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런던의 두 한국인(1)
“첫 번째 공연은 런던 소호(Soho)에 있는 ‘로니 스콧’ 재즈 클럽에서 할 거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클럽이지. 가 보면 너도 마음에 들 거야.”
“네, 기대돼요.”
“그리고 두 번째 공연은 음악학교의 재즈 클래스 참여해서 렉쳐(Lecture)로 진행될 거야. 학교 강당에서 연주하고 학생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을 갖는 거지.”
“흥미롭네요.”
“그래, 그리고 세 번째 공연이 가장 중요한 공연인데, 런던과 브라이턴에서 한 번씩 하는 거야. 유명 악기 유통 회사 코익에서 스폰하는 클리닉 공연이야. 그래서 거기서 유통하는 악기를 쓰면서 공연을 할 거야. 이 공연이 우리 이번 연주 여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 이 회사에서 우리 항공료랑 숙박비를 다 제공하거든.”
“아, 그렇군요.”
누가 비싼 항공료와 숙박비를 제공하고, 공연 수익까지 챙겨 주나 의문이었는데 궁금증이 풀렸다.
“나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새로운 모델의 악기로 공연하게 될 거야. 그리고 재즈 뮤지션 지망생들의 질문을 받는 강연 형태로 진행될 거고.”
“알겠어요.”
“그리고 마지막 공연은 브라이턴 아트홀에서 열리는 공연이야. 브라이턴은 바닷가 근처여서 분위기가 좋아. 런던에서 공연이 끝나면 바로 차로 이동할 거야. 시간은 두 시간 정도 걸리고.”“영국 바다는 어떨지 궁금해요.”“브라이턴의 바다는 산책하기 좋은 곳이야. 바다가 정말 파랗고 아름답지.”
영준이 형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브라이턴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고, 다음 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서 저녁 비행기로 호주로 넘어갈 거야.”“호주도 정말 기대돼요. 신기한 동물도 많잖아요.”“하하, 신기한 동물들 많지. 캥거루도 있고, 코알라도 있고. 왠지 너랑 같이 동물원을 한번 가야 할 거 같다.”“네, 좋아요. 저 동물원 완전 좋아하거든요.”“알았어, 시간을 한번 만들어 보자. 시드니에도 동물원이 있어. 나도 예전에 가 본 적이 있는데, 우리가 공연하는 근처에서 배를 타고 1시간 정도 가면 될 거야.”
“진짜 가실 거죠?”
“하하. 그래, 알았어.”“와, 벌써 기대되네요.”“기대할 만하지. 호주,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사랑스러운 곳이지.”
영준이 형은 눈앞에 호주가 보이는 듯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우리가 런던에서 시드니로 넘어갈 때는 고생 좀 할 거야. 22시간이 넘게 걸리거든. 다른 곳을 거치기도 하고.”“22시간이면 비행기에서 하루를 보내는 거네요?”“그런 셈이지. 다리가 많이 저릴 거야.”
“그렇겠어요.”
‘12시간이 이 정도인데 22시간이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비행깃값을 비싸게 주더라도 장거리 여행은 일등석을 타야지 하면서도 막상 예약할 때가 되면 그렇게 안 돼. 그 돈으로 여행을 더 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 하하.”“네, 그럴 거 같아요.”
다음번엔 일등석을 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영준이 형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세한 호주 일정은 호주로 이동할 때 다시 알려 줄게.”
“네.”
영준이 형은 말을 멈추고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 생각나는 게 있는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번 영국에서 같이 공연할 연주자들 궁금하지?”
“네.”
“나랑 같은 학교에 다닌 친구들이야. 연주 잘하고, 성격도 좋아. 총 3명이고. 이름은 샘, 데이비드, 알베르토야. 샘은 드럼, 데이비드는 기타, 그리고 알베르토는 콘트라베이스를 쳐. 샘과 데이비드는 영국 사람이고, 알베르토는 이탈리아 사람이야.”“네……. 그런데 제가 영어를 못해서 어떡하죠?”
“전혀 못 해?”
“인사 정도만 할 줄 알아요.”“그거면 됐지. 나머지는 음악으로 소통하면 돼.”
영준이 형은 영어는 중요하지 않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수철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저는 좀…….”“나도 처음에 영어 못했지만 같이 공연하는 건 문제가 없었어. 어려운 건 내가 통역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네, 감사해요. 한국 가면 영어 공부부터 해야겠어요.”“좋은 생각이야. 배워 놓으면 아무래도 편하지. 필요하면 말해, 내가 도와줄게. 선생도 소개해 주고.”
“네, 감사해요.”
“그리고 네가 영국을 처음 가는 거니까, 내가 짬짬이 관광을 시켜 줄게. 가이드해 줄 테니까 기대해.”
“네, 감사해요.”
“하하. 내 형편없는 가이드 실력을 보면 후회할 수도 있어.”“헤. 그럴 리가요.”
수철은 긴 시간 동안 영준이 형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음악을 하게 된 동기도 들었고, 힘들었던 유학 시절 얘기도 들었다. 영준이 형은 풍기는 외모와 달리 소탈한 사람이었다.
수철은 공연보다 관광이라는 말에 끌렸다. 영국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며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한 번의 기내식, 한 번의 간식, 다리 저림. 영준이 형과 대화를 나누다, 영화를 보다가, 잠깐씩 잠을 자다가.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지루해질 무렵 마지막 기내식이 나왔다. 수철은 닭고기를 포크로 집어 먹으며 곧 나타날 영국의 모습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비행기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런던이었다.
상공에서 바라보는 런던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비행기는 런던 히드로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수철의 첫 비행기 여행은 12시간 만에 끝이 났다.
수철은 땅을 밟는 순간 땅의 소중함을 느꼈다. 몇 시간 전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에 부풀었는데, 지금은 땅이 좋다. 인간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고 공항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지금 우리가 가는 호텔은 작고 아담해. 비싼 호텔은 아니란 뜻이야.”
“전 괜찮아요.”
“그렇다고 걱정하지는 마, 나쁜 호텔은 아니니까.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하고 쾌적해.”
“네.”
“이 호텔을 잡은 이유는 우리가 공연을 할 클럽도 가깝고, 또 내일 멤버들 만나서 합주할 곳도 가까워서야.”
“아, 네.”
“소호(Soho)는 런던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야. 우리나라 명동이랑 홍대를 섞어 놓은 것 같아.”
“아…….”
수철은 그 말에 소호가 어떤 곳일지 대충 상상이 됐다.
영준이 형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외국에 나와 보면 우리나라가 참 좋다는 걸 느끼게 돼. 대중교통도 그렇고, 깨끗한 거리도 그렇고, 안전한 것도 그렇고 우리나라가 최고지. 여기 지하철은 냄새도 심하고, 화장실도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택시비도 엄청 비싸.”
* * *
영준이 형의 말대로 호텔은 작고 아담했다. 1층에는 카페테리아가 있어서 파라솔에 앉아 간단한 식사도 할 수 있었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기내식은 양이 적어서 저녁을 먹을 겸 구경을 시켜 주겠다는 영준이 형을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와서 걷다 보니 건물들이 특이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하나하나가 제각각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음악가 같았다. 서로 다르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건물들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자, 영준이 형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런던스럽지?”
그 말이 가장 적합했다. 여기가 바로 런던이었다. TV에서 보던 빨간 이층 버스가 돌아다녔고, 거리에는 버스킹하는 음악가들이 보였다.
영준이 형 말대로 런던스러웠다.
소호의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많은 사람이 분주히 오갔고, 상점과 카페, 술집들이 즐비했다.
“어때? 명동이랑 홍대를 섞어 놓은 거 같지?”“네, 비슷한 거 같아요.”“여기 소호가 런던에서 정말 유명한 곳이야. 이곳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난 이곳을 좋아해. 생기가 넘치잖아. 난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있는 이런 곳이 좋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재즈 클럽도 여기에 있고.”
영준이 형의 말대로 소호는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도 다양한 모습이었고, 카페나 술집의 모습도 그랬다.
“옛날에 모차르트도 여기 살았었대.”
“와, 진짜요?”
“그래, 잠깐 살았다고 들었어. 그때는 아마 이렇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소호(Soho)라는 말이 옛날에 사냥꾼들이 동물들을 몰며 지르던 소리라고 하더라고.”“동물 몰이? 어떻게 ‘소호’ 하면서 동물을 몰았을까요?”
수철은 소호를 몇 번 발음해 보면서 갸웃했다. 동물 몰이가 될 거 같지 않은 발음이었다.
“그러게. 나도 그게 좀 신기해. 소만 몰았나?”
“네?”
“아, 미안.”
수철도 보조를 맞췄다.
“소호면 소와 호랑이를 같이 몬 것 아닐까요?”
“뭐?”
“아, 죄송여.”
몇 분을 걸어가다 영준이 형이 손가락을 뻗었다.
“저기가 내일 공연할 ‘로니 스콧’이야. 내가 영국에서 가장 사랑하는 클럽이지.”
영준이 형이 가리킨 곳에는 ‘Ronnie Scott’s’이라는 간판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공연을 보려고 줄을 선 사람들이었다.
길을 건너 클럽 앞으로 다가갔다. 익숙한 음악이 들려왔다. 소리만 들어도 흥분됐다.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들어가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항상 꽉꽉 차서 매진이야.”
“그럴 것 같아요.”
“분위기가 정말 좋아 연주할 맛 나지. 관객들의 수준도 보통이 아니야, 눈을 감고 신음을 내며 듣는 사람도 있어. 소리가 주는 쾌감을 만끽하는 거지. 극대화시켜서 말이야. 연주자보다 관객이 더 아티스트 같다니까? 하하.”
영준이 형은 재밌다며 껄껄 웃었다.
“내일 공연이 정말 기대돼요. 기억에 남는 공연이 될 거 같아요.”
수철은 그런 분위기에서 연주한다는 게 정말 기대됐다.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로니 스콧이라는 이름 들어봤어?”“아니요, 이름이었어요?”
수철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에 멀뚱히 영준이 형을 쳐다봤다. 로니 스콧이 클럽이 아니라 사람 이름이었나 보다.
“로니 스콧은 트럼펫 연주자야. 색소폰도 부쉈고, 작곡도 하셨지.”
“아…….”
영준이 형과 연결 고리가 있었다.
“연주하시다가 나중에 여기에 클럽을 만들어서 운영하셨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말이야. 여기서 연주한 유명 재즈 뮤지션들은 셀 수 없이 많아.”“그렇겠네요. 오래됐으니까요.”
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트럼펫 연주자분들만 얘기해도 우선 마일즈 데이비스가 있고.”
‘헉, 마일즈 데이비스!’
수철은 ‘마일즈 데이비스’라는 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수철이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이다.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이 연주했던 곳에서 공연한다는 생각에 심장이 빨라졌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이에요.”“하하, 수철이 너도 좋아하는구나? 마일즈 데이비스 선생님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지.”“네,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죠.”“찰스 파커 선생님, 디지 길레스피 선생님도 이곳에서 연주를 하셨어. 여기를 거쳐 간 유명 연주자들이 엄청나게 많지.”“와! 찰스 파커, 디지 길레스피!”
두 연주자 모두 비밥 재즈의 레전드 연주자들이다.
영준이 형은 트럼펫 연주자답게 자신의 선배 뮤지션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전통과 역사가 있는 곳이야.”“여기서 공연할 수 있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벌써 심장이 뛰어요. 형에게도 감사해요.”“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 나도 여기서 연주하는 걸 좋아해. 트럼펫 연주자가 만든 클럽이어서 그런지 트럼펫 소리가 다른 곳과 다르게 들려. 마치 클럽 곳곳에 트럼펫 소리가 스며들어 있는 느낌이랄까? 클럽 안의 사물들이 모두 트럼펫 소리에 반응하는 느낌이야.”
영준이 형은 연주자답게 예술적인 표현을 했다. 수철도 그 느낌을 알 것 같았다.
영준이 형은 흐뭇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왠지 악기도 여기서는 생기가 도는 것 같아. 그래서 영국 공연을 오면 항상 여기서 공연을 하려고 해. 물론,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곳도 아니지만.”“네, 그럴 것 같아요.”
수철은 클럽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대꾸했다.
“좀 피곤하지? 오늘은 저녁 먹고 일찍 쉴까?”
“네.”
시차 탓인지 걸어 다니며 구경하는데 피곤이 몰려왔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 * *
합주실은 널찍널찍했다. 합주실이라기보다 스튜디오 같았다. 수철은 합주실부터 마음에 들었다.
“Hey! Young―joon! It’s been a while. How are you?”
같이 공연할 연주자들이 영준이 형을 보자 반갑게 다가와 포옹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답게 격하게 반가움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