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친분 쌓기
“수철 씨, 커피 한잔할까요?”
김명석이 숙소로 찾아왔다.
“네, 좋아요.”
수철은 김명석과 함께 리조트 1층 커피숍으로 갔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김명석이 입을 열었다.
“얘기 들었겠지만, 내가 와이 트리오 음원 녹음 프로듀서를 맡게 됐어요.”“네, 작가 누나에게 들었어요.”“그래서 수철 씨랑 녹음 얘기도 하고, 겸사겸사 다른 얘기도 있어서 커피 한잔하자고 한 거예요.”
“선생님.”
“네?”
“그냥 편하게 수철이라고 불러 주세요. 말씀도 낮추시고요.”
수철은 나이 많은 김명석이 꼬박꼬박 존대하는 게 불편했다.
“그럴까?”
“네.”
“알았어. 그럼 편하게 말할게.”
“네.”
“이번에 네 곡 녹음할 거잖아. Stairway To Heaven, No Woman No Cry, 유재하 씨의 지난날, 그리고 다혜 씨의 자작곡까지.”
“네.”
“I Shot The Sheriff는 스윗키드가 불렀으니까 빼고.”“그 음악은 스윗키드가 녹음하는 건가요?”“아니야, 그 곡은 빠지는 거야. 스윗키드가 탈락했으니까 그 영상은 편집될 확률이 높지. 방송이 안 나가면 음원을 노출시킬 이유가 없거든. 홍보가 안 되니까.”“아쉽네요, 재밌었는데.”“방송이라는 게 원래 그래.”
수철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음원 녹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스윗키드가 탈락한 것이 아쉬웠다.
김명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4곡은 하루 녹음이 가능하겠지?”“네, 충분할 거예요.”“그럼 내가 녹음실이랑 시간 조율해서 알려 줄게.”
“네.”
“난 오전 시간을 선호하는데 괜찮겠어?”“네, 저도 좋아요.”
“그래, 녹음은 그렇게 진행하는 거로 하고.”
김명석은 잠시 뜸을 들이며 수철을 봤다. 그리고 수철을 찾아온 진짜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기획사에서 컨택 요청이 너한테 많이 오는 건 알지?”
“네.”
“제작진에도 문의가 많이 오지만, 나도 연락을 많이 받았거든. 그런데 수철은 갈 생각이 없나 봐?”“네, 저는 기획사는 싫어요.”
“왜?”
“불편해요.”
“그렇구나. 그 얘기는 더 안 물어볼게”
“네.”
김명석은 기획사가 불편한 이유를 묻지 않았다.
수철이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예상했었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오디션 끝나고 나서 보컬 트레이닝을 좀 부탁해도 될까?”“보컬 트레이닝이요?”
김명석이 수철을 만나러 온 목적은 이거였다. 수철을 슬쩍 떠보고 수철이 관심을 보이면 같이 일해 보자고 권할 생각이었다.
나쁜 의도는 없었다. 같이 일하면서 친구가 되고 싶었다. 지금은 보컬 트레이닝을 얘기하지만, 나중엔 직접 수철의 앨범을 기획하고 싶었다.
“이번에 보니까 수철이가 그쪽에 탁월한 재능이 있더라고. 물론 연주와 편곡 재능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아……. 전 그냥 한 건데요?”“하하. 그렇지. 수철이는 그냥 한 거겠지. 나도 작, 편곡하는 사람이지만 보컬 트레이닝은 정말 못하거든. 그런데 수철이는 보컬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디테일까지 빠지지 않고 챙겨서 좀 놀랐어.”“전 그냥 듣고 생각나는 대로 한 거뿐이에요.”“아니야, 보컬을 살리는 재능이 정말 놀라웠어. 감각도 좋고, 연출력도 대단했어.”
수철은 김명석의 일방적인 칭찬에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랐다.
“선생님이 너무 칭찬하시니까 좀 이상해요.”
“하하, 그런가?”
“네, 그런데 왜 갑자기 보컬 트레이닝을 말씀하시는 거예요?”“여기 프로그램 끝나면 내가 아무래도 내가 신인 가수 앨범을 제작하게 될 거 같아. 음악은 내가 만들지만 보컬 트레이닝을 해 줄 사람이 없어서.”“그건 작곡자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한데 내가 말했잖아, 내 보컬 트레이닝 실력이 형편없다고.”
수철은 이해가 안 됐다. 자기가 만든 곡은 직접 연습시켜야 느낌을 살릴 수 있다. 곡을 못 살리는 가수가 맘에 들지 않아서 가수를 자르고 직접 부르는 작곡자도 있다. 수철은 그걸 알고 있었다.
“내가 좀 그래.”
수철이 의아해하자 김명석은 대충 얼버무렸다.
수철의 말대로 보컬 트레이닝은 당연히 작곡자가 해야 한다. 그래야 곡의 의도를 잘 살릴 수 있다. 김명석이 보컬 트레이닝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노래 실력 때문이었다.
의외로 작곡자 중엔 이상한 소리를 내는 사람이 꽤 있다. 감추고 싶은 비밀이다.
“가수 성향에 맞춰서 만드는 곡이라, 곡의 특성 같은 건 없어.”
“…….”
“내가 너무 불편한 부탁을 하는 건가?”“아니에요. 해 볼게요.”
“진짜?”
김명석의 눈이 커졌다.
“네, 저도 선생님 음악이면 한번 해 보고 싶어요.”
“내 음악을 알아?”
“네, 며칠 전에 다혜가 들려줬어요.”“그렇구나. 어땠어?”
김명석은 수철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좋았어요.”
“좋았어? 햐.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수철이한테 칭찬을 듣다니 말이야. 어떤 곡을 들었어?”“낫띵 혹은 에브리띵이요.”“아, 그 노래를 들었구나. 그런데 어떤 부분이 좋았어?”
김명석은 수철이 자신의 음악을 칭찬하자, 궁금한 게 많아졌다.
“배음이 탄탄해서 좋았어요. 악기 구성도 선명했고요. 그리고 클래식과 현대 음악이 섞이는 후렴 부분도 좋았어요.”
수철이 말한 부분은 클래식을 전공한 김명석만의 장점이다. 김명석도 그 부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햐, 내가 편곡할 때의 생각을 다 읽어 버렸네? 하하. 그럼 보컬 트레이닝은 하는 걸고 알고 있을게.”
김명석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런데 전 선창(先唱)은 못하거든요.”“나도 선창하는 거 별로 반기지 않아. 선창하면 신인 가수들은 그대로 따라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네.”
“그러면 느낌을 전달할 때는 어떻게 해?”“악기를 쓰고 말로 설명해요. 그걸로 부족할 때는 비슷한 음악을 찾아서 들려주고요.”“역시! 그 방법이 가장 좋지.”
김명석은 수철이 무슨 말을 해도 좋게 들렸다. 같이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보수도 두둑하게 받을 거고, 앨범이 잘되면 성과급도 생길 거야.”
“네, 헤헤.”
“작, 편곡 의뢰도 많이 들어 올 거야. 방송 나가면 유명 인사가 될 테니까.”
“아…….”
수철은 김명석의 말뜻을 이해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디션 끝나고 바로는 못 해요. 공연이 있어서요.”
“공연?”
“네, 외국 공연을 가야 해서 오래 걸릴 거예요.”“와, 수철이 바쁜 사람이었구나. 이거 몰라봤네.”“헤헤. 아니에요. 오래전에 잡혀 있던 약속이라서 하는 거예요.”“얼마나 걸리는데?”
“2주요.”
“그 정도면 괜찮아. 오디션 끝나고 곡 만들고 하다 보면 한 달은 걸릴 거거든.”
“네.”
“그럼 공연 갔다 와서 연락 줄래?”
“그럴게요.”
“자. 여기 내 명함이야.”
수철은 김명석이 주는 명함을 받아 넣었다.
김명석은 남은 커피를 마시며 수철에게 방송에 관한 얘기를 들려줬다. 수철이 너무 모르기 때문이었다.
“수철이 넌 아직 이 프로그램의 파워를 모르는 것 같아.”
“어떤 파워요?”
“난 너희 음원 녹음하는 것도 벌써 신경 쓰이는데.”
“……?”
“방송 나가고 음원이 공개되면, 엄청난 변화가 생길 거야. 방송 출연 요청에, 인터뷰에, 광고에.”
“광고요?”
“음악이 아니라 모델을 말하는 거야.”“에이, 그러면 제가 할 게 없네요.”
“할 게 없어?”
“인터뷰는 재미없고, 방송은 체질에 안 맞아요. 모델은…… 풉, 생각만 해도 이상해요.”“이런 얘기를 하기 좀 그렇지만, 사람들이 네 외모 때문에 난리야.”“전 그런 말 싫어해요.”
“아, 미안.”
김명석은 멈칫했다. 수철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다시 풀었다.
“선생님께서 프로듀싱 잘해 주세요. 음원이 많이 팔리면, 빨리 작업실을 만들 거거든요.”
“작업실?”
“네,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거니까요.”“하하, 작업실 만들려고 오디션에 참가했다는 말이야?”
“왜 웃으세요?”
“하하, 미안. 신기해서. 넌 그럼 음악 말고 다른 건 관심 없다는 얘기네?”“다른 거 어떤 거요?”“방송이나 광고. 특히 광고는 한 번에 많은 돈을 벌 수 있거든.”“그래도 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 여기도 억지로 있는 거예요. 저는 이런 데가 안 맞아요. 은주랑 다혜가 없었으면 벌써 갔을 거예요.”
김명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은 분명 그랬을 것 같다. 멤버들이 없었으면 당장에라도 가 버렸을 것 같다.
“어쨌든 너, 약속한 거다? 내 앨범에 보컬 트레이닝 하는 거로.”“네, 공연 갔다 와서 전화드릴게요.”“그래, 그럼 음원 녹음할 때 봐.”“네, 안녕히 가세요.”
* * *
“수철이 어디 갔어?”
작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수철을 찾았다.
“인터뷰하시게요?”
“아니, 다른 얘기할 게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 알아?”
“1층 커피숍에요.”
“커피숍은 왜?”
“김명석 선생님이 불러서요.”
“김명석 선배가?”
작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같이 온 음악 감독과 함께 1층 커피숍으로 향했다.
“어, 수철아.”
계단을 내려가던 작가가 수철을 발견했다.
“네, 누나. 안녕하세요.”“그래, 안녕. 수철아, 이분 누군지 알아?”
작가는 옆에 서 있는 음악 감독을 가리켰다.
“본 적은 있는데, 누군지는 잘…….”“하하, 정식으로 인사한 적이 없는데 모르는 건 당연하죠. 난 프로그램의 음악을 맡은 음악 감독이에요.”
음악 감독은 먼저 나서서 자신을 소개했다.
“그럼 얘기 나누세요. 수철아, 나중에 봐.”
“네, 누나.”
작가는 음악 감독과 눈짓을 주고받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음악 감독의 요청으로 수철을 소개해 주려고 온 것이었다.
“수철 씨. 잠시 밖에 나가서 좀 걸을까요?”“왜 그러시는데요?”
수철은 이 아저씨랑 밖에 나가서 걸을 생각이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다짜고짜 아는 척하는 것도 불편했다.
“수철 씨에게 상의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상의요?”
“네, 그런데 복도에 서서 얘기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나갈까요?”
수철은 불편했지만, 소개해 준 작가 누나를 생각해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와서 걷던 음악 감독이 입을 뗐다.
“수철 씨, 락 음악 좋아하죠?”
“네.”
“락의 정신이라고 말하는 락 스피릿도 이해해요?”
“네, 조금은요.”
“우리 프로그램 도와주시는 분 중에 락 밴드를 키우시는 분이 계신데, 요즘 인기가 좋아요. 그런데 그 밴드가 락 스피릿, 그러니까 메시지에만 힘을 싣다 보니까 음악이 좀 약해요. 그래서 수철 씨에게 그림과 음악을 좀 잡아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요.”
자신이랑 친한 기획사 대표가 수철이 유명해지기 전에 숟가락 얹으려고 부탁한 것을 빙빙 돌려서 말한 것이다.
음악 감독은 수철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더 얹었다.
“보수도 아주 많이 줄 거 같아요.”“싫어요, 안 할래요.”
수철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너무 단호해서 음악 감독이 당황했다.
“아니 왜요? 좀 도와주면 좋을 거 같은데. 돈도 많이 주고요.”
음악 감독은 당황해서 자신이 칭찬하던 수철의 성향을 까먹었다. 수철이 아웃사이더라고 말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음악 감독이다.
“하고 싶지 않아요. 밴드 그림 잡는 건 이제 그만할 거예요.”
수철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음악 감독은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얘기했다.
“와이 트리오가 그동안 했던 음악과 그림들 아주 좋았어요. 그게 다 수철 씨 작품이란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 스윗키드도 아주 훌륭했고요. 그런데 왜 그만한다는 거예요?”“스트레스 받아요.”
“스트레스?”
“내 맘대로 못 하고 맞춰야 하니까요. 음악의 한계가 보이는 것도 답답하고요. 아기 다루듯이 하는 것도 힘들어요.”
“아…….”
음악 감독은 그제야 수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밴드의 눈높이를 맞춰야 하니까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는 뜻이다. 스윗키드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내가 부탁하는 팀은 수철 씨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요. 내가 다 말해 놓을게요.”“싫어요, 저 인제 그만 가 볼게요.”
수철이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자 음악 감독이 다급하게 잡았다.
“잠시만요, 그럼 앞으로 밴드는 안 할 거예요?”
“네.”
“와이 트리오는?”
“와이 트리오가 마지막이에요.”
수철은 당황하는 음악 감독을 두고 돌아서 가 버렸다.
* * *
녹음실에는 아침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수철아, 어서 와. 다혜 씨, 은주 씨도 어서 와요.”
와이 트리오 멤버들이 컨트롤 룸으로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김명석이 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녹음실엔 김명석과 엔지니어를 제외하고도 낯선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들은 녹음을 도우러 온 사람들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