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컴백홈
제시가 같이 점심을 먹고 드라이브를 시켜 주겠다고 왔다. 수철이 혼자서 심심해할 것을 배려한 것이었다. 수철도 두 번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흔쾌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멜버른 외곽의 해안도로는 아름다웠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원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원하게 머리카락을 날리며 해안도로를 달리던 제시는 카페가 눈에 띄자 차를 세웠다.
제시는 차를 마시며 수철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수철은 최대한 귀를 세우며 제시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아는 영어를 총동원해서 대답했다.
하지만 뭔가 잘 맞지 않았나 보다. 제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오케이만 반복했다. 수철이 엉뚱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의 표정을 보고 알았다. 동문서답을 한 모양이었다.
둘은 다시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제시는 계속 웃으며 운전만 했다. 둘은 오랫동안 바닷가를 달렸다.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눈이 마주치면 서로 환하게 웃었다.
둘의 어색함은 영준이 형이 와서야 해소됐다.
셋은 멜버른 시내의 한 카페에 모여 앉았다. 영준이 형은 영국 음반사에서 제안받은 사실을 제시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수철의 생각을 전달했다.
제시는 묵묵하게 듣고만 있었다.
영국에서 찍은 공연 영상까지 다 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수철. 네가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돼?”“이유는 단순해. 너의 보이스가 내 곡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너와 앨범을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 네가 허락한다면 말이야. 그러기 위한 첫 단추를 끼운다고나 할까.”“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럼 너의 제안을 하루만 생각해 볼게. 난 항상 내가 뭘 할 때, 그 이후가 궁금해. 내가 이 음악에 가사를 쓰고 노래하고 음반을 내면, 그 이후에 내 삶이 어떻게 바뀔지가 말이야. 난 앞장서 가고 싶지, 끌려가고 싶지 않아. 그래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제시다운 얘기다. 그리고 수철도 바라는 바다.
제시는 숨김이 없다. 다른 사람이 제시의 말을 들었으면 4차원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수철은 제시의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괜찮아. 충분히 생각하고 답을 줘. 난 네가 같이하길 기대하지만 네가 거절해도 실망하지 않을게.”“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 * *
야라(Yarra) 강이 보이는 카페 ‘The Yarra Time’ 앞에서 벌어진 야외 공연은 흥미로웠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모여서 둥글게 타원형의 띠를 만들었다.
이번 연주 여행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공연은 ‘영준과 프렌즈’의 단독 공연이 아니었다. 카페 사장은 많은 뮤지션을 초대했다.
라틴 아메리카 음악을 하는 팀도 있었고, 근처 멜버른 음악학교 학생들 팀도 있었다.
라틴음악을 하는 팀의 공연 때는 소리를 듣고 모여든 사람들이 흥겨운 삼바와 맘보 리듬에 맞춰 춤을 췄다. 사람들의 몸동작에 맞춰 그들은 타악기를 두드리며 잔뜩 흥을 끌어올렸다.
제시도 관객들 사이에 끼어들어 팔을 들고 골반을 움직이며 같이 춤을 췄다. 제시의 모습은 멀리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멜번 음악학교 학생들의 공연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어 손뼉 치고 환호했다. 학생들답지 않게 상당한 연주 실력을 보였다.
처음엔 몇 곡씩 돌아가면서 공연을 하다가 나중엔 서로 섞여서 같이 잼을 했다. 리듬을 주고받으며 즉흥연주를 했다.
모인 사람들도 몸을 들썩이며 리듬을 탔다. 재즈가 주는 그루브를 즐겼다.
재미로만 따지면 이번 공연이 제일 재밌었다.
공연이라기보다는 뮤지션들의 파티 같았다. 같이 잼을 하며 음악의 향연을 펼쳤다.
공연이 끝나자 다른 팀의 멤버들이 다가와 수철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당신은 앨범이 있나요? 있다면 어디서 구매할 수 있나요?”“미안해요, 저는 앨범이 없어요.”“당신을 우리 공연에 초대해서 같이 연주하고 싶어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나요?”“미안해요. 저는 오늘 공연이 마지막 공연이에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수철의 말에 모두 아쉬워했다. 대신 같이 사진 찍고,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았다. 수철은 오랜만에 또래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것이 즐거웠다.
야라(Yarra) 강 거리 공연은 마지막 공연이 주는 편안함이 있었다.
* * *
해가 질 무렵, 쫑파티 겸 송별 파티가 벌어졌다. 잭이 휴가를 떠난 할아버지 집으로 모두를 이끌고 갔다.
영화에서나 보던 아름다운 집이었다. 사방이 뻥 뚫려서 지평선과 수평선 끝이 다 보였다.
수철은 이런 곳에서 곡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멤버들은 노을 지는 바닷가에서 바비큐에 맥주를 마셨다.
“수철. 너 이번 기회에 이곳에 정착할 생각 없어? 우리랑 같이 음악도 하고, 이렇게 바비큐 파티도 하면 좋잖아. 하하.”“알았어, 생각해 볼게.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말이야.”“넌 언제든지 환영이야. 기다릴 테니까 꼭 다시 와. 네 자리는 항상 비워 둘게.”“그래, 고마워. 하지만 시간은 좀 걸릴 거야. 할아버지가 되기 전에는 다시 돌아올게.”“하하. 할아버지가 돼도 괜찮아. 돋보기 쓰고 연주하면 되니까.”
“하하. 그럴게.”
늦은 시간까지 멤버들은 음악과 음악 인생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따뜻한 호주 멤버들과 같이 한 연주 여행. 그리고 아름다운 바닷가에서의 파티. 수철에겐 기억에 남을 밤이었다.
* * *
“Two Koreans를 Two People로 바꾸는 건 어떨까? Two People In London. 이렇게 말이야. 런던은 많은 사람이 추억을 공유하는 도시고, 앨범을 발매하는 곳도 영국이니까 그냥 두고. ‘두 한국인’을 ‘두 사람’으로만 바꾸면 좋을 거 같아. 네 생각은 어때?”
멜버른에서 마지막 아침을 먹는데, 제시가 자기의 생각을 얘기했다. 앨범에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제목을 바꾼다는 것은 곡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얘기다. 하지만 제시의 의견이 맞다. 수철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이 곡은 수철의 손을 떠났다. 영준이 형과 수철의 추억이 아니라 듣는 이들의 추억이 돼야 한다. 제목이 바뀌더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그 길을 가야 한다.
수철은 흔쾌히 선택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나도 너의 생각에 동의해.”“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너는 역시 쿨한 작곡가야.”
“땡큐.”
“그리고 Sleepless In Brighton은 Sleepless In Island로 바꾸는 게 어떨까? 영국도 섬이고 여기 호주도 섬이잖아. 브라이턴으로 한정하기에는 곡이 아까워. 내 생각은 그런데. 너는 어때?”
수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의 도시로 한정하면, 음반사에서 홍보해도 곡의 확장력이 떨어질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제시, 네 말대로 Brighton보다는 Island가 좋겠어.”“오케이. 그리고 Film music without film은 그냥 쓰면 될 거 같아. 난 이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어. 음악도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야.”“그렇다면 다행이야.”“수철. 네가 만든 음악은 정말 놀라워. 이 곡은 네가 거절해도 내가 가사를 쓰고 싶을 정도야.”
수철은 깊이 생각하고 좋은 결정은 내려준 제시가 고마웠다. 무엇보다 가사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너의 가사를 기대할게.”“너무 큰 기대는 실망을 부르니까 그러진 마. 그리고 난 가사를 만드는 데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그러니까 날 푸시(Push)할 생각은 하지 마.”“알았어. 난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땡큐.”
“그리고 네가 쓰는 가사에 맞춰 다음 스케줄이 진행되면 될 거 같아. 그러니까 그 부분은 영준이 형과 상의를 해 줘.”“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럼 잘해 보자 작곡자 선생.”
제시가 손을 내밀었다. 수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수철도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 * *
멤버들 모두 공항으로 배웅을 나왔다. 다들 멜버른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수철과 영준이 형만 비행기를 타게 됐다.
멜버른 공항에서 멤버들과 이별했다. 뜨거운 포옹을 끝으로 헤어졌다.
비행기에 오른 수철과 영준이 형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눈 한번 뜨지 않고 쭉 잤다.
눈을 떴을 땐, 대한민국 지도 위에 비행기가 올라가 있는 모습이 화면에 보였다.
좋은 비행이었다. 잠만 계속 자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짐을 끌고 밖으로 나왔을 때,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혜의 말처럼 공항에서 기다리는 기자는 없었다. 당연했다. 수철의 일정을 아는 사람은 영준이 형밖에 없다.
공항 카페에서 영준이 형과 앞으로 스케줄에 관한 얘기를 잠시 나눴다. 그리고 둘은 곧장 헤어졌다.
집에 돌아온 수철은 계속 잠을 잤다. 비행기에서 그렇게 잤는데도 또 졸렸다. 생각보다 여행에 피로가 많이 쌓여 있었다. 자도 자도 졸렸다. 그래서 계속 잤다. 첫날은 그렇게 잠만 잤다.
* * *
다음 날 작업할 CM송과 편곡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박 대표의 작업실을 갔다.
“어서 와, 수철아. 몇 주 만에 얼굴이 많이 탔네?”“네, 호주의 햇볕이 따가울 정도로 세더라고요.”
겨우 2주였는데 몇 달 만에 만나는 기분이었다.
“쌤, 이거요.”
호주에서 사 온 선물을 내밀었다.
“쌤은 캥거루 좋아하세요? 코알라 좋아하세요?”
“하하, 뭐?”
수철이 두 개의 열쇠고리를 내밀었다. 돌아올 때 선물을 사려고 보니, 줄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박 대표, 다혜, 은주, 김명석, 도어스 사장. 그리고 동민이와 친구들까지. 그래서 모두 하나로 통일했다. 열쇠고리로. 물론 선택지는 있다. 캥거루냐, 코알라냐.
박 대표는 잠시 망설이다가 코알라를 집었다.
“커피 마실래?”
“네, 주세요.”
“아이스로 만들어 줄까?”
“네, 좋아요.”
박 대표는 아이스 커피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마주 앉았다.
“나도 호주 가 보고 싶은데. 좋다는 말만 듣고 한 번도 못 가 봤어. 어땠어, 좋았어?”“네, 좋았어요. 생각해 보면 나쁜 이미지가 하나도 없어요.”
“반전이 없었어?”
“네, 사진 속에서 보는 모습 딱 그대로였어요.”“길거리가 지저분하다거나 사람들이 불친절하다거나 그런 것도 없고?”“네, 그런 거 없었는데요.”“에이, 약 오르네, 쓴 커피나 한잔 더 마셔야겠다.”“아, 하하. 쌤, 다음에 같이 가요.”
박 대표는 커피를 한잔 더 만들어와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영준이가 연주 여행 갈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처음엔 자유롭게 음악 하며 세상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지금 봐 봐. 지하실에서 폐인처럼 작업만 하고 있잖아.”“헐. 쌤, 폐인이라뇨.”“녀석, 놀라기는. 걱정 마, 자책하는 거 아냐. 이렇게 현실을 묘사하고 반전으로 넘어가려는 거지.”
“반전이요?”
“그래, 그래서 나도 다음 앨범은 외국에 나가서 녹음할 생각이야. 크하하, 반전 맞지?”“하하. 반전 맞네요. 그런데 외국 어느 나라요?”“몇 개 나라를 놓고 생각 중이야. 그중에 호주도 포함되어 있어.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지 않더라고.”“좋은 생각이세요. 저도 이번에 호주 공연 다니면서 앨범 작업을 호주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그래, 넌 앞으로 기회가 많을 거야.”
박 대표는 수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표정을 바꿨다.
“근데 너, 지금 여기 분위기 들었어?”“네, 다혜에게 들었어요. 작가 누나한테도 전화 왔었고요. 그리고 다른 전화도 많이 받았어요.”
“다른 전화?”
“방송 작가분도 있었고 기자분도 있었어요. 공연 기획자, 기획사도 있었고요. 작, 편곡 의뢰도 받았어요.”“작, 편곡은 괜찮잖아. 용돈 벌이 하면 좋지 않아?”“네, 작, 편곡은 할 생각이에요. 그런데 용돈 벌이 수준이 아니에요. 직장인 월급을 훌쩍 뛰어넘어요.”“오, 벌써 몸값이 그렇게 뛴 거야?”“네, 그런 거 같아요. 헤헤.”
수철은 멋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