩 진행했다.

절정으로 넘어가서는 ‘그대와 나의 지난날’을 은주가 길게 부르면 디저리두가 낮게 깔리면서 들어와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었다.

“심사 위원들 평가가 기대된다.”

“나도.”

모두 편곡에 만족했다. 이제 심사 위원의 평가만 남았다.

“수철아, 너 디저리두 낙원상가에서 몇 번 불어 본 게 전부라고 하지 않았어?”“응, 그리고 길거리 연주자 동영상도 몇 개 봤어.”

“……그렇구나.”

* * *

4명의 심사자는 진지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들은 지난 심사자들과 분위기가 달랐다. 말에 힘이 있었고, 시선도 날카로웠다. 이들이 풍기는 포스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참가자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선택한 미션 곡을 열심히 소화해 냈다. 연습 때의 우려는 사라졌다. 본선 2차까지 올라온 실력자들답게 무대에서는 프로 같은 모습을 보였다. 저마다 열정을 불태웠다.

와이 트리오의 순서가 될 때쯤, 밖에서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은주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곧이어 수철의 디저리두가 시작됐다.

8마디가 지나자, 은주는 몸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를 끌어올려 노래를 시작했다.

“지난 옛일 모두 기쁨이라고 하면서도.”

심사 위원들은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눈을 반짝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귀를 세웠다.

그리고 다들 노래가 절정에 달했을 땐 입맛을 다셨다.

와이 트리오의 노래와 음악은 무대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모두 빨아들였다.

짝짝!

음악이 끝나자, 심사 위원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잘 들었어요.”

20년째 심사 위원을 하는 기타리스트이자, 실용음악과 교수 이정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호주 원주민들이 영국인들에게 침략받지 않고, 그 섬에서 자신들끼리만 살 때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들렸어요. 유재하 씨의 지난날이 원주민의 지난날로 빙의된 거처럼 말이에요. 하하.”

원래 역사를 많이 아는 건지, 아니면 심사를 위해서 준비를 한 건지는 모르지만, 예술가 같은 그럴듯한 멘트로 심사의 포문을 열었다. 작가들이 이런 품격 있는 멘트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는 오랜 짬밥으로 잘 알고 있다.

“신디사이저가 원시시대의 초원과 숲을 표현했다면, 디저리두는 거대한 원시 동물이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초원으로 뛰어나오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보컬은 그 거대한 원시 동물이 인간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대신 말해 줬어요.”

편집 포인트를 잡아 주려는 건지, 이정성은 자신의 예술적 표현을 잔뜩 얹어서 영화평을 하듯이 심사평을 했다.

은주와 다혜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이정성의 표현력에 감탄했지만, 옆에 앉은 다른 심사 위원들은 시큰둥했다. 자주 듣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정성이 심사평을 마무리 지었다.

“유재하의 지난날이 모든 인류의 지난날, 원시로 회귀하는 느낌에 저는 감동했어요. 앞으로 기대가 많이 되는 음악가들을 만나게 돼서 반가웠어요.”

오디션 심사를 하러 나온 건지, 칭찬하러 나온 건지 모를 이정성의 멘트가 끝나자, 깐깐하기로 유명한 20년 차 가수 김성철이 입을 열었다.

“잘 들었습니다. 편곡과 악기 구성도 좋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보이스가 마음에 들었어요. 도입부는 아이 같은 톤으로 시작해서 절정은 허스키한 보이스로, 그리고 다시 아이 같은 톤으로 마무리하는 부분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뭐지?’

작가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김성철도 이정성과 심사평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날카로운 단어가 몇 개 나왔어야 하는데, 감동만 하고 있다.

작가의 우려와 상관없이 김성철이 말을 이었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성대를 조절하며 소리를 뽑아내는 모습에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많은 연습량의 결과겠죠. 오랜만에 훌륭한 후배 가수가 나타나서 기분이 좋습니다.”

‘……이게 끝이야?’

사람들은 김성철을 힐끗 쳐다봤다. 칭찬 일색인 그의 소감이 어색했다. 반전도 없고, 특유의 깐깐함도 없었다.

“웬일이야? 오늘은 창법 지적 안 하네?”“그러게요. ‘다 좋은데, 거슬리는 게 하나 있어요.’ 이런 멘트가 없네요.”“별일이네, 재미없게.”

까칠한 심사평을 기대했던 제작진은 김성철의 심사평이 아쉬웠다.

하지만 다른 심사 위원들도 김성철과 같은 생각이었다. 은주의 보컬은 특별히 코멘트 할 게 없었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중견 여가수 박선정이 마이크를 들었다.

“용수철 씨에게 질문할게요.”

은주가 수철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디저리두를 직접 구해 왔다고 들었는데, 이 음악에 꼭 그 악기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나요?”“잘 어울릴 거 같아서요.”

“그뿐인가요?”

“네.”

“그렇군요.”

‘뭐지?’

뒤에서 지켜보던 메인 작가가 갸웃했다.

“뭔 저런 질문을 던져? 음악에 어울릴 거 같으니까 저 악기를 고집한 거지. 아니면 용수철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건가?”

의아한 얼굴로 옆의 작가를 쳐다봤다.

“그러게 말이에요. 용수철이 악기라도 팔러 나온 것처럼 얘기하네요.”“졸다가 깬 건 아니겠지?”

“설마요.”

“끝나고 영상 확인해 봐.”

“네.”

* * *

컨트롤 룸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장 피디가 혀를 찼다.

“아니, 왜 이렇게 다를 몸을 사리지? 돈 받고 음악 감상하러 나왔나?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이나 던지고. 나 참, 어이가 없네.”“그러게 말입니다.”

고 피디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이대로 가는 건 영 그림이 안 좋아. 방송 분량도 부족하고. 아무래도 플랜 B로 가야겠어.”“팀 미션을 부활시키시려고요?”“그래, 그 방법밖에 없어.”“반발이 심하지 않을까요?”“지금 반발 신경 쓸 데가 아니야. 분량이 나와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가서 편집은 뭐로 하려고?”

“…….”

“걱정 마. 트레이너들과 심사 위원들은 수용하게 될 거야. 나한테 생각이 있어.”

“참가자들은요?”

“유동적일 수 있다고 처음부터 공지했잖아? 그리고 방송을 먼저 고민해. 다른 사람들 입장 생각할 때가 아니야. 지금 우리 코가 석 자라고!”

“알겠습니다.”

고 피디는 장 피디의 의견에 수긍하면서도 표정이 밝지 않았다. 장 피디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았다.

장 피디는 이런 고 피디에게 한 번 더 플랜 B의 의지를 못 박았다.

“생각해 봐. 방송을 이렇게 밋밋하게 갈 수는 없잖아. 사람들이 무슨 재미로 TV를 보겠어? 갈등하고 싸우고 울고 하는 그림이 나와야지. 우리가 휴먼 드라마 찍는 건 아니잖아.”“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고 피디가 확실하게 수긍했다. 반발한다고 달라질 상황도 아니었다.

장 피디가 이번엔 심사 위원에 대한 불만을 토해 냈다.

“심사 위원들도 한마디 해야겠어. 우리가 아름다운 오디션을 만들겠다고 하니까 진짜 이 사람들이 아름다워지려고 하나? 비유와 현실을 구분을 못 해? 오디션이 정글 그림이 나와야지, 여기가 무슨 대화합의 장소야? 리조트 놀러 온 줄 착각하나…….”

심사 위원들은 그간 몇 번의 오디션을 통해 피로가 누적된 것도 있지만, 냉철한 심사평은 항상 문제가 됐기에 장 피디의 말처럼 몸을 사리는 부분도 있었다. 나름 생존법을 터득한 것이다.

장 피디는 이런 심사 위원들의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긴급회의를 해야겠어. 다 모이라고 해!”

“네.”

* * *

장 피디는 판단이 서자, 빠르게 진행했다.

우선 제작진부터 불러 모았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팀 미션 부활시킬 거야.”“플랜 B로 가시려고요?”

작가 중 누군가 물었다.

“그래, 이렇게 결정한 건 작가들의 책임도 커. 그러니까 이번엔 잘 진행해야 해.”“판을 다 깔아 줘도…….”

작가가 구시렁거리자 장 피디가 날을 세웠다.

“쟤네들은 아직 프로가 아니야. 판만 깔아 줘서는 안 된다고! 가서 쇠꼬챙이로 옆구리 쿡쿡 쑤셔야 나올까 말까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메인 작가가 물었다.

“트레이너와 심사 위원들 반발은요?”“그건 내가 알아서 협상할게. 지금은 우리 입장만 생각해, 며칠 있으면 방송 시작인데 이렇게 가면 분량 딸릴 게 뻔하잖아.”

“그렇긴 하죠.”

“많이 찍어 놔야 나중에 편집할 때 편하지. 생각해 봐. 지금 이대로 가면 첫 방만 뜨고 시청률 계속 하락할 거 같지 않아? 내 눈엔 그게 보이는데 걱정 안 돼?”

“…….”

“확실히 지난번처럼 참가자들을 붙여 놔야 에피소드가 나와.”

“…….”

아무도 대꾸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플랜 C는 없으니까 이번에 최대한 많이 뽑아낼 수 있게 다들 집중해.”

“알겠습니다.”

* * *

임시로 마련된 회의실에 트레이너들이 모두 모였다.

“팀 미션을 하나 추가하려고요.”

“네?”

“왜 갑자기?”

“무슨 의도예요?”

장 피디의 의견에 트레이너들은 하나같이 놀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무슨 의도겠어요? 우리가 이러는 이유는 딱 하나죠. 분량이 안 나와요. 그래서 이번 미션은 분량용이에요.”

“…….”

분량이라는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분량이 안 나온다는 말은, 쓸 만한 그림이 부족하다는 얘기고. 그건 일정 부분 자신들의 책임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작진이 분량이 부족하다는데 까탈스럽게 굴 수는 없었다.

거기에다 장 피디가 시원하게 한 방 날렸다.

“이번 팀 미션 촬영분에 한해서 출연료 두 배로 일괄 지급할게요.”

트레이너들은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준비할게요.”

트레이너들은 다시 표정이 밝아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잠시만요.”

뒤에서 팔장을 낀 채 장 피디의 얘기를 듣다가 나가려는 김명석을 장 피디가 불러세웠다.

“왜?”

김명석이 다가왔다.

“형, 와이 트리오 보컬 있잖아요.”

“유은주?”

“네, 유은주.”

“유은주가 왜?”

“사람들의 평가가 어때요? 보컬 실력에 대해서요.”“대단하게 생각하지. 오디션 끝나면 바로 채 가려고 뒤에서도 물밑 작업 많이 한다던데?”“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용수철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는 전화는 더 많아요.”

“그래?”

“네, 암튼, 냉정하게 형이 보기엔 어때요? 지금 우리 프로그램에서 유은주를 포함해서 보컬 말이에요.”

장 피디는 질문하면서 김명석의 표정을 살폈다.

“보컬은 박민주와 현진, 그리고 유은주까지 3명이 박빙인데, 용수철이 은주를 잘 받쳐 주고, 보이스 컬러를 잘 살려 주니까, 은주가 단연 돋보이지. 다른 사람들도 나랑 생각이 비슷할걸? 그런데 갑자기 왜? 제작진은 생각이 달라?”“아니에요, 비슷해요. 형의 냉정한 평가가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김명석은 은주의 보컬이 마음에 든다며 흡족한 얼굴로 대답했지만, 장 피디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 * *

4명의 심사 위원이 컨트롤 룸에 모여 앉았다.

“분량 때문이지?”

“네.”

이야기를 들은 이정성은 바로 알아챘다.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첫 방송이 언제야?”“며칠 안 남았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심사평 좀 화끈하게 해 주세요. 너무 절제하시는 거 같아요. 이렇게 하시면 다음에 나오실 분들도 부담되잖아요.”“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연기할 수는 없잖아.”

이정성이 말을 하고 다른 세 명의 심사 위원을 쳐다봤다. 모두 동의하는 눈빛이었다.

장 피디는 이들이 지금은 조력자처럼 보이지만, 급하면 모두 발을 뗄 것을 잘 알고 있다.

심사 위원들이 손해 볼 짓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피디로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다.

“많이 찍어 놔야 저희도 편집할 때 여유가 있죠. 그리고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유동적일 수 있다고요.”“난 괜찮아, 언제든지 제작진의 뜻에 따를 테니까.”

이정성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시간은 괜찮아? 지금도 너무 빡빡하다고 불만이 있는 거 같던데.”“이번 미션 끝나고 참가자들 음원 녹음할 거니까, 그때 좀 여유가 생길 거예요.”“그럼 그다음에 한 곡씩 더 하고 탑10 발표하는 건가?”

“네.”

* * *

“진출자 중에 그룹이 8팀이지?”

“네.”

“그중에 밴드가 4팀이고.”

“네.”

“그럼. ‘와이 트리오’에 ‘스윗키드’를 붙이고, 나머지는 따로 짝지으면 되겠어.”“네? ‘와이 트리오’에 ‘스윗키드’를 붙인다고요?”

진출자 명단을 보던 메인 작가가 장 피디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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