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축복받은 땅에서(4)
“계속 재즈만 할 생각이야? 내 말은 퓨전(Fusion)으로 다른 장르도 섞어서 해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 거야. 허비 행콕 선생님처럼 말이야.”
수철의 물음에 제시가 잠시 생각하다 답을 했다.
“재즈를 좋아하지만, 꼭 재즈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야. 다양한 장르를 해 보고 싶긴 해. 단, 생각이 맞는다면 말이야.”“생각이 맞아? 어떤 생각?”“진짜 음악에만 노래를 하겠다는 거야. 가짜가 아니라 진짜 말이야. 요즘은 가짜가 많거든.”
수철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상술이 아닌, 진심이 담겨 있는 음악에만 에너지를 쓰겠다는 말이었다.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롯이 음악적인 표현에만 몰두해서 만들어진 곡을 부르겠다는 말이었다.
“난 그런 곡을 만들 수 있는데. 어때? 만들어 볼까?”“훗. 알았어, 기대할게.”
수철이 자신 있게 말하자, 약간의 비웃음이 섞여 나왔다.
그녀의 눈빛에는 기대 반, 미심쩍음 반이 섞여 있었다.
“잠시만.”
제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테킬라 한 잔을 가져왔다. 수철도 제시와 건배할 생각에 맥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Cheers.”
“Cheers.”
시간이 갈수록 테이블에는 테킬라 잔과 맥주병이 쌓여 갔다.
제시는 어느새 수철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취한 건지, 친해졌다고 느꼈는지, 팔을 걸친 채로 계속 말을 이었다.
영준이 형은 제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필요한 부분만 한 번씩 수철에게 통역해 줬다.
어느 정도 술이 오르자, 제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다들 내일 봐.”
멤버들과 취한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다. 수철에게는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 * *
다음 날도 날씨는 여전히 쾌청했다. 하늘은 속을 다 뒤집어 놓은 것처럼 끝없이 파랬다.
호텔 창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트럼펫 마우스피스를 교체하러 나갔던 영준이 형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수철아.”
“왜 그러세요?”
서둘러 신발을 벗고 다가왔다.
“영국에서 전화가 왔어.”
“무슨 전화요?”
“우리 브라이턴 클리닉 공연 때 왔었던 기자 생각나?”“네, 기억나요. 인터뷰하고 사진 찍었던.”“그래, 그 기자가 그날 아트 센터 공연에도 왔었나 봐.”“그렇군요. 그런데 기자가 왜요?”“그 기자가 음반사 관계자에게 네 음악을 추천했는데, 거기서 영상을 모니터링해 보더니 네 곡을 녹음해서 음반으로 발매하고 싶다고 제안했나 봐. 이미 샘이랑 알베르토도 만났대.”
수철은 믿기지 않았다. 그 곡을 선보인 건 불과 며칠 전이다.
“와, 빠르네요. 며칠이나 됐다고.”“이 사람들은 하는 일이 그런 거니까. 느낌이 오는 것은 먼저 잡으려고 하는 거지. ECM(Editions of Contemporary Music)이라고 미국의 재즈 레이블 ‘Blue note’처럼 이쪽에서는 유명한 곳이야. 본사는 독일에 있지만 영국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유명해. 그래서 멤버들도 네가 허락하길 기대하는 눈치고.”
수철이 허락하면 멤버들도 녹음에 같이 참여하겠다는 얘기였다.
“하게 되면, 몇 곡을 녹음하는 거예요?”“너의 곡 ‘Film music without film’이랑 ‘Two Koreans in London’, 두 곡은 싱글로 발매하고, 거기에 새로운 곡을 추가해서 5곡 정도를 나중에 옴니버스 앨범으로 발매할 생각 하나 봐.”“새로운 곡이요? 형 곡도 있고, 다른 멤버들 곡도 있잖아요.”“우리 곡들은 이미 음반으로 발매가 된 곡이잖아. 그래서 다른 멤버들 생각은 너의 곡을 앞에 넣고, 나머지 3곡은 우리 곡으로 리메이크하고 싶은 욕심인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네, 그렇게만 되면 모두에게 좋은 거잖아요.”“그렇지. 그리고 너의 싱글앨범에도 참여하고.”“그건 당연히 그래야지요.”
수철은 멤버들의 의도가 이해됐다.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다시 영국으로 가야 하나요?”“지금 당장은 아니야. 거기서도 준비해야 하고, 멤버들 스케줄도 조절해야 하니까. 우리도 아직 여기서 공연이 남았잖아?”
“그렇죠.”
수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잘만 하면 뜻밖에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음…….”
영준이 형은 그런 수철을 보며 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수철이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형, 이러는 건 어떨까요?”
“어떻게?”
“저는 Film music without film이랑 Two Koreans in London에 보컬이 붙었으면 좋겠어요.”
“보컬?”
당연히 트럼펫으로 연주할 기대를 한 영준이 형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컬이랑 트럼펫이랑 같이 섞였으면 좋겠어요. 베이스먼트에서 Take Five 할 때처럼요. 형이랑 제시랑 둘이서 주고받을 때 관객들 완전 난리 났었잖아요?”
그 말에 영준이 형의 얼굴이 다시 펴졌다.
“오케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그리고 앨범 낼 거면 잘되는 게 좋잖아요.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고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말이에요.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재즈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있잖아요.”“이미지? 그게 뭐지?”“재즈는 관심 없는 장르, 나와 상관없는 장르, 그런 거요.”“아! 하하, 그렇지.”
“그래서 그런 고정관념도 깰 겸 가사도 붙이고, 편곡도 좀 더 현대음악으로 편곡해서 대중들에게 접근성 좋게 만들어 보고 싶어요. 앨범을 낸다면 말이에요.”“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음반사에서 들어도 두 손 들고 환영할 얘기야.”“그래서 말인데요…….”
“……?”
“제시에게 가사를 써 보라고 하면 어떨까요? 노래도 부르고요.”
“제시에게?”
영준이 형은 놀란 눈으로 수철을 빤히 쳐다봤다. 수철이 제시를 말할 줄은 예상치 못한 표정이다.
“싫으세요?”
“아니야, 싫은 건 아니고, 네가 제시를 생각하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을 못 해서 좀 놀란 거야.”
“아…….”
“그러니까 제시가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부른다. 영국 멤버들과 합류해서 연습하고, 영국에서 녹음하고. 네 싱글앨범의 녹음이 끝나면 옴니버스 앨범의 나머지 세 곡은 데이비드와 알베르토, 내 곡 이렇게 하나씩 집어넣는 거고.”“네, 그렇게 되는 거죠.”“그럼 얘기를 해 봐야겠네, 어쩌면 다른 멤버들도 가사를 넣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흥행이 된다면 안 할 이유가 없지.”
영준이 형은 나머지 곡들도 제시에게 가사를 부탁할 생각을 했다. 제시가 작사가도 아니고, 허락할지는 의문이지만 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도 좋은 생각이에요. 제시가 허락한다면요.”“우선 음반사와 얘기해 보라고 해야겠어. 제시가 거절하더라도 다른 작사가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가사는 문학가들이 잘 쓰니까 그런 분들에게 부탁하면 되지.”“네, 좋은 생각이에요. 그리고 만약에 그런 의도를 음반사에서 거절하면 다른 음반사와 하면 돼요. 뮤지션이 중요한 거지, 음반사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하하, 역시 대범해. 그렇지, 우리가 중요한 거지 장사꾼이 중요한 게 아니지. 우리가 없으면 그 사람들이 뭐로 장사할 거야?”“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말이에요.”
“……?”
수철은 갑자기 지금 멤버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공연을 같이하는 건 호주팀인데 영국 멤버들의 얘기만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지금 이 팀에서 제시만 빠져나가면 다른 멤버들이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요?”“그건 걱정하지 마. 재즈 뮤지션들은 원래 한 팀에 묶여 있지 않잖아. 각각 흩어져서 자유롭게 활동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렇겠죠?”
“그래, 하지만 제시가 하겠다고 할지가 의문이야.”“그건 상황을 봐서 제가 제시랑 직접 얘기를 나눠 볼게요. 물론 형이 통역을 해 주셔야 하고요.”
“물론이지.”
“제 생각엔 아마 제시가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어떻게 확신해? 뭔가 비결이 있어?”“단순하지 않나요? 보컬을 사로잡을 수 있는 건…….”
“곡?”
“네, 새로운 곡으로 유혹해 보는 거죠.”“유혹? 하하. 그래, 한번 해 봐. 네가 실패하면 그다음엔 내가 얘기해 볼 테니까.”“네, 그래 주세요.”
“오케이, 알았어. 그럼 난 영국 친구들에게 우리의 생각을 전할게.”
“네.”
대답하고 돌아서는데, 수철의 머릿속에 불현듯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만요, 형.”
영준이 형이 돌아서려다 멈췄다.
“왜?”
“형, 이러면 어떨까요?”
“어떻게?”
수철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지자 영준이 형도 표정이 바뀌었다.
“녹음을 한국에서 하는 거예요.”“녹음을 한국에서?”
영준이 형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샘, 데이비드, 알베르토, 제시까지 다 초대해서 한국에서 하는 거죠.”“헐, 그러면 일이 너무 커지는데?”“재밌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샘, 데이비드, 알베르토는 한국에 초대할 생각이었잖아요.”“그렇긴 한데, 그건 녹음이 아니라 공연이었지.”“네, 그래서 그걸 이번 기회에 다 하자는 거예요. 초대해서 공연하고, 녹음하고 다 하는 거죠.”
“……!”
영준이 형은 그제야 수철의 말을 이해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음. 이거 잘하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는데?”“네, 그러면 다 같이 모여서 연습도 하고 녹음도 하고 공연도 할 수 있잖아요. 그 생각을 영국 음반사에 전하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비용만 조율하면 되잖아요.”“그래, 가능한 얘기야. 우리가 한국에서 영국으로 가는 거나 영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거나 비행깃값만 조금 더 부담하면 되니까. 그래, 충분히 가능한 스토리야.”
영준이 형은 눈을 반짝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영국과 한국 동시 앨범 발매도 얘기해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음원 스트리밍과 홍보 같은 건, 쌤한테 조언도 얻을 수 있잖아요.”“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멤버들이 쓸 비용은 형이 한국에서 클리닉 공연 잡으면 되고요.”“그렇지. 한국에서 잡는 건 더 수월하지. 거기서도 외국 뮤지션들 오는 걸 더 선호하니까.”“네, 그리고 학교 강의 공연도 많이 잡을 수 있잖아요. 형도 강의하고, 쌤도 강의하니까요. 다혜네 학교도 있고요.”“우리나라에서 대학 공연은 엄청 많이 잡을 수 있지. 근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지? 이건 숙식비 문제가 아니라, 수익도 꽤 만들 수도 있겠어. 클리닉과 대학강연만 해도 말이야.”“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영준이 형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수철을 쳐다봤다.
“근데 수철아.”
“네?”
“나, 순간 기획사 사람이랑 얘기하는 줄 알았어. 네가 너무 줄줄이 얘기해서 말이야. 하하.”“제가 그랬나요? 왠지 하고 싶은 걸 다 묶어서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생각하다 보니까 떠오른 거예요.”“수철이 너, 똑똑한데?”“헤헤.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거예요.”“천재들은 머리를 많이 쓰면 재능이 줄어든다고 하던데. 넌 괜찮으려나?”“오늘 피아노 치다가 멍하게 천장만 쳐다보고 있을 수도 있어요. 재능이 다 닳아서 말이에요.”“어쭈, 이제 말장난에서 안 밀리는데? 더 강한 걸 준비해야겠어.”
“헤헤.”
“그래, 알았어. 그럼 영국에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지금 네가 말한 것들을 먼저 구체화해 보자.”
“네, 그리고 형.”
“……?”
수철은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전 녹음만 할게요. 공연은 빼 주세요.”“왜? 그러면 멤버들이 섭섭해할 텐데. 그리고 너의 곡들은 어떡하고?”“제 곡보다는 형 곡이랑 다른 멤버들 곡 위주로 해 주세요. 전 아무래도 한국에 돌아가면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을 거 같아서요.”“음.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대신 멤버들 보러 자주 와야 해.”“네, 그렇게 할게요.”
수철은 뭔가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자작곡도 발표하고, 제시와 새로운 곡도 맞춰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수철은 혼자서 점심을 먹었다. 영준이 형과 다른 멤버들은 클리닉 공연을 갔기 때문이다.
제시가 해안가를 드라이브시켜 주겠다고 했지만, 수철은 거절했다.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