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런던의 두 한국인(2)
샘, 데이비드, 알베르토는 영준이 형과 대화를 나누다 고개를 돌려 수철을 봤다.
샘이 먼저 다가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Nice to meet you. You must be Soo―chul.”
멤버들은 수철을 알고 있었다. 샘이 먼저 인사하자, 하나둘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수철도 웃으며 영어로 인사했다.
“Nice to meet you. too.”
태어나서 처음 하는 영어였다.
인사하고 커피 한 잔씩 하며 대화를 나눈 후, 곧바로 연습이 시작됐다.
장난스럽던 연주자들의 모습은 연습이 시작되자 달라졌다. 표정이 돌변했다. 대단한 집중력을 보이며 연주에 빈틈이 없었다. 역시 프로였다.
수철은 특히 샘의 드럼 연주가 놀라웠다. 데이비드와 알베르토의 연주 실력도 대단했지만, 샘의 드럼 연주에는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테크닉이 있었다. 레벨이 달랐다.
음악은 총 다섯 곡이었다. 유명한 재즈곡 두 곡에 영준이 형, 데이비드, 알베르토의 자작곡이 더해졌다.
빠라바라. 빠라바라. 빰! 빰! 빰!
연주자들은 마치 오랜 시간 같이 연주한 것처럼 한 번에 착착 맞아떨어졌다.
수철도 건네받은 악보를 보며 집중해서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다 같이 헤드(Head, 곡의 원 멜로디)를 연주하고 나서 영준이 형의 트럼펫 임프로바이제이션(Improvisation, 즉흥연주)이 시작됐다.
임프로바이제이션은 각각의 악기 연주자가, 원곡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해석해서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물론 틀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매번 분위기에 따라 연주는 달라진다.
곡만 있고 연주는 비어 있는 것이다.
영준이 형의 즉흥연주가 끝나고, 이번엔 수철의 즉흥연주가 시작됐다. 수철은 2주간의 피나는 연습 탓인지 손가락이 예전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수철의 즉흥연주가 계속될수록 연주자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나둘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샘은 빠르게 손목을 움직여 하이햇(Hihat)을 두드리며, 데이비드는 깁슨 기타를 안고 손으로 화성을 뜯으며, 알베르토는 손가락으로 콘트라베이스 줄을 튕기면서 수철을 놀라운 눈으로 쳐다봤다.
영준이 형은 몇 번 경험이 있으니까, 트럼펫을 손에 쥔 채 눈을 감고 수철의 즉흥연주를 즐겼다. 중간중간 수철의 연주 사이에 짧은 트럼펫 소리로 조미료를 쳤다.
수철의 즉흥연주가 끝나고 기타, 베이스, 드럼 모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즉흥연주를 했다. 그리고 다시 헤드로 돌아와서 한 곡의 연주를 마쳤다.
짝짝짝!
음악이 끝나자, 샘, 데이비드, 알베르토가 수철을 보며 박수를 쳤다.
박수 치던 알베르토가 놀란 눈으로 영준이 형에게 물었다.
“영준! 너 어디서 이런 엄청난 피아니스트를 데리고 온 거야?”
영준이 형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말했잖아, 놀라운 코리안 피아니스트가 올 거라고.”“하하, 이번 공연은 정말 기대가 되는걸? 런던 재즈 씬이 떠들썩하겠어!”
알베르토가 함박웃음을 짓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이 계속될수록 그들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찬사가 흘러나왔다.
“죽인다.”
“대단하다.”
“끝내준다.”
그런데 정작 영준이 형이 놀란 건 수철의 즉흥연주가 아니었다.
연주는 당연히 대단했고, 피아노 터치 소리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수철이 연주할 때 힐끔힐끔 수철의 손을 쳐다봤다.
음악이 끝나고 물었다.
“수철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네? 뭐가요?”
“손 말이야.”
“헤헤, 연습 좀 했어요.”“넌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도 다양하네.”
영준이 형은 수철을 보며 혀를 찼다.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오기 전에 시간이 좀 남았었어요.”“좀 남아? 며칠 동안 연습을 했다는 말이네.”
“네.”
“그건 재능이랑 상관없는 건데. 며칠 연습한다고 잡히는 게 아닌데, 참. 넌…….”
영준이 형은 잠시 수철을 빤히 보다 말을 이었다.
“어쨌든 손 모양 잡히니까 좋지?”“네, 연주하기가 편해졌어요.”“이젠 내가 지난번에 얘기한 말뜻을 이해했겠네?”
“네, 헤헤.”
수철은 그때가 생각나서 멋쩍게 웃었다.
“자, 다시 가 볼까?”
영준이 형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연주를 즐겼다. 시간이 갈수록 합주는 연주한다는 느낌보다 연주하며 논다는 느낌이 들었다. 맞물린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영준이 형과 그의 오랜 친구들은 음악의 바퀴가 척척 맞아서 돌아갔다.
연습이 끝나고 알베르토가 수철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연주에 관해 물어보는 것 같은데 수철은 알아듣지 못했다.
“Soo―chul. hm. hm…….”
알베르토는 뭔가 묻고 싶은 표정인데, 말은 못 하고 계속 입만 달싹였다. 수철이 아는 쉬운 단어로 얘기해야 하는데, 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영준이 형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둘은 잠시 마주 보다 밖으로 나왔다.
* * *
‘로니 스콧’ 재즈 클럽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연주자와 관객이 소통하기 딱 좋은 구조였다. 무대를 중심으로 삥 둘러서 타원형으로 테이블이 놓여 있어서, 식사하며 편안하게 공연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술을 주문하는 바(bar)도 있었다.
천장에는 둥그런 형태의 등이 달려 있어서, 붉은 조명을 비추며 내부의 밝기를 조절했다.
“수철아, 저쪽 벽을 봐 봐.”
벽면에는 재즈 연주자들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붙어 있었다.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유명한 연주자들이었다. 수철은 신기한 눈으로 액자를 하나하나 다 살펴봤다.
“이번 연주 여행에서 밴드의 이름은 ‘영준과 친구들(Young―jun and Friends)’로 하기로 했어.”
이번 공연은 악기 유통 회사가 영준이 형에게 컨택을 해 와서 일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밴드의 이름을 ‘영준과 친구들’로 정했다.
멤버들은 간단히 리허설을 하고 클럽에 있는 스텝들과 대화를 나눴다. 오랫동안 연주를 하다 보니 런던 재즈 씬의 사람들은 서로 잘 아는 모습이었다.
다음 스테이지(Stage)에서 공연할 밴드까지 등장하자, 이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눴다. 런던 재즈 씬은 서울과 다른 모습이었다.
공연이 가까워지자, 객석은 빼곡하게 자리가 메워졌다. 클럽에 입장해서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음식을 주문하고 맥주를 사고 바쁘게 테이블을 세팅했다. 유명한 재즈 클럽이라는 소문을 듣고 구경 온 관광객도 보였다.
수철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다 영준이 형에게 물었다.
“형, 이번 연주 여행엔 보컬리스트는 없는 거예요?”“영국 공연에선 없고, 호주 공연에선 보컬리스트가 붙을 거야.”
“그렇군요.”
“호주에선 엄청난 보컬리스트가 같이할 거니까, 기대해. 너도 놀랄 거야.”
“그 정도예요?”
“응.”
시간이 되자, 멤버들은 모두 무대 위로 올라갔다.
영준이 형이 맨 앞에서 트럼펫을 들고 섰고, 맨 뒤에는 샘이 드럼 스틱을 쥐고 의자에 앉았다. 수철은 무대 왼쪽의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았다. 오른쪽으로는 알베르토가 콘트라베이스를 들고 자리를 잡았고, 그 옆으로 데이비드가 의자에 앉아 기타를 안고 있었다.
곧이어 쩌렁쩌렁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음악이 시작됐다.
빠라바라. 빠라바라. 빰! 빰! 빰!
‘로니 스콧’은 영준이 형의 말대로 소리가 달랐다. 이곳을 거쳐 간 연주자들의 소리가 벽에 녹아 있는 것 같았다. 소리의 울림이 달랐다. 연주할 맛이 났다.
관객들의 분위기도 달랐다. 공연이 시작되자, 이들은 말을 멈추고 소리에 집중했다.
음악은 그루브하게 진행됐다.
연주하면서 수철은 느꼈다. 이것이 바로 라이브 사운드라는 것을. 그리고 하나 더, 재즈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클럽도, 관객도, 악기도, 소리도, 하다못해 작은 조명조차도 우리와 달랐다. 그들이 훨씬 재즈스러웠다.
짝짝짝! 짝짝짝!
각각 악기의 임프로바이제이션이 끝날 때마다 박수가 쏟아졌다.
특히 수철의 임프로바이제이션이 끝났을 때는 박수와 함께 환호성도 들려왔다. 새로운 피아니스트의 등장에 런던이 환호했다.
영준이 형은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다른 연주자들도 훌륭했지만, 오늘 공연에서는 수철과 영준이 형이 단연 돋보였다. 두 명의 한국인은 첫 공연에서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영준이 형은 런던에 팬도 있었다.
그들은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연주가 끝날 때마다 환호했다.
이들은 뮤지션에 대한 존중이 대단했다. 놀라울 정도였다. 수철에게도 그 존중과 존경심이 전해졌다. 감동했다.
음악을 하려면 런던에서 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준이 형의 말대로 관객의 호응은 대단했다. 대단함을 넘어 남달랐다. 그냥 관객이 아니라 진지하게 재즈의 선율과 음의 쾌감을 즐기는 마니아들이었다.
눈을 감고 소리를 음미하는 사람 중에는 소리가 주는 카타르시스에 입맛을 다시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수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즈도, 우리가 연주하는 악기도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만약 국악을 하는 외국인이 한국을 한 번도 안 온다면,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닐까?
수철은 지금 우물을 벗어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를 내려온 멤버들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수철에게도 사람들이 다가왔다. 수철은 그들의 투박한 영어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난감했다. 영준이 형이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형도 찾아온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수철은 땡큐. 땡큐. 하면서 내민 손을 잡고 일일이 고개를 숙였다.
수철의 등 뒤에서 어메이징, 러블리 가이 같은 말이 들려왔다.
공연이 끝나고 멤버들은 펍(Pub)에 모여 성공적인 첫 공연을 자축했다.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부딪쳤다.
* * *
“수철아. 내일은 네 곡도 한 곡 하는 게 어떨까? 우린 모두 자작곡을 하는데 네 곡은 없잖아.”
아침을 먹는데, 영준이 형이 내일 대학에서 벌어지는 공연에 수철의 자작곡을 올리자는 제안을 했다.
“제 어떤 곡이요? 따로 만든 곡이 없는데 지금 만들까요?”“하하, 지금 만든다고?”“네, 안 그래도 어제 공연하면서 생각해 둔 곡이 있는데, 만들어 볼게요.”“하하. 넌, 참…….”
영준이 형은 수철을 보며 헛웃음 소리를 냈다.
“그 곡은 잠시 미뤄 두고, 내 말은 지난번 축제에서 내가 트럼펫으로 연주한 그 곡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야.”
“아하!”
“난 아직도 그 멜로디가 머릿속을 맴돌아. 단언컨대 반응이 좋을 거야. 여기 런던도 너의 음악을 좋아하게 될 거야.”“그러면 저는 영광이죠. 알겠어요. 제가 금방 재즈 편곡으로 바꿀게요.”“아니야. 그럴 필요 뭐 있어? 여기 훌륭한 연주자들이 있는데 같이하면 되지. 리드 시트(lead sheet, 편곡의 요점만 기록한 악보)만 만들어 줘.”“네, 알겠어요. 바로 만들게요.”
수철이 서둘러 마지막 빵을 집어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영준이 형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제목도 정해야 할 거 같은데? 지난번엔 제목이 명확하지 않았잖아.”
“제목은 있어요.”
“있어?”
“네, 영화 없는 영화음악이요.”“영화 없는 영화음악?”“네, 쌤이 붙여준 별명 같은 제목이에요.”“음……. 제목 멋있다. 곡이랑도 잘 어울리고. Movie music without movies. 아니면 Film music without film.”
“너무 긴가요?”
“아니야, 좋아. 마음에 든다. 선배님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지 몰랐네.”
영준이 형은 수철의 곡 제목을 마음에 들어 했다.
수철은 아침을 먹고 빠르게 ‘Film music without film.’의 악보를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합주가 시작됐다.
딴! 딴! 빠, 빠. 빠― 바밤―!
수철이 강력한 힘으로 잔뜩 텐션 된 피아노 화성을 연이어 두 번 눌렀다. 그러자 트럼펫이 버튼을 누르며 부드러운 멜로디로 따라 들어왔다. 곧이어 다른 악기들도 따라 들어왔다.
“오…….”
수철의 자작곡 합주를 마치고, 멤버들은 또다시 입이 벌어졌다. 수철을 보는 눈빛도 달라졌다. 경이롭다는 말까지 내뱉었다.
* * *
“밖에선 몰랐는데, 안에 들어오니까 엄청 크네요.”
수철은 음악학교의 강당을 둘러보며 탄성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