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나는 달릴 거야
“그러면 나를 다른 프로그램에 심사 위원장으로 추천하겠다?”
“네, 선배님.”
“오케이, 알았어. 대신 그림 잘 맞춰야 해. 내가 돈 먹고 어거지로 올렸다는 누명 안 쓰게 말이야.”“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선배님보다 우리가 더 큰 문제가 되지 않겠어요?”“알았어, 그럼 그렇게 알고 갈게.”
이정성이 사라지고 얼마 후 김성철이 들어왔다.
“형, 어서 와요.”
“날 찾았다고?”
“네, 생방 가서도 형이 계속 심사 위원 좀 맡아 줘요.”“내가? 이미 확정된 거 아니었어?”“차질이 생겼어요. 차 대표가 일이 생겨서 빠지게 됐어요.”
심사 위원을 맡기로 한 기획사 차 대표가 자신이 찜한 참가자와 계약에 문제가 생기자 심사 위원에서 빠지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 왔다. 그래서 장 피디는 아마추어 같은 찌질이라고 화를 냈다. 여러모로 껄끄러워진 상황이다.
“마찰이 생긴 건가?”
김성철이 뭔가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그런 것도 있고. 암튼 우리 속사정이 좀 있어요.”
장 피디는 대충 얼버무렸다. 친분이 있다고 해도 김성철이 궁금증을 갖는 건 오버다.
“그런데 왜 날 선택한 거야? 다른 사람도 많은데.”“형도 알겠지만 두 명은 기획사 대표고, 가수가 한 명 있어도 아직 형만큼 짬밥이 안 되잖아요. 형이 나와서 그림 좀 잡아 줘요.”“박준희 말하는 건가?”“네, 그리고 작가들도 형이 껴야 그림이 나온대요. 멘트도 형이 개성이 강하니까요.”“나 이제 세게 할 생각이 없는데? 지난번 다른 방송에서 나 욕 많이 먹은 거 알잖아.”
김성철은 몇 년 전 타 방송에서 사연이 많은 참가자에게 냉정한 평가를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심지어 자질이 부족하다는 기사까지 떴다.
참가자의 어려운 가정환경을 들은 시청자들은 김성철을 악마 취급했다.
―자기가 무슨 음악의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저 불쌍한 아이의 인생을 이제 누가 책임질 거야?
―김성철 같은 인성이 부족한 사람은 영원히 음악계에서 퇴출시켜야 해!
―음원 불매 운동이라도 벌입시다.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젠데 무책임하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진 건 참가자뿐만이 아니라 김성철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유증으로 김성철은 오랫동안 방송을 떠났었다. 음악을 하는 것에 회의를 느낄 정도였다.
“그건 형 잘못이 아니었잖아요.”“내 잘못이지.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내가 진짜 잘하는 줄 알고 철없이 떠들었으니까.”“형,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그냥 운이 좀 없었던 거죠.”
장 피디가 말하는 운이 없었다는 건 악의적인 편집에 말렸다는 뜻이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장 피디는 시청률에 목마른 피디가 벌인 짓을 운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형은 냉정하게 노래를 평가한 것뿐이었는데, 결과가 안 좋아서 저도 보면서 안타까웠어요.”“다 지나간 일인데, 뭐. 나 힘들 때 장 피디가 불러 준 거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날 왜 불렀는지 아니까 나도 냉철하게 하려고 신경 쓰고 있고.”“네, 알아요. 우린 지난번처럼 그렇게 편집 안 할 거니까 걱정 마요.”
자신에게 손 내밀어 준 장 피디가 고맙긴 하지만, 언제 다시 시청자들은 옛날 기억을 끄집어낼지 모른다. 장 피디는 걱정 말라고 했지만 김성철은 믿지 않는다. 꼬투리 잡힐 일은 벌이지 않는 게 현명하다.
“지난번 피디도 그렇게 말했었지. 걱정 말라고. 하하.”
김성철은 멋쩍게 웃었다.
“그 피디랑 나랑 비교하면 안 되죠, 난 급이 다른데.”“알아, 난 장 피디 믿지.”“그러니까 앞으로는 좋은 모습 좀 보여 줘요.”“알았어, 그렇다고 이정성 선배님 말처럼 연기할 수는 없잖아.”“그건 더 어색하죠. 형은 그렇게 하래도 못 하잖아요. 그냥 형 스타일만 유지해 달라는 거예요.”“알았어. 나 그동안 많이 추웠으니까, 이번엔 신경 좀 잘 써 줘. 밥줄 끊기게 하지 말고.”
김성철은 지난 시간이 생각나는지 말을 하며 몸을 떨었다. 자신이 고생한 것을 장 피디가 알아 달라는 뜻이다.
“엄살은, 형 짬밥이면 적당히 완급 조절할 수 있잖아요. 박준희는 그게 안 되지만 형은 그게 되잖아요.”“짬밥 있으면 뭐 해? 성격이 안 되는데. 암튼 무슨 뜻인지는 알았으니까 조절하면서 해 볼게.”
“고마워요, 형.”
“그건 그렇고. 탑 12라고 들었는데 맞아?”
“맞아요.”
“한번 걸러서 7명으로 간다고?”
“네.”
“장 피디는 대단해. 나가서 사업해도 성공하겠어.”
“칭찬이죠?”
“칭찬이지. 창업하면 나도 불러, 열심히 할 테니까.”“콜! 형은 내가 꼭 부를게요. 하하!”“그래, 고마워. 하하.”
김성철도 같이 웃었다.
“와이 트리오도 올라가는 거지?”“네, 이변이 없으면요.”“그럼 이번엔 용수철의 음악을 듣게 되는 건가?”
지금까지 수철은 정확히 자신의 음악 실력을 백 퍼센트 다 보여 준 적이 없다. 밴드에 숨어서 악기 연주와 편곡, 보컬 트레이닝을 했을 뿐이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수철의 재능을 이미 다 파악했지만, 시청자는 다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김성철은 그걸 묻는 것이다.
“자작곡 말하는 거라면 이번엔 용수철의 곡이 아니라 윤다혜의 곡이에요.”“그래? 용수철의 자작곡이 있다고 들었는데 올라가서 할 건가 보네.”“하하, 재밌네요. 형 얘기대로면 탑 12에 올라갈 걸 알고 곡을 준비해 왔다는 거잖아요?”“말이 그렇게 되나?”
* * *
참가자들은 탑 10으로 가는 열차에 빈 좌석이 남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 빈 좌석에 자신이 꼭 올라타겠다고 마지막 투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이미 정원은 다 찼다. 그들이 올라탈 좌석은 없다. 그런데도 트레이너들은 그들의 열정을 부추겼다.
“마지막 과제에 모든 걸 다 쏟아부어! 하고 싶은 걸 다 해서 최고의 음악을 만들라는 거야!”“자작곡이 아니라서 걱정돼요.”“자유곡 선택했다고 걱정하지 마, 자작곡에 가산점이 붙긴 하지만 큰 건 아니야. 내가 오래 해 봐서 아는데, 자작곡 했다고 당선시키고 그러는 거 없어. 그러니까 자유곡 선택했다고 기죽을 필요 없어.”
“네, 알겠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너희의 음악 능력을 테스트받는 거야. 아직 모두에게 기회가 있어. 포기하지 말고 이번에 너희의 장점을 다 보여 줘. 알겠지?”
“네.”
물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트레이너의 말처럼 지금까지 보여 주지 못한 엄청난 능력을 보여 준다면 한 명 정도는 보너스로 추가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기다. 지금까지 없던 능력이 갑자기 생길 리도 없다.
“계약에 차질 생기지 않게 확실하게 준비해.”“뜸 들이는 데는 어떻게 할까요?”“다 짤라. 하겠다는 회사는 많아. 괜히 숟가락 얹어서 재미 좀 보겠다고 잔머리 굴리는 데는 전화도 받지 마.”“네, 알겠습니다.
이미 다 계산이 끝났다. 지나치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리스트에 올라 있는 참가자들이 모두 올라간다.
만약 문제가 생겨서 예정된 참가자가 떨어진다고 해도 기회가 돌아갈지는 의문이다.
“VJ에게 집중해서 찍어야 할 사람들 알려 주고, 개연성 있게 스토리 잘 짜 봐. 오해의 소지가 생길 만한 건 다 날려 버려.”
이번 미션의 목적은 그림 맞추기다. 시청자들이 이해할 만한 그림을 만드는 것이다. 떨어질 애들은 떨어트리고, 올라갈 애들은 올라갈 그림을 만든다. 시청자들이 이해할 만한 자격을 편집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얘기 다 끝났으니까, 리스트대로 하면 돼.”
심사 위원이 협조하고 편집으로 마무리하면 그림 맞추기는 끝이 난다. 이들의 리스트는 그대로 현실이 된다.
그러고 나면 이제부터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생방송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모아 놓고 합숙을 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서도 촬영은 계속된다. VJ도 있지만 곳곳에 카메라가 숨어 있다.
회사가 있는 참가자들은 마지막 미션을 앞두고 비밀리에 정보를 주고받았다.
“음악이랑 악보 받았지?”
“네.”
“연습했던 거니까 실수하지 않고 잘해.”
“네, 실장님.”
최고의 편곡자들이 작업한 음악을 건네받았다.
몇몇은 그동안 숨겨 놓았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네 인생이 감동적인 시나리오로 포장될 거야.”
“…….”
“걱정하지 마, 기본 틀은 살리고 살짝 살만 붙이고 가는 거니까.”
“네.”
“감정 연기 잘하고.”
“네.”
* * *
“아시다시피 이제부터는 자작곡을 할 수 있습니다. 자작곡을 하면 가산점이 부가됩니다.”
탑10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경연이 시작됐다. 실상은 탑12로 정해졌지만, 아직 참가자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와이 트리오의 이번 곡은 자작곡이다. 멤버들 모두 이 순간을 위해 그동안 어려운 시간을 참아 왔다. 오늘 부를 곡은 다혜의 자작곡이다. 수철의 자작곡도 있지만, 다혜의 곡을 먼저 하자고 수철이 우겼다. 다혜에게 먼저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가사 좋은데? 누가 쓴 거야?”
“내가.”
“오, 작곡에 작사 능력까지? 대단한걸, 나도 다음에 부탁해야겠어.”“부탁하지 마! 나 이거 하면서 원형 탈모 왔어!”
다혜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수철을 봤다.
다혜의 이번 곡은 지난번 축제 때 만들었던 곡에 가사를 붙인 거였다.
덕분에 은주도 빠르게 노래를 익혔다. 수철의 의견으로 편곡이 좀 바뀌긴 했지만 16bit의 그루브는 그대로 살아 있다.
“은주야, 고마워. 열심히 불러 주니까 작곡자로서 너무 뿌듯해.”“음악이 좋아서 부르는 건데. 내가 고맙지.”
“너희 참…….”
“참 뭐?”
수철이 뭐라 한마디 하려고 하자 다혜가 쏘아봤다.
“참 아름다운 가수와 작곡자라고. 은주야, 내 음악도 잘 부탁해.”“알았어, 열심히 할게. 작곡자 선생님이 두 명씩이나 있으니까 내가 바쁘네, 호호.”“작곡자 두 명에 가수 한 명. 보기 드문 그림이지.”“보기 드물면서 가수가 힘든 그림이지.”
“인정.”
“얘들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 보자.”
다혜는 일찌감치 보컬 연습까지 마무리하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제목이 뭐라고?”
“나는 달릴 거야.”
“제목도 귀에 확 들어오네, 체중 조절이 필요하긴 했지.”“꿈을 얘기하는 거야, 꿈!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겠다는 말이라고!”
* * *
해가 지고 조명이 켜지자 와이 트리오의 음악이 시작됐다.
“어떤 벽이 나타나도 난 멈추지 않을 거야~!”
은주가 팝스러운 느낌으로 자신의 노래 실력을 뽐냈다.
다혜는 자신의 음악인 만큼 신중하게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수철도 경쾌한 16bit의 리듬을 살리며 건반으로 타악기를 쳤다.
“네가 날 잡아도. 네가 날 눌러도. 난 포기하지 않아~!”
난관에 부딪혀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다혜의 의지가 가사에 담겼다.
“나는 달릴 거야! 난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릴 거야~!”
절정 부분에서 다혜는 보컬과 호흡을 맞추며 현란한 피아노 솜씨를 뽐냈다. 수철도 클래식 기타로 바꿔서 연주하며 흥을 더했다.
심사 위원들도 발 박자를 맞추며 같이 리듬을 탔다.
“아주 좋았어요. 보컬의 가창력도 좋았고, 윤다혜 씨에게 작곡 재능까지 있었다니 놀랐습니다.”“음악이 경쾌하고 신나네요. 오늘 같은 밤에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방송이 나가면 시청자들의 반응이 기대됩니다. 뜨거울 거라고 조심스레 예상해 봅니다.”“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가사는 저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칭찬이 쏟아지자 다혜의 입이 벌어졌다. 이미 진출자가 확정된 상황이라 심사 위원들이 냉철하게 평가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진출이 확정된 팀에게 악평을 쏟을 심사자는 없다.
마지막까지 눈을 반짝이며 긴장하는 참가자들과 달리 심사 위원들은 편안한 얼굴로 앉아서 음악을 감상했다.
방송을 생각해 적당한 멘트만 던졌다.
탑10 선발을 위한 참가자들의 마지막 경연이 모두 끝났다.
“축하합니다.”
와이 트리오는 보컬의 가창력과 맞물려 음악도 좋고 보컬도 잘 소화했다는 극찬을 받으며 탑 12에 올라갔다.
자작곡에 가산점이 붙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