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축복받은 땅에서(2)
그녀는 바로 영준이 형이 말한 재즈 보컬리스트 제시(Jessi)였다.
그녀는 첫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말투에 옷은 패셔니스타처럼 화려했고, 걸음걸이는 모델 같았다. 수철이 알던 재즈 보컬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제시는 환하게 웃으며 영준이 형과 격한 포옹을 했다. 마치 헤어졌다가 오랜만에 만나는 연인 같았다. 그러고는 영준이 형이 수철을 소개하자 긴 팔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난 제시라고 해요.”“안녕하세요. 저는 수철이에요.”
그녀의 본명은 제시카였다. 하지만 편하게 제시라고 부르라고 했다.
인사를 하고는 제시가 가져온 차에 짐을 실었다.
그녀는 공항에 빨간색 오픈 스포츠카를 가져왔다. 영준이 형은 보통 공항에 픽업하러 오면 짐을 실을 수 있는 차를 가져오는데, 제시는 자유로운 영혼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공항에 나와 준 것만도 고맙다고 했다.
차가 출발하자 그녀의 금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서 수철의 눈 앞을 가렸다.
영준이 형의 말대로 그녀의 말투와 몸짓 하나하나가 그녀가 자유로운 영혼이란 걸 알려 줬다. 그녀는 재즈 보컬리스트보다는 걸그룹의 리더 같았다.
공항을 벗어나 시드니 시내로 향했다. 날씨가 쾌적하고 공기가 상쾌했다.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 완벽한 날씨였다. 시드니가 수철과 영준이 형을 반겨 주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매일 날씨가 이랬다. 축복받은 땅이 맞았다.
“이따가 봐요.”
“네, 이따 만나요.”
오후에 연습실에서 만나기로 하고 제시와 헤어졌다.
“피곤하지?”
“네, 두 다리 쭉 뻗고 한 시간만 잤으면 좋겠어요.”“그래, 그러자. 나도 비행기 안에서 다리가 저려서 푹 자지 못했어. 간단하게 뭐 좀 먹고. 잠깐 눈 좀 붙이자.”
“네.”
호텔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오랜 비행으로 피곤한 탓에 잠을 잤다. 숙소는 마치 오랫동안 살았던 곳처럼 편안했다.
몇 시간의 꿀잠을 잔 후, 밖으로 나왔다. 축복받은 땅에서 잠을 자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큘러 키(Circular Quay)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를 지나, 오늘 공연할 베이스먼트(The Basement)에 갔다. 아직 오전이라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클럽인지 알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연습실로 향했다.
* * *
합주실은 드럼을 치는 존이 아이들을 가르치며 운영하는 곳이었다. 합주실에 들어서자 멤버들이 팔을 벌리며 영준이 형에게 다가왔다.
“화와유 마잇!(How are you mate!)”
영준이 형의 말대로 인사부터 호주인 특유의 발음이 튀어나왔다. 수철의 귀에는 외계어처럼 들렸다. 발음도 독특하고, 무엇보다 억양이 독특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호주를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 난 존이야.”
“안녕, 난 마크야. 만나서 반가워.”“안녕, 난 잭이야. 영준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
멤버들은 모두 순한 얼굴에 인상이 좋았다.
드럼을 치는 존은 성품 좋은 뚱뚱보 아저씨 같았고, 베이스를 치는 마크는 훤칠하게 키가 컸다. 농구선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기타를 치는 잭은 순한 얼굴에 구레나룻에서 턱까지 수염이 덥수룩했다. 다들 자신들만의 캐릭터가 있었다.
영국에서의 멤버들이 도시적이었다면, 호주에서 만난 멤버들은 좀 컨트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제시는 예외였다.
오늘 공연은 관객들이 흥겨운 리듬을 즐기는 만큼, 거기에 어울리는 곡으로 선정했다. 곧바로 합주가 시작됐다.
츄르르르. 츄츄 츠차. 빠암―!
따단. 따단. 따. 딴!
빠바바. 빠바바바바밤. 빠바밤―!
“Won’t you stop and take A little time out with me Just take five…….”
제시의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수철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시의 입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에 놀랐다.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소리가……!’
영준이 형이 깜짝 놀랄 거라고 말한 것은 그녀의 자유분방함이 아니었다. 보이스 컬러를 두고 한 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금발의 백인에게서 흑인의 색깔이? 그것도 빌리 홀리데이의 소리가!’
제시에게서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톤이 그랬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독특한 톤과 발성이었다.
‘저 소리는 연습한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닌데? 빌리 홀리데이가 아니면 누구도 낼 수 없는 소린데…….’
수철은 의문에 휩싸였다. 합주가 계속될수록 궁금증은 점점 더 커졌다.
‘대체 제시에게 무슨 일이…….’
하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얘기다.
수철이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소리에도 지문이 있다. 손가락처럼 세상 모든 소리는 고유한 지문을 갖고 있다. 수철은 그것을 알고 있다.
사람의 소리에 그려진 지문엔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외도 있지만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제시의 목소리엔 그녀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는 지문이 그려져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겉으로 봐서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이게 뭘까?’
빌리 홀리데이 같은 사람은 지구상에 딱 그녀 한 명뿐이다. 아무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소리를 들으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컬러가 보이는데, 제시에게서 엉뚱한 컬러, 빌리 홀리데이의 소리가 들렸다.
‘빌리 홀리데이를 많이 따라 한 건가? 아니면 제시에게도 무슨 사연이 있는 건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영혼을 울리는 소리였다. 아직 나이가 어린데도 제시의 목소리엔 많은 삶의 경험이 녹아 있었다.
* * *
빌리 홀리데이의 삶은 현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한 편의 비극적인 영화였다. 그 영화 속에 그녀는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그녀의 삶은 기구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극적인 삶이었다. 학대받고, 천대받고, 차별받았다.
아이 때는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어린 나이에 백인들에게 수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 결국 뒷골목을 전전하며 몸을 팔았다.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는 삶을 살았다.
유치장에 끌려가고, 굶고, 노숙자 생활에. 소설에나 나올 법한 어려움이란 어려움은 다 겪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의 삶이었다.
그런데 딱 한 번, 말도 안 되는 딱 한 번의 노래로 그녀의 인생이 뒤바뀌었다.
일자리를 구하러 간 나이트클럽에서 퇴짜를 맞고 돌아서는 빌리 홀리데이에게, 피아니스트가 장난삼아 노래를 시켜 본 것이 시작이었다. 이 한 번의 노래로 빌리 홀리데이는 하루아침에 창녀에서 나이트클럽 가수가 되었다.
몸을 팔 때보다 몇 배나 높은 주급을 받게 됐고, 매일 받는 팁은 주급을 넘어섰다.
그녀가 처음 노래할 때 청중의 반응은 이랬다.
무심하게 떠들면서 자기들의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음악을 듣다가, 눈물을 흘리다가, 노래가 끝나면 박수와 환호를 지르고, 감동하며 팁을 냈다.
그녀의 목소리를 한번 들어 보면 그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된다. 그녀의 목소리엔 그녀의 과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듣는 이의 감정이 솔직하다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모든 감정을 노래로 승화시켰다. 노래로 모든 억압과 차별을 뛰어넘었다. 그녀의 노래를 듣다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려요.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남부의 따뜻한 산들바람에 검은 몸뚱이들이 매달린 채 흔들거리지요…….”
이 노래의 제목은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다. 클럽에서 빌리 홀리데이는 슬프고도 처절한 목소리로 흑인들의 아픔을 노래했다. 그녀는 뉴욕의 한 클럽에서 이 노래를 부른 이후 미국 전체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 노래로 백인들의 테러에 시달리면서도 그녀는 이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더 대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녀는 노래하는 것도 자유로웠다. 악보에 상관없이 그때그때 자신의 느낌대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유명세를 떨치며 자신의 삶을 보상받던 빌리 홀리데이도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우려 몸부림치다, 결국 마약과 알코올에 의존했다. 그리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음악가 중에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요절한 음악가는 많다. 쓸쓸하게 인생을 마무리한 음악가도 많다.
모차르트가 그랬고, 베토벤이 그랬다. 존 레논이 그랬고, 밥 말리가 그랬다.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커트 코베인 등등 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빌리 홀리데이 같은 삶을 산 사람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노래에, 그녀의 보이스 컬러에, 그 얘기들이 다 묻어 있고 담겨 있다.
그때의 어린 그녀를 생각하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가슴이 저린다. 그때로 돌아가 그녀를 지켜 주고 싶다.
그래서 그녀의 소리는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제시의 목소리가 딱 그렇다. 빌리 홀리데이 같다. 그럴 수 없는데 그렇다.
‘이유가 뭘까?’
수철은 피아노를 치면서 계속 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저 소리는 흉내 낼 수 없는 소리다.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면서 목을 거치고 머리를 울려 인생이 묻어 나오는 소리다.
수철은 한국이 됐든 호주가 됐든 제시에게 어울리는 곡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음해서 앨범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시가 허락한다면 말이다.
보컬에 대한 코멘트도 프로듀싱도 할 게 없다. 그녀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픽.
그러다 갑자기 픽 웃음이 났다. 지금 눈앞에서 노래하는 제시와 빌리 홀리데이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철이 보는 제시는 차별했으면 했지, 차별을 당하는 쪽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풍기는 외모와 이미지는 선망의 대상이지, 차별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저런 보이스를 갖고 있다는 것이 수철에게는 미스터리로 느껴졌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꼭 곡을 써서 녹음하고 음원을 만들고 싶었다.
* * *
“잠시 쉬었다 할까? 커피 브레이크(Coffee Break) 어때?”“그래, 좋아. 난 한 대 피우고 올게.”
한동안 이어지던 합주는 영준이 형이 커피 브레이크(Coffee Break)를 갖자는 말에 잠시 멈췄다.
“아까 피아노 치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
영준이 형이 눈치챘는지 물었다.
“형이 제시를 보면 깜짝 놀랄 거라는 말. 그 말뜻을 알았어요.”“정말 놀랍지? 나도 처음에 듣고 깜짝 놀랐어. 이런 사람이 존재하는구나 하고 말이야.”“네, 저도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제시는 큰 회사에서 앨범을 내주겠다고 러브콜이 많이 오는데도 꿈쩍을 안 해.”
“왜요?”
“그냥 얽매이는 게 싫대. 그래서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우리가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부르는 거야.”“하하. 그렇겠네요.”
나중에 영준이 형에게 들었다. 제시는 정식으로 공부하고 훈련받은 적이 없다고. 악기도 못 다루지만 멜로디를 흥얼거려서 곡을 만든다고. 혼자 힘으로 커 온 케이스라서 자생력이 강하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프라이드가 강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빌리 홀리데이와 닮아 있었다. 그녀는 이슈를 몰고 다닐 만한 캐릭터였다.
“제시랑 같이 공연 다니면 흥행은 보장돼.”
영준이 형 말대로 그럴 것 같았다.
“형, 그런데 제가 제시의 노래를 들었을 때요…….”
수철은 빌리 홀리데이와 비교하며 자신이 느낀 점을 영준이 형에게 말했다. 신기하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영준이 형은 몇 번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얘기를 털어놓았다.
“제시가 아직 어리지만, 두 번 결혼한 적이 있어. 그리고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몇 년 전에 하늘나라로…….”
“아…….”
제시에게 아픈 과거가 있었다. 슬픈 일이었다.
수철은 그제야 제시에게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이유가 이해됐다.
* * *
공연을 하기 위해 클럽 ‘베이스먼트’의 계단을 내려가던 영준이 형이 툭 한마디 던졌다.
“내가 말 안 했었나? 여기서 얼마 전에 허비 행콕 선생님도 공연했어.”“와! 대단한 곳이네요? 형, 그런 얘기는 빨리 좀 알려 주시지. 영상이라도 찾아보게요.”“원래 계단 내려가면서 툭 던지려고 준비하고 있던 멘트야.”
“하하, 그래요?”
“그래, 영화에서 본 건데 이렇게 툭 던지는 게 느낌 있더라고. 너도 써먹어. 저작권 없으니까.”“하하. 참고할게요.”
계단을 내려가 베이스먼트에 첫발 내디딘 수철은 묘한 흥분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