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런던의 두 한국인(3)
학교 강당은 예술 홀을 방불케 할 정도로 크고 웅장했다. 큰 콘서트를 열어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천장이 엄청나게 높았고, 객석도 얼추 2천 석은 되어 보였다. 밖에서 볼 때는 학교라기보다 백화점 같은 건물이었는데, 내부의 모습은 달랐다.
“대단하네요.”
“학교에서 투자를 많이 하는 모양이야.”
영준이 형의 말처럼 악기 세팅을 하는데도 여러 명의 스태프가 달라붙었다. 스태프들은 신중하게 악기의 정확한 위치를 잡았고, 드럼과 피아노 세팅도 직접 했다. 특히 드럼 세팅은 3명이나 달라붙었다.
샘은 이런 모습이 익숙한 듯 한걸음 떨어져서 구경만 했다.
악기 세팅을 마친 후, 사운드 체킹을 하며 음향 시스템을 조절했다. 강당은 클럽과는 소리가 달랐다.
관객과 호흡하는 라이브 느낌은 떨어지지만, 공간이 주는 울림이 좋았다.
“울림이 좋네요.”
“그래, 넓고 높은 공간이 소리의 입체감을 만들어 주고 있어.”
강당에는 엠비언스(Ambiance, 공간감)가 있었다. 특히 드럼의 소리는 악기를 만들 때 예상했던 소리가 다 나오는 것 같았다. 콘트라베이스와 같이 움직이며 만들어 내는 소리는 예술이었다.
두둥, 둥두. 두드두둥. 두르둥.
손가락으로 튕기는 베이스 줄은 고무줄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말랑말랑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콘트라베이스 소리는 드럼의 공격적인 소리를 중화시켰다.
“학교가 젊으니까 악기도 장비도 다 젊네.”
영국의 음악학교 하면 보통은 전통과 역사를 떠올리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았다. 역사도 짧고, 규모도 다른 음악학교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다. 백화점 같은 건물에 새로 만들어진 콘설베토리(Conservatory, 음악학교)였다. 하지만 신생이라서 그런지 장비와 악기는 어디보다 빵빵했다. 강당의 시스템도 최신이었다.
공연을 보러 들어온 학생들의 분위기도 다른 곳과 달랐다. 장비들은 최신이었지만, 학생들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곳에 비해 관객의 호응도가 많이 떨어졌다.
웅성거리며 들어온 학생들은 주섬주섬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음악을 들으러 온 학생들과 학점을 따기 위해 들어온 학생들의 모습은 극명하게 달랐다. 한쪽은 기대감에 차서 다소곳이 무대를 보며 앉아 있었고, 다른 한쪽은 웅성대며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껌을 씹는 학생도 있었다.
수철이 이상하게 쳐다보자 영준이 형이 옆에서 이유를 알려 줬다.
“저 친구들은 악기를 전공하는 학생은 아닐 거야.”
“그러면요?”
“음악 매니지먼트나 히스토리 수업을 듣는 학생이겠지. 학점을 따야 하니까 와서 있는 거야.”
처음 알았다, 음악학교에 연주를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학생들의 반응은 재밌었다. 대부분은 환호하고 박수 치고 눈을 반짝이며 공연과 수업을 관람했지만, 몇몇은 강의를 듣듯이 조용하게 수업에 임했다. 그리고 몇몇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지루해했다. 공연이 재미없다는 표정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교수의 지도로 학생들의 질문이 시작됐다.
질문은 오늘의 주인공인 영준이 형에게 쏟아졌다.
학생들답게 연습법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다. 영준이 형은 유창한 영어로 친절하게 답변을 했다.
“연습 시간은 하루에 몇 시간이나 돼요?”“지금은 여행 중이라 많이는 못 합니다. 3시간 정도 하고 있어요.”
수철은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끔 질문이 날라오면 영준이 형이 통역을 해 줬다.
“보통 재즈 피아니스트는 연주할 때 멜로디를 입으로 읊조리며 건반을 치는데, 왜 거기 연주자는 입으로 읊조리지 않아요?”“저는 머릿속으로 읊조려요.”
연주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는 피아노 칠 생각만 한다고 답했다.
엉뚱한 질문도 날라왔다. 그럴 땐 선생이 주의를 시켰다. 어떤 질문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선생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영준이 형도 웃기만 할 뿐 번역을 하지는 않았다.
찰칵!
맨 앞에 앉은 한 짓궂은 여학생은 허락도 없이 수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러더니 휴대전화를 흔들었다.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손짓을 했다. 수철은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학교에서의 공연은 수철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느낀 것도 있고, 깨달을 것도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연주자가 나타나도 졸린 건 졸린 것이다. 아무도 그녀의 잠을 깨우지는 못할 것이다. 하이틴 아이돌이라면 모를까.
* * *
“형. 브라이턴에서는 다른 곡을 해 보려고요.”“다른 곡? 혹시 지난번에 말한 그 곡?”
“네.”
“벌써 만들었어?”
“네, 구성은 다 끝냈어요.”“한번 보여 줘 봐.”
“금방 악보 만들어서 보여 드릴게요. 아직 여기에 있어요.”
수철은 머리를 두드렸다.
“아, 크크. 내가 널 잠시 잊고 있었네, 그럼 피아노로 먼저 들려줘 봐. 어떤 음악일지 궁금하다.”
“네.”
둘은 피아노로 이동했다.
수철은 그랜드피아노 뚜껑을 열고 천천히 자작곡의 멜로디와 화성을 누르기 시작했다.
“음.”
영준이 형은 피아노를 치는 수철을 바라보다 눈을 감고 감상했다.
수철의 자작곡 연주가 끝나자 영준이 형은 늘 그렇듯 또다시 감탄했다.
“놀랍다, 놀라워. 정말 대단해, 이런 곡을 하루 만에 뚝딱 만들다니.”
“마음에 드세요?”
“응, 아주 많이. 곡 분위기도 예술이야. 그런데 멜로디는 트럼펫을 염두에 두고 만든 건가?”
“네, 맞아요.”
영준이 형은 케이스를 열어 트럼펫을 꺼냈다.
“시작해 볼까?”
“네.”
바로 피아노와 트럼펫의 듀오(duo)가 시작됐다. 수철이 부드럽게 첫 화성을 눌렀다.
딴―
빠암―
피아노에 맞춰 트럼펫이 메인 선율을 불기 시작했다. 트럼펫을 염두에 두고 만든 음악답게 피아노만 연주했을 때보다 선율이 더 맛깔났다.
트럼펫의 선율이 끝나자, 곧바로 수철의 즉흥연주가 시작됐다. 영준이 형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리듬을 탔다. 중간중간 트럼펫으로 치고 들어와 연주의 맛을 더했다.
수철의 즉흥연주가 끝나자 이번엔 영준이 형의 즉흥연주가 시작됐다.
둘은 멈추지 않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동안 연주를 계속 이어갔다.
연주가 끝나고 영준이 형이 물었다.
“제목은 붙였어?”
“네, Two Koreans In London이요.”“런던의 두 한국인? 우리를 말하는 건가?”“네, 맞아요. 런던에 와서 느꼈던 것을 담아 봤어요.”“아, 그래서 템포도 바뀌고 색깔도 바뀌는 거구나.”“네, 며칠간의 모습을 담았거든요.”
영준이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Two Koreans In London……. 마음에 든다. 음악도 멋있지만 곡의 색깔이 계속 변하면서 많은 생각이 드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어떤 생각이요?”
“이방인 같은 느낌도 들고, 비 오는 런던 거리에 서 있는 느낌도 들고, 자유롭게 세상을 떠도는 여행자가 된 듯한 느낌도 들고…….”
“와…….”
수철은 자신이 곡을 만들며 떠올렸던 것을, 영준이 형도 똑같이 느꼈다는 것에 놀랐다.
“왜 놀라?”
“소름 돋았어요. 방금 형이 말한 그림을 생각하며 곡을 만들었거든요.”“캬, 역시 우리는 통하는 데가 있어.”“네, 그런 것 같아요.”
수철은 영준이 형과 주먹을 맞부딪쳤다.
“그런데 마지막 엔딩을 독특하게 줬는데, 이유가 있어?”“집시를 생각했어요.”
“집시?”
“네, 우리가 집시잖아요. 헤헤.”“하하! 그렇지, 우리가 집시지. 자유롭게 음악 하며 이 도시를 떠도는 집시 맞지.”
영준이 형은 공감한다며 크게 웃었다.
“Two Koreans In London. 생각할수록 의미가 깊은 곡이야. 두고두고 생각이 나겠어.”“네, 저도 그럴 거 같아요.”“이 느낌 살려서 다시 한번 해 볼까?”
“네.”
수철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건반을 눌렀다. 영준이 형도 빠르게 트럼펫의 버튼을 눌렀다.
런던의 한 연습실에서 두 명의 한국인이 ‘Two Koreans In London’을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고 트럼펫을 케이스에 집어넣은 영준이 형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이 곡은 딱 내가 좋아하는 곡이야.”
“감사해요.”
감탄하던 영준이 형의 눈빛이 갑자기 진지하게 바뀌었다.
“수철아.”
“네.”
“뜬금없는 선생님 같은 말이지만, 넌 그 재능을 소중하게 써야 해. 사람들에게 해피니스를 주도록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내 욕심 같아선 너랑 계속 같이 연주 여행을 다니고 싶은데, 넌 아무래도 작곡에 재능을 쓰는 게 맞는 것 같아. 이게 나의 솔직한 생각이야. 연주자도 좋은 음악이 있어야 연주를 하니까.”“네,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그렇다고 나랑 연주 여행을 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야. 작곡하다 머리 아프면 나랑 같이 돌아다니면서 연주 여행을 하는 거지. 좋잖아? 자유롭고.”“네, 저도 좋아요. 형이랑 연주 여행은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그래.”
영준이 형은 말을 멈추고 잠시 수철을 바라봤다.
“참. 부럽고, 고맙고, 좋고……. 내 감정이 그래.”
* * *
공연장은 악기를 판매하는 큰 건물의 내부에 마련되어 있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새로운 브랜드의 악기가 나올 때마다 유명 연주자를 초청해서 클리닉을 하는 것 같았다.
공연장 한편에는 오늘 구경 온 사람들에게 나눠 줄 기념품들이 쌓여 있었다. 유명 뮤지션의 얼굴이 찍힌 하얀 라운드 티가 눈에 띄었다.
오늘 유통사의 주력 악기는 관악기다. 그러다 보니 영준이 형은 트럼펫뿐만이 아니라 색소폰도 연주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영준이 형의 연주력은 대단했다. 관악기가 주는 매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악기 유통사의 직원들도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질문 있으신가요?”
“네, 저요.”
연주가 끝나고 질문이 이어졌다. 주로 악기 사용에 관해 묻는 초보적인 질문들이 많았다. 두 악기를 비교하며 어떤 악기가 좋냐는 질문들이 많았다.
관악기의 관리 노하우도 물었다. 그리고 데이비드에게는 깁슨 기타와 팬더 기타의 차이점 같은 것을 물었다.
사람들의 질문이 떨어지고 조용해질 무렵, 스텝 중 한 명이 대신 질문을 던졌다. 예상했던 질문이 나오지 않아서였다.
“트럼펫 연주자께서는 연주할 때 무슨 생각을 하나요?”
영준이 형은 프로 연주자답게 능숙하게 대답했다. 분위기를 풀고자 농담을 내뱉었다.
“멜로디 하나하나가 돈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하.”
그 말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고요, 더 좋고 그루브한 멜로디를 뽑아내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죠.”
* * *
다혜는 수시로 전화해서 한국의 소식을 전했다. 수철은 전화 요금 나온다고 짧게 용건만 말하라고 했지만 다혜의 얘기는 길어지기 일쑤였다.
―너, 아마 한국 오면 깜짝 놀랄 거야. 공항에 기자들이 모여 있을 수도 있어. 연예인들처럼 말이야.
“뻥 치지 마. 할 얘기 없으면 끊어.”
수철은 다혜의 말에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
―뻥 아니라니까? 암튼 너, 한국 오면 깜짝 놀랄 거야.
“야, 나 한국 떠난 지 4일밖에 안 됐어.”―그 4일 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고.
“알았어, 나중에 얘기해. 끊는다.”―야, 용수철! 잠깐만, 아직 중요한 얘기가 남았어!
“뭔데?”
―내 선물 뭐 사 올 거야?
뚜― 뚜―
* * *
장 피디는 한결같았다. 아직도 그러고 있었다.
“와이 트리오 연락해 봐.”“와이 트리오는 왜요?”“이 분위기면 용수철 자작곡도 녹음해야 할 거 같지 않아? 편집도 다시 손봐서 분량을 늘리고.”“편집이야 그렇게 하면 되지만 녹음은 하려고 할까요?”“해야지, 그렇게 하기로 계약한 거잖아. 그리고 돈 버는 일인데 안 할 리가 없지. 어서 연락해서 스케줄 잡아 봐.”
장 피디가 피곤한 얼굴로 수익을 올리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을 때, 수철은 템스강에서 유유자적하게 유람선을 타고 있었다.
“아, 시원하다.”
유람선 2층에 앉아서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한가하게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