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후기, 일상, 도전
“아, 시원하다.”
수철이 생맥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수철이 네가 생맥주를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어.”
다혜가 재밌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나도 몰랐어.”
와이 트리오 멤버들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가까운 치킨집에 가서 프라이드와 양념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난 치맥 먹고 싶은 거 참는 게 제일 힘들었어.”“나도 치맥 생각이 제일 많이 났어. 내가 치맥을 이렇게 사랑했나 놀랐다니까? 호호.”
모두 시원한 생맥주에 치킨 한 조각씩을 들고 있었다.
“역시 치맥은 진리야.”
“맞아, 맞아.”
“이렇게 맛있는 걸 두고 거기에 갇혀 있었다니.”“호호, 이제 속 시원하다.”
수철이 치킨을 물고 있는 다혜와 은주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 무대는 너희가 너무 잘해 줬어. 난 완전 푹 빠져들었거든.”“나도 그래, 소리에 이렇게 빨려 들어가 보긴 처음이야. 완전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어.”
수철의 말에 은주가 격하게 공감했다.
다혜는 첫 합주 때 기억을 떠올렸다. 입에 묻은 생맥주 거품을 닦으면서 말했다.
“수철이가 처음 ‘Radiate’ 들고 왔을 때가 생각난다.”
“나도 기억나.”
“우리 그때 욕할 뻔했잖아.”
“맞아, 호호.”
“뭐?”
둘의 얘기에 수철이 웃으며 쳐다봤다.
“헤헤, 그땐 좀 그랬었어. 음악이 그랬던 건 당연히 아니고, 네가 우리의 부푼 꿈을 바늘로 푹 찔렀잖아. 그래서 순간 욱했었지.”
탑3까지 올라가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걸 깨트렸다는 말이다.
“알아, 그 부분은 미안하게 생각해.”“괜찮아. 네가 다 설명했으니까. 음악이 낯설긴 했지만, 예술적이었어.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만들어 보고 싶은 곡이잖아.”
“그건 그래.”
은주도 공감했다. 다혜가 계속 말을 이었다.
“욱했던 건 오디션에서 반길 곡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곡도 길고, 그걸 15분간 TV 앞에서 들을 사람은 없잖아. 그럼 방송국은 채널 돌아간다고 탈락시키고 빼 버리겠지. 어쨌든 그래서 우리가 여기 앉아서 치맥을 먹고 있는 거지만.”
“난 후회는 없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건배!”
다혜가 다시 잔을 들어 부딪쳤다.
이번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은주가 자신의 후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단어 내뱉는 거 진짜 백만 번 연습한 거 같아.”
“하하. 진짜?”
“그래, 이렇게 볼펜을 입에 물고. 어버버. 어버버. 하면서 말이야. 호호!”
은주는 나무젓가락을 세로로 입에 깊숙이 밀어 넣어 이빨로 물고는, 아나운서들이 발음 연습하는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을 보며 수철이 웃었다.
“하하. 그 덕분에 음악이 많이 살았어. 난 너의 선명한 발음을 존경해.”“그래, 내 발음은 존경받을 만해. 이번에 고생을 많이 했거든. 호호.”
수철은 자신을 믿고 따라 준 다혜와 은주가 고마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욕심을 내면 더 올라갈 수 있었던 오디션이었다.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할 기회를 수철이 무너트렸다.
“난 너희한테 미안한 마음이 커.”
수철의 감정을 눈치챈 다혜가 대꾸했다.
“그럴 거 없어. 재밌었잖아.”“그래도 나 때문에 더 올라가지 못한 건 미안하지.”“미안할 거 없어. 여기까지라도 올 수 있었던 건 네 덕분이었어. 난 이 정도면 만족해. 그리고 오디션 미션은 성공적이었어.”“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수철이 네가 우리의 캡틴이잖아.”
수철은 친구들이 진심 고마웠다.
“치맥은 내가 살게.”“그럼 안 살 생각이었어? 캡틴이?”
앙상하게 뼈만 남은 치킨 다리를 들고 다혜가 쳐다봤다.
“아니야,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먹어. 내가 오늘 다 살게. 미안한데 치킨이라도 사야지.”
그 말에 다혜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근데 수철이 너, 정말 시원한가 봐? 얼굴이 환해졌어.”“응, 난 이제 살 것 같아. 속이 뻥 뚫려.”“흐흐, 진짜 싫었나 보다.”“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야. 흐흐.”
수철은 이제 속이 후련하다며 생맥주를 들이켰다.
“호호, 수철이 진짜 힘들었었나 봐.”
은주도 수철을 보며 웃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 우리가 뽑혀서 합숙에 들어갔어 봐, 으으.”
수철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몸을 떨었다. 하지만 은주는 아쉬움이 있었다. 처음부터 수철이 여기까지라고 못을 박았지만 내심 기대했었다.
은주는 얼굴을 알려야 하는 보컬이다. 그리고 이런 규모의 오디션은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다. 아쉬움이 남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수철은 진심으로 해방된 모습이었다.
“나는 딱 좋아. 음원 녹음도 다 했고, 김명석 선생님 말씀으로는 방송만 시작되면 작업실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했어.”
무표정하게 깍두기를 집어 먹던 다혜가 물었다.
“너, 방송 출연 요청이 와도 안 할거지?’
“응.”
“광고 찍을 수도 있다고 작가 언니가 그러던데.”“미안한데 난 하고 싶지가 않아. 너희가 하고 싶으면 해.”“네가 빠지는데 우리끼리 어떻게 해?”“은주는 할 수 있을걸?”
다혜가 은주를 쳐다봤다. 은주는 들은 얘기가 있는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다혜는 해당 사항이 없다.
“그럼 공연은 할 거야?”“그건 할게. 그런데 은주가 계약하면 마이클처럼 공연 못 하는 거 아니야?”
수철이 은주를 쳐다보자 은주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혜가 시무룩해졌다.
“야, 윤다혜.”
“뭐?”
수철이 부르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가 제일 많이 벌잖아.”
“내가 뭐?”
“자작곡은 네 거 한 곡밖에 없잖아. 마지막에 방송되는 곡이라 네 곡은 확실하게 뜰 거라던데?”
그제야 다혜의 입이 배시시 벌어졌다.
“내가 돈 얘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는 게 아쉬우니까 그러는 거지. 계속 같이 활동하면 좋잖아.”“그렇게 광고를 찍고 싶으면 작가 누나에게 물어봐. 네가 혼자서 광고 찍을 수 있는 방법 없냐고.”
“킥킥.”
순간 은주가 웃었다.
“너, 왜 웃어?”
“아니야, 미안해. 그런 뜻으로 웃은 거 아냐.”
“그런 뜻?”
“헉, 미안해!”
다혜가 생맥주잔을 들고 수철과 은주를 번갈아 봤다.
“아니, 얘네들이? 이제 진짜 팀 깨자는 거네?”
욱하더니 생맥주 한잔을 순식간에 들이켰다. 그사이 은주는 슬금슬금 화장실로 도망갔다.
다혜는 입에 거품을 닦으며 손을 들었다.
“저기요! 여기 500㏄ 한 잔 더 주세요!”
멤버들은 오랜만에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는 거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늦게까지 어울렸다.
어느 정도 오디션에 대한 뒤풀이를 마무리 짓자 수철이 물었다.
“은주,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기획사에 들어갈 생각이 있어?”“응, 난 그럴 생각이 있어.”
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혜, 너는?”
“난 노예 작곡가 할 생각 없어. 자유로운 창작자로 남을 거야. 학교도 계속 다니고 싶고.”“오, 좀 멋있는데?”
“몰랐었어? 내가 한 멋 하지. 어쨌든 나도 곡은 쓰게 될 거 같아. 의뢰를 받았거든.”
“그래?”
“응, 작가 언니들이 신인 가수 연결해 준다고 하고, 트레이너 선생님들도 몇 곡 부탁했어. 문제는 내가 얼마만큼 쓸 수 있느냐지.”
“잘됐네, 축하해.”
“땡큐. 근데 수철이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작가 언니들 말로는 넌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난 우선 외국 공연부터 가야 해.”“트럼펫 선생님과 같이하는 거?”
“응.”
“부럽다, 외국 공연도 가고.”
다혜가 수철을 부러운 얼굴로 쳐다봤다.
“너도 가면 되지.”
“난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안 되잖아.”“기다려, 내가 외국에서 공연할 일 생기면 너 데리고 갈게.”
“호호. 고마워.”
다혜의 얼굴이 좀 펴졌다.
“뉴욕이라고 했지?”
“뉴욕은 오디션 때문에 못 갔고, 영국으로 갈 거야. 런던 그다음엔 호주 시드니, 멜버른.”“와, 좋겠다. 좋은 데는 다 가네.”
다혜는 수철이 많이 부러운 눈치다.
“너도 열심히 하면 되지.”“열심히 한다고 너처럼 되는 건 아니잖아.”
“…….”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응. 물어봐.”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뭘 물어보려고?”
“부모님이 뭐 하셨는지 궁금해서.”
“그건 왜?”
“아니, 그냥. 어떤 분이셨기에 네가 이런 재능을 갖고 태어났나 해서. 우리 부모님은 평범하시거든. 아빠는 직장인이고, 엄마는 가정주부고.”“난 아빠는 경찰이셨고, 엄마는 보험 영업 사원이셨어.”“그럼 유전은 아닌 건가? ……어릴 때 벼락 같은 거 맞았나?”
“뭐?”
“아니야, 괜히 궁금해서. 아, 나도 외국 공연 가고 싶다. 수철아. 다음에 공연 갈 때 나 매니저로 데려가.”
“생각해 볼게.”
* * *
다혜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박 대표는 껄껄 웃었다.
“하하! 그렇지, 그래야 용수철이지! 용수철이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지.”
예상했다는 반응을 보이며 크게 웃었다.
수철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준비해서 영국 공연을 가야 한다.
삐삐삐삐. 삐. 찰칵!
수철은 계단을 내려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소파에서 자고 있던 박 대표는 수철이 나타나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왜 쉬지도 않고?”
“할 게 있어서요.”
“바로 작업 시작하려고?”“네, 오디션 하면서 생각난 곡이 있어서 간단히 스케치만 해 두려고요.”“쉬지를 않는구나.”
“많이 잤어요. 헤.”
수철은 박 대표의 잠을 깨운 게 미안해서 멋쩍게 웃었다.
“다혜가 그러던데…….”
박 대표는 오디션에서 궁금했던 얘기들을 수철에게 물었다. 수철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박 대표는 얘기를 듣는 동안 계속 껄껄거렸다.
“하하, 그래서 끝나자마자 바로 짐 싸서 온 거야?”
“네.”
“떨어질 줄 알고 짐도 미리 싸 놓았던 거고?”
“네.”
“하하, 재밌다. 너, 이제 거기 방송국 출연 못 한다.”
박 대표가 웃다가 수철에게 엄포를 놓았다.
“괜찮아요, 다른 방송국도 안 갈 건데요.”“하하, 농담이야. 아마 너 출연시키려고 줄을 설 거야. 벌써 네 전화번호, 작가들 사이에서 다 돌았을걸?”
“진짜요?”
“그래. 방송국 생리가 그런 거야, 인기만 있으면 적도 동지도 없어. 시청률만 있지.”“그럼 전화번호 바꿔야 하나요?”“그러지는 마. 너도 이런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어. 언제까지나 계속 피할 수는 없잖아.”
“아……. 네.”
“암튼 오늘 첫 방송인가?”“네, 그렇게 들었어요.”“나도. 시간 맞춰서 봐야겠다.”
“보시려고요?”
“그래, 얘네들 재편집도 못 하고 그냥 내보낼 텐데 봐야지. 재밌잖아? 큭큭.”
박 대표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계속 큭큭댔다. 수철은 박 대표를 멀뚱히 쳐다봤다.
“쌤, 여쭤볼 말이 있어요.”
“뭔데?”
“피아노 선생님 한 명 소개해 주실 수 있어요?”“피아노 선생은 왜?”“손가락 연습 좀 하려고요.”
“손가락 연습?”
박 대표는 의아하게 되묻다가 이유가 생각났다. 트럼펫 연주자에게 들은 얘기가 있었다.
“아, 너 영국 공연 때문에 그러는구나?”
“네.”
수철은 오디션에 참여하느라 트럼펫 연주자의 뉴욕 공연에 가지 못했다. 대신 몇 주 후에 열리는 영국 공연과 이어지는 호주 공연에는 참여하기로 했다.
수철은 미안한 마음에 비는 시간 동안 트럼펫 연주자가 아쉬워했던 손가락 연습을 해 볼 생각이었다. 손 모양을 잡아서 트럼펫 연주자를 놀래 주고 싶었다.
훈련을 많이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소리에서 차이가 난다.
그건 아무리 천재라도 어쩔 수 없다.
손가락 근육에서 차이가 나기에 미세하게 거친 부분이 생긴다.
그건 수철도 알고 트럼펫 연주자도 안다.
‘손 모양만 좀 잡으면 퍼펙트인데.’
트럼펫 연주자의 눈에는 그것이 옥의 티였다.
귀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미세한 거침은 분명 소리의 카타르시스를 떨어트린다.
수철도 그걸 알기에 이번 기회에 트럼펫 연주자의 아쉬움도 덜어 주고, 그동안 껄끄러웠던 부분도 해소할 생각이었다.
몇 주간의 도전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외국 공연에서 트럼펫 연주자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 싶었다.
그것이 지난 뉴욕 공연을 펑크 낸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2주간의 시간이 비자 수철은 망설임 없이 이 시간을 연습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손가락 연습이면, 클래식 피아노 교수가 제격이긴 한데. 연습할 시간이 돼? 몇 주 후에 출국하는 거 아닌가?”
“2주요.”
“2주 만에 훈련이 될까? 이게 속성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혼자서 연습할 수 있는 연습법을 배우려고요. 그래서 갈 때까지는 열심히 해 볼 생각이에요.”“그렇다면 한번 해 봐. 선생은 내가 알아봐 줄게.”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손가락 연습은 재능으로 안 되는 거 알지?”
“네, 헤헤.”
수철은 박 대표의 말에 멋쩍게 웃었다.
* * *
다음 날, 집을 나서는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수철아! 너 어제 방송 안 봤지? 완전 대박 났어! 캬캬. 너, 비주얼 3인방이래. 그중에 네가 탑이고, 네 모습 완전 멋있게 나왔어!”
다혜는 흥분해서 말하는데 수철은 시큰둥했다.
“다혜야, 나중에 통화하자. 나 지금 나가야 해.”“아침부터? 어디 가는데? 너, 혹시 혼자서 인터뷰?”“그런 거 아냐. 피아노 레슨 가야 해.”
“누구 가르쳐?”
“배우러 가는 거야.”“네가 피아노를 배운다고? 그게 뭔 소리야?”“다혜야, 나 늦었어. 갔다 와서 전화할게.”“그래……. 알았어.”
수철은 전화를 끊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