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60화 (60/239)

#60화. 축복받은 땅에서(3)

깜깜한 내부는 벽에 붙은 간접 조명과 천장에서 내려오는 약한 불빛만이 전부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보이는 무대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수용하는 공간이라는 말이 맞았다. 딱히 재즈를 하지 않아도 다양한 쇼 케이스가 가능한 공간으로 보였다.

“정말 라스베이거스 같아요.”

영준이 형이 말한 대로 라스베이거스의 클럽 분위기가 났다. 무대가 멋있고 다이내믹해 보였다.

여기서도 밴드 이름은 ‘영준과 프렌즈(Young―jun and Friends)’로 정했다. 호주 공연 또한 영준이 형이 기획했고, 멤버들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자 내부는 사람들로 꽉꽉 차기 시작했다. 중앙에서는 사람들이 식사하며 공연을 기다렸고, 뒤편에서는 빼곡히 모여서 맥주를 들고 서 있었다.

“와, 사람들 엄청 많네요?”“멤버들이 여기서 꽤 유명하니까.”

입구는 더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밀려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내부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대단한 관객들이었다.

그 정도로 제시를 포함한 호주 멤버들은 이곳에서 꽤나 유명한 뮤지션들이었다. 같이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에서의 첫 공연, 시드니 최고의 클럽 베이스먼트(The Basement)에서 드디어 시작됐다. 공연이 시작되자 모두의 시선이 무대로 쏠렸다.

첫 곡은 ‘Take Five’였다.

영준이 형은 트럼펫 대신 색소폰을 잡았다.

‘Take Five’는 광고 음악으로도 유명하고,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많이 나와서 사람들에게 친숙한 음악이다. 클래식으로도 연주되고, 팝 가수들도 즐겨 부르는 곡. 말 그대로 퓨전이고 크로스 오버의 곡이다. 누구나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음악이다.

단, 5박으로 이루어진 곡이어서 연주력이 좋지 않은 뮤지션들은 꺼리는 곡이다. 하지만 밴드 ‘영준과 프렌즈’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그루브를 즐기러 오는 관객들이 많은 탓에 첫 곡으로 선택했다.

따단. 따단. 빰빰. 빠―!

이 곡을 전체적으로 이끄는 악기는 색소폰이다. 수철이 건반을 두드리며 리듬을 만들면, 영준이 형의 색소폰이 익사이팅(exciting)한 선율로 수철이 만든 리듬을 타고 움직인다. 그렇게 색소폰과 피아노는 서로 밀고 당기면서 강약을 조절한다.

하지만 오늘은 색소폰에 제시의 보컬이 가세한다. 그루브와 쾌감을 극대화하겠다는 말이다. 초반부터 관객들의 흥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겠다는 말이다.

색소폰과 보이스가 소리를 주고받으며 신기에 가까운 사운드를 연출해 낼 것이다. 드럼과 베이스는 묵묵히 치고 튕기며 색소폰이 놀 수 있는 판을 깔고, 기타는 짠짠하게 줄을 뜯으며 리듬에 입체감을 더할 것이다. 관객들의 놀란 모습이 기대됐다.

드디어 첫 곡이 시작됐다.

따단. 따단. 딴. 딴.

빠바바. 빠바바바바밤. 빠바밤―!

수철이 피아노로 리듬을 만들자, 곧바로 색소폰이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한 바퀴 돈 후, 제시의 보컬이 시작됐다.

“Won’t you stop and take A little time out with me Just take five…….”빠라리리 빠라리. 빠암―따단. 따단. 딴. 딴.

제시의 보컬 사이로 트럼펫이 파고들었다. 수철은 같은 리듬을 반복했다. 보컬과 색소폰이 계속 주고받으며 음악은 이어졌다.

따단. 따따따라 따라란. 딴! 딴!

곧이어 수철의 임프로바이제이션(improvisation)이 시작됐다. 수철은 입으로 박을 읊조리며 리듬과 멜로디를 눌러 댔다. 건반을 눌러서 소리를 최대한 끌어내려다 보니, 엉덩이가 들릴 정도였다.

수철이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건반을 두드리면, 해머가 피아노 현을 두드렸다.

수철은 맛있는 요리를 하고 있었다. 5개의 접시 위에 제각각의 음식을 올려놓았다.

멤버들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영준이 형은 색소폰을 들고, 제시는 마이크를 들고 흡족한 미소로 수철이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멤버들의 머리 위로 조명이 리듬을 타며 움직였다.

“와―!”

짝짝짝!

수철의 임프로바이제이션이 끝나자, 환호와 함께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수철은 피아노에 손을 올린 채 무대를 보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츄츄츄―

존이 브러쉬(brush)로 하이 햇(hi―hat)을 두드리며, 다음 악기로 바통을 넘겼다. 곧이어 마크가 이어받아 콘트라베이스로 리듬의 향연을 펼쳤고, 이어서 잭의 그루브한 멜로디 연주가 이어졌다.

두두두두. 빠암― 빠암―!

갑자기 모든 악기가 리듬을 바꾸며 절정으로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예상을 깬 반전에 입이 벌어졌다.

절정에 달하자, 제시의 입에서 스캣이 튀어나왔다.

“다바디야. 다디―다, 다다다디다디디디. 슈비두와 뚜비르밥!”

곧이어 색소폰과 보컬의 즉흥연주가 교차했다.

빠암― 빠암, 빠빠. 빠리리 빠암―!

“뚜비르비밥밥밥. 다바디야. 뚜둡. 다디다다디다.”

서로 대화하듯이 소리를 주고받았다. 수철은 계속 리듬을 누르며 흥을 고조시켰다.

빠암― 빠밤! 빠빠바밤!

쿵!

절정에 절정을 더해서 한껏 고조시킨 음악은 모든 악기가 동시에 리듬을 맞추며 끝이 났다.

“와아아아―!”

짝짝짝!

첫 곡부터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영준과 프렌즈’는 클럽 베이스먼트를 들썩이게 했다.

이것이 재즈(Jazz)다.

우리가 바로 ‘영준과 프렌즈’다.

첫 무대의 분위기는 그랬다.

제시를 보려고 몰려든 팬들은 소녀팬들처럼 뒤에서 아우성을 쳤다.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이 정도로 재즈에 열광하는 것은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멤버들도 대단하지만, 제시의 파워는 대단했다.

이어진 두 번째 곡은 마크의 자작곡인 ‘리듬 제로(The Rhythm Zero)’였다. 세상의 모든 리듬을 쫓다 보면, 결국 그 리듬은 제로로 귀결된다는 작곡자의 이상한 이론을 밴드는 실현하고 있었다. 이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은 어깨를 들썩였다.

이어지는 곡에서도 제시는 마음껏 끼를 뽑아냈다. 그럴 때마다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영준이 형 말대로 그녀는 이미 엄청난 팬덤을 형성하고 있었다. 재즈 씬의 흥행 보증수표였다. 그런 그녀가 영준이 형과 친분이 있다는 건 훌륭한 일이었다.

신기하게도 제시의 팬들은 대부분이 여성 팬들이었다. 그녀의 보이시한 목소리에 끌려 이곳까지 온 것 같았다.

영준이 형의 자작곡과 앙콜 곡까지 하고서야 무대는 끝이 났다.

제시는 공연이 끝나고도 한동안 팬들에게 둘러싸여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른 멤버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 * *

“Cheers!”

공연이 끝나자마자 파티가 벌어졌다. 첫 공연이 성공리에 끝나고, 오랜만에 영준이 형을 만났으니 그냥 헤어질 수가 없다. 내일 공연은 내일 공연이다. 시간에 맞춰 잘하면 된다.

잭의 친구가 운영하는 펍(Pub)에 자리를 틀었다.

멤버들은 엄청난 술고래였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맥주는 그냥 음료수였다. 그럴 거면 물을 마시지 왜 비싼 돈을 주고 맥주를 마시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영준이 형 말로는 우리와 체질이 다르다고 했다.

얘기를 듣다 보니, 마크는 학교 동창이고, 나머지 멤버들은 마크의 소개로 알게 된 거였다.

제시도 마크를 통해서 알았지만, 독특한 보이스에 반해서 뉴욕에서도 같이 공연한 적이 있다고 했다. 뉴욕에서의 반응도 뜨거워서 그 클럽에서 또 출연 요청이 왔지만, 제시는 뉴욕이 너무 정신이 없다고 거절했다고 했다.

제시다운 선택이었다. 그녀는 흥행에 얽매이지 않았다.

영준이 형은 그 후로도 몇 번 같이 공연을 했고, 공연할 때마다 반응이 좋아서 연주 여행을 할 때마다 자주 보는 사이라고 했다. 지금은 마크만큼 제시와 친한 사이가 됐다. 제시가 공항에 마중을 나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멤버들은 맥주를 마셨지만 제시는 테킬라(tequila)를 마셨다. 한 번에 테킬라를 들이켜고는 레몬을 물어서 쭉 빨아먹었다. 그리고 입가심하듯 담배를 물었다.

후…….

수철이 멀뚱히 쳐다보자 영준이 형이 툭 쳤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에요.”

“재즈 보컬이 담배 피워서?”

“네, 처음 봐요.”

“별거 아냐. 앞으로 더 놀랄 일이 많을 거야.”

앞으로 수철이 놀랄 모습이 기대된다는 표정이다.

“작곡계에 용수철이 있다면, 보컬계에는 제시가 있지. 하하.”

자신의 표현이 재밌다고 생각했는지 혼자서 껄껄 웃었다.

수철의 시선을 느꼈는지, 제시가 손가락 사이에 가느다란 담배를 끼운 채 다가왔다.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얼굴을 내밀며 속삭였다.

“수철, 내 philosophy(철학)가 뭔지 알아?”

‘philosophy?’

느닷없이 제시가 툭 던진 질문에, 수철은 대꾸하지 않고 멀뚱히 쳐다봤다. 그러자 제시는 고개를 돌려 영준이 형을 봤다.

“영준, 통역 플리스.”“오케이. 수철아, 제시가 자신의 철학이 뭔지 아느냐고 묻는 거야.”

‘왜 느닷없이? 내가 자기의 철학을 어떻게 알아?’

수철은 제시를 보며 되물었다.

“네 철학이 뭔데?”

제시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인간 세상에 깊숙이 들어가지 말자.”

인간 세상에 깊숙이 들어가지 말자?

예술인다운 철학인 건 알겠는데, 왜 갑자기 그걸 말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수철이 영준이 형을 쳐다보자, 영준이 형은 의미를 알고 있는지 배시시 웃었다.

제시와 눈을 마주치고는 형이 대신 설명했다.

“제시가 저런 말을 할 때는 세 가지 경우가 있어.”

“세 가지요?”

“그래, 첫 번째는 인간관계에 얽히기 싫다는 뜻이고, 두 번째는 남자들이 자신에게 접근할 때 던지는 말이야. 세 번째는 누군가와 친해지려고 할 때, 자신의 캐릭터를 미리 말하는 거지. 지금은 세 번째 상황이야.”

“아…….”

“놀랄 것 없어. 나도 처음에 들었던 말이니까. 하하.”

영준이 형이 웃자, 제시도 따라 웃었다. 마치 자신도 한국말을 안다는 듯이 말이다.

이로써 그녀의 캐릭터가 완성되었다.

제시의 철학은 수철도 같은 생각이다. 인간 세상에 깊숙이 들어가고 싶지 않다.

가늘게 올라오는 담배 연기 사이로 그녀의 시선이 보였다. 그녀는 시크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기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딱이지.”

인간 세상에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살기에는 호주가 좋다는 말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수철도 제시의 말에 공감했다.

수철이 웃으며 쳐다보자, 그녀는 담배를 눌러 끄고는 옆에 붙어 앉았다. 자신의 캐릭터를 이해했으면 이제 대화를 해 보자는 거였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수철, 너 피아노 잘 치던데, 언제부터 친 거야?”“어릴 때부터 쳤다고 할 수 있지.”“지금도 어리지 않아?”

“……뭐?”

“농담이야. 그런데 한국인은 왜 이렇게 재즈를 잘해? 영준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한국인?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물론 한국에 실력 좋은 재즈 뮤지션이 많기는 하지만. 영준이 형을 포함해서 말이야.”

수철은 영준이 형을 보고 씨익 웃었다. 영준이 형도 씨익 웃으며 통역했다. 제시가 힐끔 쳐다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냐, 한국인들은 확실히 음악을 잘하는 거 같아. 심지어 우리 동네에 사는 꼬마조차도 피아노를 잘 쳐.”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한국 부모님들은 외국에서도 아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시키나 보다.

“그건 어릴 때 피아노 학원에 다녀서 그럴 거야.”“내 말이 그 뜻이야. 한국인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배우는 거 같아. 우린 다 커서 음악학교 가서 배우는 데 말이야. 물론 나처럼 학교 근처엔 가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새삼 제시를 통해 한국인의 음악 사랑을 느꼈다.

‘우리가 흥의 민족이긴 하지.’

이번엔 수철이 제시에게 물었다.

“제시,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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