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57화 (57/239)

#57화. 브라이턴에서의 마지막 하루

영준이 형은 처음 외국을 나온 수철에게 유람선을 타며 런던을 구경시켜 주고 있었다.

수철의 눈엔 모든 게 신기해 보였다.

“저기 다리가 특이하네요. 영화에 나오는 성처럼 생겼어요.”“타워브리지(Tower Bridge)야. 유명한 다리지. 런던의 명물이야.”

“멋있어요.”

“밤에는 더 멋있어. 불빛이 비치면 정말 볼만해.”

“네, 그렇겠어요.”

수철은 야경을 상상하며 다리 양쪽에 서 있는 성 모양의 건축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기 다리 위에 길이 넓어서 걸어 다니기 좋아. 밤에 야경 구경하면서 사진 찍기도 좋고.”

“아, 그렇군요.”

“궁금하면 이따가 저녁때 한번 가 볼까? 관광객들 필수 코스거든. 나도 다리 위를 걸어 본 지 오래됐고.”

“네, 좋아요.”

“그래, 근처 식당에서 저녁도 먹고, 다리도 건너가 보자. 나도 처음 런던에 왔을 때 한번 건너가 보고 못 가 봤었는데, 지금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

영준이 형도 옛날 생각이 나는지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타워브리지를 지나 30분쯤 흘렀을까, 수철의 눈에 커다란 원형 구조물이 들어왔다.

“와, 저게 뭐죠?”

크다는 표현보다 거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둥그런 구조물에 케이블카 같은 것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관람차 같았다.

수철이 등을 돌려 쳐다보자, 영준이 형이 가이드를 시작했다.

“런던 아이(London Eye)라고 부르는 것이야.”

“무슨 뜻이에요?”

“무슨 큰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모양이 눈처럼 생겼잖아? 또 저걸 타면 런던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까 런던 아이로 부르는 거야.”

“아…….”

“저것도 런던의 명물이지. 유럽에서 가장 큰 관람차야. 타 보고 싶어?”“네, 헤헤. 타고 시내를 한번 구경하고 싶어요.”“그래, 왔으니까 타 봐야지. 안 타 보고 돌아가면 계속 생각이 나. 그리고 결국 다음에 왔을 때 타게 돼. 내가 그랬거든. 하하.”“하하. 그럼. 저는 오늘 타 볼래요.”

“좋은 선택이야.”

영준이 형은 일일 가이드답게 런던의 랜드마크가 뭐고, 빅벤이 어떻고, 그리니치천문대가 어떻고 설명해 줬다. 수철은 영준이 형의 설명을 들으며 템스강의 풍경을 마음껏 감상했다.

수철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영준이 형이 물었다.

“어때? 나오니까 좋지?”

“네, 상쾌해요.”

“상쾌해? 하하.”

영준이 형이 느닷없이 크게 웃었다. 수철은 의아하게 쳐다봤다.

“왜 웃으세요?”

“상쾌하다는 말을 오랜만에 들어서.”

“오랜만이요?”

“여기서 상쾌하다는 말은 잘 안 쓰거든.”

“왜요?”

“너 런던 스모그(London smog)라는 말 모르지?”“런던 스모그? 스모그 온 더 워터라는 음악은 알아요. 제 친구가 좋아하거든요.”“하하, 음악을 말하는 건 아니고. 런던의 안개를 말하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매연 같은 거지. 예전에 여기에 공장이 많아서 매일 안개가 자욱했거든. 공기 질이 안 좋았다는 뜻이야.”“미세먼지 같은 거네요.”“그렇지, 미세먼지가 많아서 뿌옇게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안개라고 말한 거지. 그때는 산업발전, 뭐 그런 거 하느라 공기 질을 신경 쓰지 못한 거지. 아마 정확히 측정하기도 어려웠을 거야.”

“그랬겠네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그때의 후유증 탓인지 사람들은 공기를 맡으며 상쾌하다는 말은 잘 안 해. 옛날 기억이 있으니까.”

“아…….”

그제야 영준이 형이 웃은 이유가 이해됐다. 수철은 영준이 형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스마트하다고 하는 이유가 있었다.

영준이 형을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

“형.”

“왜?”

“형처럼 영어 하려면 얼마나 걸려요?”“너의 언어 재능이 음악 재능 같다면 하루면 되지 않을까? 아니, 한 시간이면 되려나? 하하.”

영준이 형은 뭐가 재밌는지 계속 실실댔다.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하하, 미안. 네가 배울 생각이 있으면 한국 돌아가서 내가 좋은 선생 한 명 소개해 줄게.”

“네, 고마워요.”

“기대해, 너만큼 예쁜 친구야.”“네? 제가 예뻐요?”

“아니, 내 말은 비슷한 수준이라고.”“무슨 비슷한 수준이요?”“야. 저기 봐 봐. 거위 진짜 하얗다. 두 마리나 있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밴드 ‘영준과 친구들’은 런던에서 출발해 브라이턴(Brighton)으로 향했다. 점심에 있을 악기점 클리닉에 참여해 연주하고, 저녁에 있을 아트 센터 공연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브라이턴에서의 일정은 런던보다 더 빡빡했다. 하루에 두 번의 공연을 소화해야 한다. 게다가 하루 머물고 다음 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 호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부지런히 차를 몰아 2시간 만에 브라이턴에 도착했다. 브라이턴은 도시는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웠다. 바다도 있었다. 바다에는 산책하는 사람도 있고, 선탠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호텔 앞으로는 관광객들이 무리를 지어 지나다녔다. 휴양도시다운 풍경이었다.

“브라이턴에 왔으니까 바다 구경 좀 하고, 근처에서 점심을 먹자.”

“네, 좋아요.”

다른 멤버들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영준이 형과 둘이서 잠시 바닷가를 산책했다.

“좋지?”

“네.”

모래사장이 끝이 없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여유롭게 모여서 한가롭게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얼마 후, 멤버들과 다시 만나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악기 클리닉이 열리는 장소로 이동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런던과 똑같은 악기 유통사 건물 내부에 공연을 위한 공간이 마련됐다. 런던과 다른 점이라고는 건물이 좀 더 고풍스럽고 색깔이 밝다는 것이었다.

간단한 리허설을 마치고 무대를 기다리던 수철은 특이점을 발견했다. 이곳의 스태프들은 일하는 모습이 한국과 달랐다. 시키는 사람 없이도 묵묵히 맡은 바 일을 진행했다. 하지만 속도가 매우 느렸다. 한국이었으면 ‘빨리빨리’를 외쳤을 것 같다.

공연 분위기는 런던과 큰 차이가 없었다. 모인 사람이 좀 더 적어서 소통하기는 수월했다. 사람들의 질문도 런던과 똑같았다. 클리닉이 끝나자,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념품을 받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곧이어 재즈 매거진의 기자와 인터뷰가 진행됐다.

“이번 ‘바흐 BACH’의 새 모델로 연주해 보신 소감 한마디 부탁합니다.”“네, 이번 모델은 소리가 좀 더 정교해진 느낌입니다. 내구성이 더 좋아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악기를 써 본 후기를 묻고 말하며, 연주자들의 연주에 관한 질문도 던졌다.

기자는 런던 클럽 공연에 대한 소식도 알고 있었다. ‘영준과 프렌즈(Young―jun and Friends)’의 존재도 알고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 같이 악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매거진이 나오면 한국으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영준이 형은 인터뷰도 일정에 포함된 순서라고 알려 줬다.

* * *

클리닉을 마치고 멤버들은 마지막 공연이 열리는 아트 센터로 향했다.

어떻게 보면 이번 5번의 영국 연주 여행 중에서 브라이턴 아트 센터 공연이 가장 콘서트 같은 공연이다.

“여기 정말 좋은데요?”

“아트 센터답지?”

“네.”

공연장의 시설과 시스템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트 센터답다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멤버들은 가장 큰 공연이자, 마지막 공연인 만큼 진지하게 리허설에 임했다.

공연 영상을 촬영하기 위한 카메라도 설치되었다.

리허설이 끝나고, 공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서 멤버들은 호텔로 휴식을 취하러 갔다.

수철과 영준이 형은 브라이턴을 구경하러 나섰다. 이렇게 짬짬이 시간을 내서 관광하는 게 재밌었다.

신기하게 생긴 궁을 구경하고, 귀여운 샵들이 모여 있는 거리를 구경했다. 갤러리도 갔다. 휴양도시라서 그런지 도시도 사람의 분위기도 런던보다 밝았다.

저녁이 되고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자 멤버들은 다시 모여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대기실로 들어가는데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멤버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흥행이 되면 수입도 늘어난다.

어느 나라나 똑같다. 재즈 뮤지션의 수입은 공연 아니면 앨범이다. 그중에서도 공연 수익이 대부분이다. 유명 뮤지션을 제외하고는 그렇다.

“오늘 분위기 좋겠는데요?”“그래, 잘해 보자고.”

홍보를 잘한 건지, 아니면 브라이턴 사람들이 재즈를 좋아하는 건지, 공연장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샘, 데이비드, 알베르토도 객석에 모인 많은 사람을 보자 상기되었다.

공연이 시작됐다.

츄르르르. 챙챙. 쿵쿵쿵.

두둥. 두르둥. 두루둥두둥.

으짠. 따라라으짠.

딴― 따딴. 빠암―!

‘영준과 프렌즈(Young―jun and Friends)’의 마지막 공연이다. 멤버들은 남은 열정을 모두 쏟아부었다.

스네어 드럼을 두드리는 스틱도, 콘트라베이스 줄을 튕기는 손가락도, 기타 줄을 뜯는 손도, 트럼펫의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 그리고 피아노를 누르는 수철의 손에도 힘이 실렸다.

빠라바라. 빠라바라. 빰! 빰! 빰!

딴! 딴! 빠, 빠. 빠― 바밤―!

짝짝짝!

관객의 박수 속에 공연은 어느덧 막바지로 치달았다.

그리고 마지막 곡이 소개되었다.

마지막 곡은 ‘Two Koreans in London’이었다. 영국에서 마지막 공연의 마지막 곡. 멤버들의 배려였다. 떠나기 전 여행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마지막 곡으로 추천했다.

멤버들은 합주 때부터 이 곡을 마음에 들어 했다. 곡에 대한 평가는 영준이 형과 비슷했다. 영국에 올 때마다 이 곡을 첫 곡으로 같이 연주하자고 했다.

영준이 형이 관객들에게 ‘Two Koreans in London’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그리고 수철을 가리켰다. 수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객석을 향해 인사를 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영준이 형은 두 명의 한국인이 런던과 브라이턴에서 큰 감동을 받고 돌아간다는 깔끔한 멘트를 덧붙였다.

곧이어 ‘Two Koreans in London’의 초연이 브라이턴 아트 센터에서 울려 퍼졌다.

딴― 빠암―!

츄르르. 챙. 쿵딱!

두두. 두두둥!

공연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 * *

공연이 끝나고 바다가 보이는 별장으로 몰려갔다. 알베르토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서 브라이턴 바닷가의 별장을 빌렸다.

집은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곧바로 파티가 시작됐다. 테라스에 테이블이 준비되고, 레스토랑에서 주문해 온 요리들이 놓였다. 피자를 든 배달부도 문을 두드렸다.

멤버들은 며칠간의 공연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껄껄 웃었다. 데이비드는 이번 연주 여행의 가장 큰 성과는 수철을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들. 수철과 처음 합주할 때 내 표정 봤어?”

알베르토는 수철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오금이 저렸다는 농담도 꺼내 놨다. 이제 영준이 형이 통역해 주지 않아도 수철은 멤버들이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우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해.”

시간이 갈수록 멤버들은 아쉬워했다. 같이 연주 여행을 더 하고 싶다고 했다.

수철도 마찬가지였다. 아쉬움이 컸다. 이제 막 소통이 될 만했는데 헤어지게 됐다.

“오케이, 영준과 수철! 너희가 이번엔 우리를 한국으로 초대해. 바로 날아갈게.”

멤버들은 이번엔 자신들이 한국으로 연주 여행을 오겠다고 했다.

“좋은 생각이야.”

수철도 동의했다. 영준이 형도 그러자고 했다.

“너희들 그거 알아? 오스트레일리아는 정말 축복받은 땅이야. 난 오스트레일리아를 사랑해.”

“호주를 잘 알아?”

“할아버지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야.”

호주를 좋아한다는 데이비드는 호주를 축복받은 땅이라고 했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이었다.

똑똑.

“Hey, Hows it going?”

멤버들의 친구들이 소식을 듣고 들이닥쳤다. 브라이턴에 사는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런던에서 달려온 친구도 있었다. 대단했다. 영국인다웠다.

이들은 각자 마실 술병을 들고 들어왔다. 격하게 포옹하고는 영국인 특유의 발음으로 인사했다.

멤버들만의 조촐한 파티는 어느덧 큰 파티로 번졌다. 바다가 보이는 별장이라 더 모여들었다.

파티가 무르익자 친구들은 영국인답게 축구 얘기를 시작했다.

런던에서 왔다는 한 친구가 수철에게 물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좋아해? 리버풀 좋아해?”“미안해, 난 축구를 잘 몰라.”

수철이 축구를 잘 모른다고 하자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수철은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빠져나와 테라스에서 혼자 바다를 바라봤다. 영국에서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머릿속으로 새로운 곡을 구상했다.

제목은 ‘Sleepless In Brighton’으로 정했다.

* * *

브라이턴은 다 좋은데 해장국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스파게티로 해장하고, 호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시 런던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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