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49화 (49/239)

#49화. Recording

김명석은 그들이 누군지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표정이 밝지 않았다. 말도 섞지 않았다.

엔지니어만 소개했다.

“수철아, 인사해. 오늘 녹음을 진행해 주실 엔지니어분이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멤버들은 모두 엔지니어와 인사를 나눴다.

“은주 씨, 오늘 컨디션 어때요?”

“좋아요.”

김명석은 프로듀서답게 보컬의 컨디션부터 체크했다. 은주가 좋다고 답하자 웃으며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보컬 녹음이 가장 중요하니, 프로듀싱을 하기 전에 몸풀기를 하는 것이다.

“보컬 녹음은 많이 해 봤어요?”“학교에서 몇 번 해 봤고요. 가이드로 부르는 거 몇 번 해 봤어요. 지난번 축제 녹음도 했었고요.”“그럼 녹음실이 어색하지는 않겠네요?”“네, 그런 건 없어요. 잘할 수 있어요.”“씩씩해서 맘에 들어요. 건강한 에너지가 팍팍 넘치네요.”

김명석은 은주의 컨디션을 끌어 올리기 위해 애써 감탄을 했다.

“감사합니다.”

“나도 다음번에 은주 씨에게 가이드 부탁을 해야겠어요.”“와,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할게요.”“하하. 적극성도 맘에 드네요. 내친김에 가이드가 아니라 내가 은주 씨를 위해 아예 곡을 써 버릴까?”

김명석은 은주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그 말에 은주의 입이 잔뜩 벌어졌다.

“와, 정말 영광이에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하.”

은주의 기분을 풀어놨으니, 이제 시선은 수철에게로 향했다.

“악기는 너희가 오디션에서 쓰던 그대로 세팅해 놨어. 확인해 보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줘.”“드럼은 리얼로 쳐도 되죠?”“리얼로 치면 좋지. 그런데 누가 치게?”

“제가 치게요.”

“뭐!”

김명석이 놀란 눈으로 수철을 빤히 봤다.

“너, 드럼도 쳐?”

“왜요? 치면 안 돼요?”

수철은 놀라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허…….”

김명석은 잠시 수철을 쳐다보다 엔지니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드럼 세팅 가능할까요?”“네, 그런데 좀 기다리셔야 합니다. 마이크 세팅 다시 해야 하니까요.”“그렇게 좀 해 주세요.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김명석은 다시 수철을 봤다.

“너는 사람 그만 놀라게 하고 미리 다 말해.”

“뭘요?”

“베이스도 칠 줄 알아?”“네, 그런데 오늘은 신디사이저로 녹음할 거예요.”“그럼 색소폰도 불 줄 알아?”

“안 해 봤어요.”

수철이 모른다고 하니까 김명석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수철이 못하는 걸 일단 하나 찾아냈다.

“그럼 첼로는?”

“안 해 봤어요.”

바이올린을 물어보려다 왠지 느낌이 싸해서 첼로를 물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프는?”

수철이 전혀 안 해 봤을 악기를 골라냈다.

“안 해 봤어요.”

“하하, 너도 못하는 악기가 많구나.”

김명석이 통쾌하게 웃으며 흡족해했다. 그러다가 머릿속에서 생각 하나가 스쳐 갔다.

“근데, 너.”

“……?”

“못한다는 말은 안 하네? 그냥 안 해 봤다는 거야?”

“네.”

“그럼 한번 해 보면 할 줄 안다는 얘기야?”

“아마도요?”

“아마도?”

“네.”

“헐.”

‘아마도라, 아마도…….’

김명석은 수철을 보며 말을 곱씹었다.

묘한 무력감이 들었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다. 특히 최고의 음대를 나오고, 엘리트 코스로만 걸어 온 김명석 같은 사람에겐 더 그렇다.

수철은 음악가들이 오랜 시간 쌓아 온 것을 한방에 무너트려 버린다. 그들이 믿고 추구해 왔던 것이 부질없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수철이, 넌 모를 거야. 다른 사람들이 네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

“내가 이 정도인데, 다른 사람은 어떻겠어?”

“……?”

수철은 김명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엔지니어가 말을 끊지 않았으면 김명석의 푸념 섞인 말이 이어졌을 거다.

“세팅 다 됐습니다.”“네, 수고하셨어요.”

김명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바로 시작할까?”

“네.”

손수 커피를 타서 멤버들 앞에 내려놓았다. 녹음실에선 인스턴트 커피가 제맛이다.

“캬, 신기하게도 녹음실에선 이 맛이 난단 말이야? 집에선 아무리 마셔도 이 맛이 안 나는데 말이야. 녹음실을 수십 년 드나들었는데도 아직 이 비밀을 못 풀었어. 하하.”

“하하.”

분위기를 바꾸려는 김명석의 말에 다혜와 은주도 따라 웃었다. 마치 그 맛을 안다는 얼굴로.

“어쨌든 수철이, 네가 직접 드럼을 치겠다고 해서 난 수고를 덜었어.”

“왜요?”

“네가 신디사이저로 녹음하면 난 후반 작업에서 최대한 리얼 드럼으로 만들려고 했거든.”“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아니야,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 사실 제작진도 드럼은 세션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어. 음악이 살아야 하니까. 너도 그래서 리얼로 치려는 거잖아.”“네, 아무래도 느낌이 다르니까요.”“그래, 제작진이 그렇게 말해도 난 너를 믿어 보자고 했거든. 사실 세션맨을 부를 생각도 했지만 만약에 리얼감이 부족하면 내가 후반 작업으로 메우려고 했지.”

“아…….”

“그런데 네가 갑자기 드럼을 치겠다고 나서니 머리 아팠던 일이 한 방에 다 해소되어 버린 거야. 전혀 예측하지 못했거든. 하하.”

“아…….”

수철은 김명석이 머리 아픈 일이 해소됐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녹음에 신경 써 주는 모습을 보면서 훌륭한 프로듀서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명석은 껄껄거리던 웃음을 멈추고 다시 수철을 봤다.

“수철아, 너 이 느낌 알지?”

“어떤 거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가 주는 쾌감. 카타르시스.”

“음악이요?”

“응.”

“20세기 현대음악이요? 선율, 화성, 음색. 다 바뀌었죠.”

“그렇지.”

“그리고 무엇보다 재즈요.”

“역시.”

재즈는 어느 장르보다 자유롭다. 그래서 연주자의 창의성이 잘 드러난다. 같은 곡을 연주하면서도 매번 색깔이 달라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재즈의 매력이다. 이런 재즈의 실험정신이 듣는 이로 하여금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가 주는 쾌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김명석이 통쾌한 얼굴로 손을 들어 수철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수철아, 우리 꼭 친하게 지내자.”

“네.”

“꼭이야, 꼭.”

“네.”

“하하, 귀여운 녀석!”

옆에서 다혜와 은주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암튼, 제작진들 인터뷰거리 하나 더 생겼네.”

“인터뷰요?”

“그래, 네가 드럼까지 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작가랑 VJ가 신나서 달려오겠지.”“헐, 말씀하지 마세요.”“내가 말 안 한다고 모르나? 들어보면 아는데.”

“…….”

김명석은 기다리고 있는 엔지니어를 힐끔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시작해 볼까?”“선생님, 잠시만요.”

수철이 가방을 뒤져서 악보를 꺼냈다.

“오늘 저희 녹음할 악보예요. 하나는 선생님, 하나는 엔지니어님 거예요.”

김명석이 웃으며 악보를 집어 들었다.

“우리 친절한 수철 씨, 악보까지 다 챙겨 왔네?”

“네, 헤헤.”

“그런데 수철이는 녹음을 좀 해 봤나 봐? 나랑 엔지니어분 악보가 다르네?”“네, 엔지니어님은 멜로디가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쓸데없는 데에 힘을 안 쓰는구나.”

“네?”

“아니야, 악보 고마워.”

“네.”

다혜가 물었다.

“선생님, 저도 자작곡은 피아노로 쳐도 될까요?”“당연히 되죠, 피아노는 다 준비돼 있으니까 마이크만 조절해서 바로 하면 될 거예요.”

김명석이 엔지니어를 쳐다보자, 엔지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명석이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지금 다 얘기해요.”

그말에 은주가 물었다.

“전 필요한 게 아니라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 봐요.”

“전 음색의 개성이 강해서 마이크의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하하,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녹음실 오자마자 제일 먼저 확인한 게 마이크예요. 그리고 여기가 사람들이 보컬 전문 녹음실이라고 떠들 정도로 좋은 마이크가 많아요.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거로 오늘 소리를 받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역시 김명석은 전문가다웠다. 옆에서 엔지니어도 씨익 웃었다.

“오케이.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네!”

“무슨 곡 먼저 할 거야?”“Stairway to Heaven부터 할게요. 제가 먼저 드럼 녹음하고, 그다음에 다 같이 들어가서 반주 녹음하고, 마지막으로 은주가 반주 들으면서 보컬 녹음하면 될 거 같아요.”“그래, 그러면 되겠다.”

김명석이 엔지니어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 수철이가 드럼도 치고 기타도 쳐야 해서, 그렇게 진행할 거예요.”

“아, 네.”

엔지니어는 수철을 휙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철은 부스 안으로 들어가 헤드폰을 쓰고 드럼 앞에 앉았다.

김명석은 헤드폰을 쓰고 엔지니어 옆에 앉았다. 앞에는 엔지니어가 작업할 고가의 믹서가 놓여 있었다.

은주와 다혜는 뒤에서 녹음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먼저 엔지니어가 헤드폰을 확인했다.

“들리시나요?”

―네.

수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명석이 앞에 있는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네.

“메트로놈 줄 테니까 맞춰서 시작해.”―네.

수철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OK 신호를 보냈다.

똑. 딱. 똑. 딱.

메트로놈에 맞춰 녹음이 시작됐다. 모두 숨죽이고 부스 안을 쳐다봤다뒤에 서 있는 낯선 사람들도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Stairway to Heaven은 앞부분에 드럼이 없다.

음악은 기타, 신디사이저, 보컬, 드럼과 베이스 순으로 시작된다.

수철이 치는 드럼은 중반부터다.

추추추. 츄르르르. 쿵! 칙. 탁! 칙!

수철이 심벌로 인트로를 주면서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흠.”

김명석은 수철이 드럼 치는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귀를 세우고 소리에 집중했다.

조금씩 김명석의 몸이 점점 앞으로 숙여졌다. 그러다 완전히 엎드렸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큭큭.’

엎드린 채 등을 들썩였다.

‘……?’

뒤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김명석이 엎드려서 등이 들썩이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래?’

‘우는 건가? 아니면 웃는 건가?’

김명석은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한국 최고의 드러머들과 녹음을 해 봤지만, 수철의 박자 감각은 그들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앞서 있었다. 음악에서 드럼의 존재 이유를 정확히 짚고 있었다.

화려한 기교는 없지만, 신기할 정도로 박을 당기면서 조이는 모습에 김명석은 놀랍다 못해 웃음이 났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이지? 이 정도면 프로듀서가 왜 필요해?’

혼자 큭큭댔다.

잠시 후, 수철의 드럼 녹음이 끝나고, 와이 트리오 멤버들이 모두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은주는 녹음은 아니지만, 가이드를 맞춰 주기 위해 같이 들어가서 마이크 앞에 섰다.

김명석은 세수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엔지니어의 큐 사인에 맞춰 다시 녹음이 시작됐다.

따! 라라란, 따! 라라란!

수철의 선명한 기타 아르페지오로 음악이 시작됐다. 김명석은 다시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우웅…….”

곧이어 다혜의 신디사이저가 천국으로 가는 계단 옆에 깔리는 안개처럼, 신비로운 톤으로 수철의 아르페지오를 따라 들어왔다.

“There’s a lady who’s sure All that glitters is gold―And she’s buying a stairway to hea―ven.”

은주의 신비로운 보이스가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모두 그 소리에 눈을 반짝였다.

녹음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중간중간 녹음한 걸 모니터하고, 물을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빠르게 두 곡의 녹음을 마무리 지었다.

“점심 먹고 할까?”

―네.

김명석의 말에 모두 부스 밖으로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김명석은 수철을 보며 한번 웃고는 다혜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철이는 모를 것 같고, 다혜 씨는 알 것 같은데?”

“뭘요?”

“빨간 편곡 책 펴면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뭐죠?”“네, 알아요. ‘태초에 리듬이 있고’, 저도 좋아하는 말이에요.”“역시! 공부 잘하는 학생답게 아는군요?”

“헤…….”

다혜가 멋쩍게 웃는데 수철이 끼어들었다.

“오, 멋있는 말이네요.”“무슨 뜻인 줄 알지?”

“네.”

“난 오디션에서도 느꼈지만, 오늘 녹음하면서 새삼 다시 느꼈어. 사람들은 너의 멜로디 구성이나 편곡에 놀라지만, 난 좀 생각이 달라. 네가 간결하면서도 강한 리듬의 임팩트로 사람들을 터치하는 게 더 놀라워.”“선생님, 그러다 제 팬 되시겠어요.”“뭐? 크크, 너, 그런 농담도 할 줄 알아?”

“친해지면요.”

“오, 그럼 친해졌다는 얘기네?”“더 쎈 농담을 해 드릴까요?”“아니야. 여기까지로 만족할게.”

“네, 헤헤.”

“암튼 내 말은 편곡의 기본은 리듬이라는 말이지.”

―흠. 흠.

―크음.

이때, 뒤편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녹음실 안에 있던 낯선 사람들이 아직도 가지 않고 있었다. 끝까지 지켜보며 녹음이 끝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녹음이 끝나고도 김명석의 얘기가 길어지자 빨리 끊으라고 헛기침 소리를 낸 것이다. 복장만 봐도 한가하게 녹음을 구경할 사람들은 아니었다.

김명석은 기침 소리를 듣고는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녹음이 다 끝나고 나서야 낯선 사람들의 정체를 알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들은 접근이 어려운 리조트를 피해 녹음실로 와이 트리오를 만나러 온 매니지먼트 사람들이었다. 연예부 기자도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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