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보상과 변화의 시간(1)
역시 방송의 힘은 대단했다. 수철의 작, 편곡료가 그새 두 배로 뛰었다.
“처음 뚫는 게 어렵지, 한번 뚫으면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금액은 앞으로 더 올라갈 거고.”“감사해요, 그리고 방송 출연이나 인터뷰 같은 다른 제안은 모두 거절했어요. 그래도 계속 전화가 와서 좀 그렇지만요.”“귀찮더라도 조금만 참으면 돼, 한두 주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한두 주요?”
“그래, 최종 진출자들로 방송 포커스가 맞춰지면 떨어진 사람들은 기억에서 사라지거든.”
“아하.”
수철은 계속되는 전화가 피곤했다. 무턱대고 만나자는 얘기를 매번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박 대표의 말이 맞다면 한두 주 후에는 잠잠해질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곧 음원 수익이 들어오면 깜짝 놀랄 거야. 다혜한테 얘기 들었는데, 네가 편곡한 곡이 다 상위에 랭크됐다더군.”“네, 저도 얘기 들었어요. 다혜는 차 살 생각까지 하더라고요. 자기 자작곡이 히트 치고 있다고요.”“나보고도 어떤 차가 좋냐고 물어보더라고. 이러다 땅 보러 다니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하하.”
박 대표가 다혜 얘기를 하며 고개를 저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그래서 작업실은 언제 꾸리려고?”“안 그래도 그것 여쭤보려고요. 내일부터 장소를 보러 다니려고 하는데, 적절한 보증금과 월세를 좀 알려 주세요. 공간에 대한 조언도 해 주시면 좋고요.”
박 대표가 고개를 갸웃했다.
“계약하려면 음원 정산이 끝나야 하지 않아?”“아니에요. 지금도 할 수 있어요.”“많이 모았네? 공연 가서 많이 벌었나?”“공연보다 쌤이 주신 작업을 하면서 많이 모았어요.”
“좋은 얘기네.”
“네, 감사해요.”
“이제 공연도 다 끝났으니, 밀려 있던 작업을 해야지?”
“네.”
박 대표가 일어나 수철이 작업할 시디를 찾았다. 책상 한편에 놓여 있던 시디를 집어 건네며 물었다.
“이 근처는 어때? 작업실 말이야.”“이 근처면 저는 좋죠. 아시는 곳이 있어요?”“응, 여기서 10분 정도 거리의 건물인데, 내가 알던 사진 작가가 작업실로 쓰던 공간이야. 그 친구가 지방으로 옮겨 가서 지금은 비어 있거든. 음악 작업실로 쓰기는 딱 좋아.”“지금 한번 볼 수 있나요?”
“지금?”
“네.”
“알았어, 부동산에 전화해 볼게.”
* * *
박 대표가 전화하고, 수철은 곧바로 작업실을 보러 갔다.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부동산 아저씨가 뛰어왔다.
“들어가시죠.”
비어 있는 공간은 지하가 아니라 3층이었다.
“햇볕도 잘 들고, 여름엔 창문만 열어도 바람이 시원해요.”
부동산 아저씨는 작업실 이곳저곳을 보여 주며 설명했다. 수도꼭지를 돌려 물이 잘 나오는지 확인하고, 화장실 문을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창문을 열어 바람이 잘 들어온다는 것도 확인시켰다.
수철은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박 대표를 쳐다봤다. 박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계약할게요.”
“그러시겠어요?”
“네, 계약금 찾아올게요.”
수철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계약을 했다.
박 대표의 말대로 작업실로 딱인 공간이었다.
지하가 아니라, 햇볕이 잘 드는 3층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화분이 몇 개 놓인 작은 테라스도 좋았다.
무엇보다 가까운 곳에 공원이 있어서 산책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작곡가에게 산책은 필수다.
* * *
“야, 용수철! 왔으면 보고를 해야지!”
박 대표와 점심을 먹고 작업실로 돌아오는데, 다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했잖아.”
“대면 보고를 해야지.”
다혜는 말을 하다 말고 대뜸 손을 내밀었다.
“내놔.”
“뭘?”
“내 선물.”
“옜다.”
“이거 뭐야?”
“너, 차 사면 열쇠 매달라고 미리 주는 거야. 자연산 캥거루 열쇠고리야.”
“햐, 자연산.”
다혜가 열쇠고리와 수철을 번갈아 쳐다봤다.
“요즘 누가 차 키에 이런 열쇠고리에 달아? 그리고 딸랑 이거 하나야?”
“싫으면 내놔.”
“아니야, 그래도 네가 선물을 샀다는 게 어디야?”
그때 박 대표가 호주머니에서 코알라 열쇠고리를 꺼내서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렸다.
“헐, 뭐야? 쌤 게 더 좋은데? 와, 코알라 완전 귀여워!”“넌 캥거루가 어울려.”“뭐가 어울리는데?”
“캥거루는 뛰어다니지만 코알라는 나무에 붙어서 잠만 잔다고.”“……그러니까 잠만 자지 말고, 캥거루처럼 뛰어다니면서 칼로리 소모를 해라?”
“…….”
“…….”
다혜는 그제야 뾰로통한 얼굴로 박 대표에게 인사를 건넸다.
“쌤, 저 왔어요.”
“빨리도 인사한다.”
작업실에 들어와 의자에 앉자, 다혜가 그간에 있었던 일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티브이로 보니까 우리가 했던 거랑 많이 달랐어. 작가 언니가 얘기한 찰진 편집이라는 말이 이해되더라고. 편집의 힘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고.”“뭐가 그렇게 달라?”“우리가 실제로 했던 거보다 경연이 훨씬 더 박진감 있게 진행돼. 진짜 치열하게 경쟁을 하듯이 말이야. 우린 아무 생각 없었잖아? 순서 되면 노래하고, 연주하고, 대기실에서 한 번씩 놀란 표정 지어 주고 그랬는데, 티브이로 보니까 그렇지 않더라고.”
“그렇겠지.”
수철은 당연하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리고 너한테 수식어가 많이 붙었어.”
“수식어?”
“신비로운 뮤지션, 천재 뮤지션이래.”
“…….”
“우리 ‘와이 트리오’가 한국을 이끌 3인의 아티스트래! 호호.”
다혜는 방송에 나온 멘트에 기분이 좋아서 입을 짜악 벌리고 웃었다. 수철은 웃는 다혜를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수철이 궁금한 건 딱 하나였다.
“그래서 음원이 얼마나 팔렸는데?”“나도 모르지. 다음 주가 첫 정산인데, 많이 팔렸다는 얘기만 들었어. 작가 언니 말로는 시청률 대비해 보면 역대 최고일 수도 있데.”
“굿 뉴스네?”
“굿 뉴스지! 첫 주부터 계속 상위권에 있었으니까. 돌아가면서 1등도 한 번씩 찍었어.”“그래? 몇 주 사이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내가 그랬잖아, 너 한국 오면 깜짝 놀랄 거라고.”“아직은 아니고. 통장에 돈이 찍히면 그때는 좀 놀랄게.”“그래, 너다운 생각이다.”
다혜는 핀잔을 주려고 입을 달싹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돈 받으면 뭐 할 거야?”
“살 거 많아.”
“뭐 살 건데?”
“악기도 사고, 녹음 장비도 몇 개 살 거야. 스피커도 사고.”“스피커는 쌤한테 사면 되겠다.”
다혜가 말을 하며 박 대표를 쳐다봤다. 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래, 수철아. 스피커 바꿀 생각인데 내 거 사라. 싸게 줄게. 너도 내 스피커 좋아하잖아.”
“헤헤, 아니에요.”
“왜 웃어? 진짜 싸게 줄게.”“아니에요, 전 쌤보다 더 좋은 거 사려고요.”
“컥!”
딸꾹.
박 대표가 놀라서 딸꾹질을 했다. 입을 닦고는 실실 웃었다.
“흐, 그래서 이제 날 넘어서겠다?”“헤헤, 아니에요. 봐 둔 게 있어서요.”
“봐 둔 게 뭔데?”
“정확한 모델은 모르겠어요. 이번에 같이 공연한 멤버 집에서 봤는데, 소리가 좋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보려고요.”“소리가 좋아도 작업실에선 모니터 스피커를 써야지.”“네, 그 친구가 작업할 때 쓰는 모니터 스피커였어요.”“쩝, 그렇군. 그럼 내 스피커는 누구한테 팔아먹나?”
다혜를 쳐다봤다.
“윤다혜, 넌 생각 없어?”
“전혀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저는 새 차에만 집중하려고요.”“그 차에 저 스피커 달면 되지.”“저 스피커를 어디에 달아요?”“지붕에 싣고 다니면 되지. 불법 아닐걸?”“쌤, 그냥 중고장터에 올리세요. 손가락 움직이기 힘드시면 제가 올려 드릴까요?”“아니야, 아직 그 정도 힘은 있어.”
박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 마실 사람 손.”
“손.”
“손.”
“아이스?”
“아이스, 오케이.”
“미 투.”
박 대표가 아이스 커피를 석 잔 만들어 왔다. 빨대로 쭉 한 모금 빨아먹고는 다혜에게 물었다.
“그래서 시청률이 얼마 나왔대?”“지난주에 21% 나왔다고 들었어요.”“와, 진짜 대박 났네? 정말 높게 나왔어.”
박 대표가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보도 자료 도배하고 홍보에 돈 쏟아붓더니 결국 터트렸네. 거기 피디가 상술이 좋다고 하던데 진짜 대단한가 봐.”
박 대표도 프로그램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아그작 얼음을 씹어 먹던 다혜가 수철에게 물었다.
“와이 트리오 앨범 내자는 전화도 많이 받았어. 작가 언니도 좋은 기회라고 무조건 한 장이라도 내 보래. 네 생각은 어때?”“와이 트리오 이제 안 할 거잖아. 은주도 소속사가 생길 테고.”“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내 보래. 은주가 소속사 생겨도 홍보가 되니까 소속사에서도 좋아할 거래.”“사기 같지 않아? 듣는 사람들 우롱하는 거잖아.”
“…….”
“그리고 우리 음악 이래 봤자, 내 곡이랑 네 곡. 두 곡밖에 없잖아. 내 곡은 노래방에서 부르지도 못할 텐데.”“그래서 빨리 몇 곡 더 써서 앨범을 내라는 거야. 그러면 다른 곡도 뜰 거래.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하더라고. 팬 서비스 차원에서도 필요한 거고. 흠, 물론 내 생각이 아니고 제작진 아저씨들의 생각이야.”
제작진의 생각이라지만 다혜도 앨범을 내고 싶은지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수철은 생각이 달랐다.
“그 아저씨들 말에 끌려다니지 마. 만약에 음반을 낼 거면 우리가 하면 되지. 굳이 다른 회사와 계약할 필요 없어. 네 말대로 와이 트리오의 인기가 많다면, 음반을 내기만 하면 잘 팔릴 테니까.”
“그건 그렇지.”
“그런데 난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그건 욕심이야. 와이 트리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속이는 거고.”
수철의 말에 박 대표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혜는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다.
“쩝, 알았어.”
수철이 싫다는데 끝까지 우길 수는 없었다.
“그건 그렇고 네 음악은 어떡할 거야?”
“뭘 어떡해?”
“다시 편곡할 거야?”
“전혀.”
음원을 팔아서 수익은 올리고 싶은데 곡은 너무 길고, 그래서 제작진이 짜낸 아이디어가 ‘곡을 줄여서 녹음하자’였다.
영상도 줄여서 편집할 거니 수철의 자작곡도 3분의 1로 뚝 잘라서 다시 편곡을 요청하겠다는 거였다. 장 피디가 꾀를 부린 것이다.
수철을 설득하는 것에 의견이 모였고, 작가가 전화를 해 왔다.
-수철아, 가능하겠어?
전화를 받은 수철은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다른 곡은 몰라도 ‘Radiate’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지금 다혜는 그 얘기를 묻고 있는 거다.
수철은 고개를 저었다.
“너도 알잖아. ‘Radiate’, 이 곡이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알지.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녹음을 안 했으면 안 했지, 곡을 줄일 수는 없어.”“그래도 계약이…….”
수철은 계약이라는 말에 욱했다.
“계약 같은 거 필요 없어, 그리고 곡을 줄인다는 것에 사인한 적도 없고. 내 생각은 바뀌지 않을 거야.”
수철이 강하게 얘기하자 다혜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작가 언니가 계속 물어봐서 말해 본 거뿐이야.”
수철이 다혜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너, 몇 주 사이에 많이 변한 거 같다?”
“뭐가?”
“돈독이 오른 거 같아.”
“뭐?”
“너무 작가 누나랑 자주 통화하는 거 아냐?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 그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말고. 어차피 그 사람들 영양가 떨어지면 버린다며? 네가 한 말이잖아.”
다혜가 할 말을 잃고 박 대표를 쳐다봤다.
“쌤이 보기에도 제가 그래요?”
“조금.”
박 대표까지 수철의 의견에 동의하자 다혜는 반박을 못 했다.
수철이 마무리 지었다.
“다시 회의하고 연락 준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봐. 그때 녹음 스케줄이 나오면 녹음하면 되잖아.”
“알았어.”
“곡을 줄일 수는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그래, 네 곡이니까 너의 선택을 따를게.”
다혜가 결국 수긍했다. 박 대표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건 수철이 말이 맞아. 곡을 줄이라고 강요하지는 못할 거야. 만약에 그랬다가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하지만 녹음은 해야 할 거야. 그게 오디션 프로그램의 룰이니까.”
* * *
김명석은 많은 곡을 히트시킨 작곡자답게 자신의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여긴가?
수철은 주소를 확인한 후, 잠시 건물을 올려다봤다.
“어떻게 오셨어요?”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김명석 선생님 만나러 왔어요.”
“혹시 용수철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