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62화 (62/239)

#62화. 축복받은 땅에서(5)

수철은 호텔 소파에 앉아서, 브라이턴에서 구상했던 ‘Sleepless In Brighton’을 마무리 지었다. 곡의 분위기는 좀 더 다이내믹하게 편곡하고, 멜로디 라인도 제시를 염두에 두고 다시 고쳤다.

그리고 제목도 ‘Sleepless In Brighton’을 가제로 표시했다. 새롭게 가사를 붙이기 위해서였다.

수철은 악보를 챙겨서 가방에 넣고 합주실로 향했다.

* * *

클리닉을 갔다 온 멤버들은 다시 합주실에 모였다. 오늘 공연하는 곳이 정통 재즈 클럽이다 보니, 새로운 곡을 한 번씩 맞춰 보자는 의견에서였다.

합주에 앞서 수철이 새로운 곡의 악보를 내밀었다.

“형, 이 곡 좀 봐주세요.”

영준이 형은 어이없는 얼굴로 수철과 악보를 교대로 쳐다봤다.

“이 곡은 또 언제 쓴 거야?”“브라이턴 알베르토 별장에서요.”

“파티하던 날?”

“네.”

“허, 거기서 그럴 시간이 있었어?”“테라스에서 바다 구경을 하다가 떠올라서 만들어 봤어요.”“헐……. 이제 감탄은 그만할게.”

“네, 고마워요.”

악보를 보던 영준이 형이 물었다.

“스윙이네?”

“네.”

수철은 곡을 구체화시키면서 경쾌한 리듬의 스윙재즈(Swing Jazz) 스타일로 바꿨다. 그리고 템포를 조절해서 음악을 더 그루브하게 만들었다. 이 또한 제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연습을 시작하기 전, 영준이 형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아직 가사가 없어서 제시, 너와 같이 이 곡을 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워.”“수철, 미안해하지 마. 난 괜찮아. 오디언스(audience)로서 네 음악을 즐겨 볼게.”“그래, 고마워. 그리고 이 곡이 마음에 들면 네가 가사를 붙여 보는 건 어떨까? 필요하다면 제목을 바꿔도 괜찮아.”“알았어.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해 볼게. 나도 브라이턴에 가 본 적이 있어서 느낌을 이해할 수도 있어.”“그럼 승낙한 거로 알게.”“오케이, 난 가사 쓰는 걸 좋아해. 나한테 부탁해 줘서 고마워.”

제시가 가사 쓰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한시름 돌렸다.

수철은 다른 멤버들에게도 악보를 돌렸다. 그리고 템포를 넣기 시작했다.

“워언, 투우, 원 투 쓰리 포.”

음악이 시작됐다.

츄츄. 츠츠. 츄츄. 츠차.

빠라라밤. 빠라라라. 빠라바라바라밤.

흥겨운 스윙 리듬에 맞춰 드럼과 트럼펫이 동시에 출발했다. 그리고 16마디 후 베이스와 피아노가 따라붙었다.

멤버들은 리듬에 맞춰 구둣발을 까딱거리고, 고개를 흔들며 연주했다.

합주가 끝나고 멤버들은 이제 좀 친해졌다고 수철에게 농담을 던졌다.

“헤이, 수철! 네 곡과 너의 피아노 연주력은 볼수록 대단해. 네가 한국인 재즈 피아니스트 중에 탑이야? 아니, 작곡자 중에 탑인가?”“노노, 아냐. 절대 그럴 리가.”“하하, 겸손하긴. 너처럼 대단한 음악가와 공연하게 돼서 기분이 좋아. 난 앞으로의 연주 여행도 정말 기대돼. 우리 잘해 보자고.”“그래, 나도 너희랑 같이하는 시간이 정말 기대돼.”

* * *

재즈 클럽 공연은 영준이 형의 예상과 달랐다.

다른 곳에서 오랫동안 하다가 옮겨 온 곳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재즈만 하는 전통 있는 클럽인데, 분위기와 소리는 그전이 더 좋았다는 말을 했다.

“와아아!”

짝짝짝.

관객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영준이 형은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불편함이 얼굴에 나타났다.

“예전엔 나무에 부딪히던 소리가 이제는 콘크리트에 부딪히는 것 같아.”

치명적인 말이었다. 클럽 관계자가 들으면 공포에 떨 무서운 말이었다.

형의 말대로라면 두 번 다시 연주하고 싶지 않은 곳이다.

“미안, 영준.”

다른 멤버들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곳에서 연주한 이유가 있었다.

“영준…….”

영준이 형의 불평에 얼굴빛이 변한 마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마크, 무슨 일이야? 이거 너무 심각하지 않아?”“알아, 그런데 시드니에서 재즈 클럽이 사라지고 있어. 우리가 설 무대가 줄어들고 있다고.”

“진짜?”

영준이 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재즈 클럽이 사라지는 이유는 어디나 그렇듯 자본의 논리였다. 재즈 클럽보다 다른 것을 하는 게 더 장사가 잘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건물주도 월세를 올려 받을 수 있다. 건물주로서는 몇십 년 동안 같은 월세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건 한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전통 있으면 뭐 해, 적자에 허덕이다 보면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는 거지.”

오래되고 전통 있는 재즈 클럽도 적자에 허덕이다 보면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고 했다. 그런 걸 보면 런던의 ‘로니 스콧’은 대단한 곳이다.

시드니에 재즈 클럽이 줄어든다는 말은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얘기기도 했다.

수철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즈를 가르치는 학교는 계속 늘어나는데, 클럽은 줄어든다니. 재즈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어느 무대에 서야 하는지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외국에선 학비가 천만 원씩이나 한다.

그렇게 비싸게 받으면 학교에서 재즈 클럽을 운영해야 하지 않나?

단순한 의문이 들었다. 물론 그 상황은 한국도 다르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주할 수 있는 무대는 줄어들고 있지만, 방송, 영화, 음반 등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는 재즈 뮤지션들의 역할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무래도 음악을 잘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시드니에서 마지막 클럽 공연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 * *

호주는 환하다 못해 낮에는 햇살이 뜨거웠다. 호주인들의 피부에 주근깨가 많은 것이 이해됐다.

다음 날, 비행기는 1시간 20여 분을 날아서 멜버른에 도착했다.

“수철, 여기가 내가 태어난 곳이야.”

멜버른은 제시의 고향이었다. 부모님 직장 때문에 어릴 때 떠났지만 그녀는 늘 멜버른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멜버른은 영원한 고향이라고 했다.

“여긴 시드니와는 많이 다른데요?”“그래,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 시드니가 백화점이라면 멜버른은 도서관 분위기지.”

영준이 형 말처럼 그랬다. 수철이 둘러본 멜버른은 시드니와는 많이 달랐다. 시드니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라면 멜버른은 차분하고 조용했다. 시드니가 관광지라면 여기는 진짜 호주인들의 도시 같았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살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았다.

영준이 형은 호주가 영연방 소속이라서 불법체류를 하는 영국인이 많다고 했다. 특히 멜버른에 많다고 했다.

참 아는 게 많은 형이다. 친해지면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는 동네 형이다.

길거리에서 엽서를 보고 있는데,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우― 웅― 위잉― 위잉―!

디저리두였다.

호주 원주민이 동전 바구니를 놓고 거리에서 디저리두를 불고 있었다.

수철이 구경하려고 다가가자 영준이 형도 따라붙었다.

“저 악기를 알아?”

“네, 불어 본 적 있어요.”“그렇군, 나도 디저리두와 같이 공연해 본 적이 있어. 원주민 악기지만 훌륭한 악기야. 저만큼 특색 있는 악기도 드물 거야.”“네, 그런 것 같아요.”“호주 원주민은 본 적이 있어?”“실제로는 처음 봐요.”“에버리진(Aborigine)이라고 부르는데, 좀 날카롭게 생겼지?”

“네.”

실제로 그랬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무표정하게 있으면 무서울 정도였다.

“저 사람들의 표정이 저런 이유가 있어.”

“이유요?”

영준이 형은 짧게 호주의 역사를 들려줬다.

호주 초기 정착인들이 원주민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겠다며, 배에 태워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시켰다고 했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아직도 이방인을 보면 눈이 날카로워진다고 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보면 ‘이방인들은 여기를 떠나라.’ 그렇게 한마디 하고 지나가. 나도 몇 번 들었어. 지금은 익숙하지만, 처음엔 좀 무서웠지.”“아, 그렇군요. 저라도 누가 쳐들어와서 우릴 내쫓으면 그럴 거 같아요. 디저리두가 유명해져서 원주민들의 히스토리도 같이 전달됐으면 좋겠어요.”“좋은 생각이야.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 탄생하겠어. 안 그래도 요즘은 디저리두 소리가 명상으로 많이 사용된다고 하니까, 충분히 가능한 얘기지.”“네, 디저리두는 명상과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디저리두 소리는 몇 시간 들어도 질리지 않잖아요.”“그렇지. 그게 디저리두의 매력이지.”

수철은 원주민의 디저리두 퍼포먼스를 잠시 구경하다가 바구니에 5달러짜리 지폐를 넣고 돌아섰다. 바구니에 돈이 너무 없어서 달랑 동전만 넣기가 그랬다.

* * *

카지노를 처음 본 수철은 입이 쩍 벌어졌다.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큰 타운(Town)이었다. 크다는 표현을 넘어 거대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오늘 공연을 할 무대로 이동했다. 무대는 클럽과는 많이 달랐다. 음악 공연보다는 쇼를 하는 무대였다. 둥근 무대에 사방이 뻥 뚫려 있었다. 사람들이 삥 둘러싸서 공연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악기와 음향 장비는 카지노답게 최상급이었다.

“원, 투, 원 투 쓰리 포.”빠바바. 빠바바바밤―!

이곳의 분위기는 지금까지의 공연과는 완전히 달랐다. 재즈를 들으러 온 관객들이 아니었다. 카지노에 놀러 왔다가 무슨 소리가 들리기에 호기심에 구경 온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무대 앞을 무심하게 지나다녔다.

그들은 관객이 아니라 그냥 손님이었다.

빠― 바 바암―!

그루브가 있는 곡엔 고개를 까딱하며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은 잔잔한 선율의 음악이 시작되자, 각자 제 갈 길을 찾아 사라졌다.

이런 젠장.

배신감이 들었다.

멤버들은 잠시 의견을 교환한 후, 음악을 전부 그루브로 교체했다.

영준이 형은 열받았는지, 아예 대놓고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번(Burn)을 꺼내 들었다.

빠리리리삐리리리. 빠바밤!

순식간에 트럼펫 소리가 카지노 여기저기로 뻗어 나갔다. 다른 악기들도 곧장 따라붙었다. 모든 악기가 빨라졌다. 드럼은 펑키하게 바뀌었고, 수철의 손가락도 빨라졌다. 건반 사이를 손으로 휘휘 휘저으며 글리산도(glissando)를 집어넣었다.

마크와 잭도 빠르게 손을 움직여 펑키(funky)를 만들어 냈다. 제시는 다른 악기들의 임프로바이제이션(Improvisation)을 가로채 신들린 듯 스캣(Scat)을 뽑아냈다. 그 에너지가 너무나 놀라워서 멤버들도 순간 제시를 쳐다봤다.

그리고 정확히 10분 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영준과 프렌즈’의 음악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묶어 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구경꾼에서 관객으로 바꿔 놓았다.

소리에 이끌려 온 사람들은 잠시 어색해하다가 곧바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 한 명이 어렵지, 그다음은 쉬웠다. 마치 댄스 클럽이라도 된 듯 사람들은 리듬을 타며 춤을 추고, 몸을 들썩였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앉아서 소리를 경청하는 사람도 좋지만, 리듬을 타며 춤을 추는 사람도 보기 좋았다. 연주하는 사람도 흥겨웠다.

모든 멤버의 역할이 컸지만, 그중에서도 트럼펫과 보컬의 역할이 컸다.

특히 제시가 빛을 발했다. 빌리 홀리데이가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한 곡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듯이, 제시도 자신의 고향 카지노 무대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와우!”

밴드 ‘영준과 프렌즈’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손님을 관객으로 변화시켰다. 스태프들도 이 모습이 신기한지 모여서 구경했다.

“앙콜! 앙콜!”

손님에서 관객이 된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앙코르까지 외쳤다.

카지노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공연 기획자의 입도 벌어졌다. 공연이 끝나고 호텔 무료 숙박권에 식사권 등 다양한 선물을 받았다. 공연 기획자는 당장 다음 스케줄을 잡자는 말을 했다.

* * *

멜버른의 아침 날씨는 시드니 이상이었다. 모든 아름다운 표현은 멜버른에 갖다 붙이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준이 형과 다른 멤버들은 클리닉 공연을 갔다.

―똑똑.

호텔에 혼자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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