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65화 (65/239)

#65화. 보상과 변화의 시간(2)

“네, 맞아요.”

수철이 대답하자 여자는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일찍 오셨네요. 잠시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 선생님 금방 오실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마실 것 좀 드릴까요?”“물 한 잔 주시면 감사합니다.”

수철이 복도에 있는 소파에 앉자 여직원이 잔에 물을 담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수철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돌려 내부를 훑어봤다. 긴 복도 양옆으로 연습실로 보이는 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궁금함에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걸어갔다.

방들을 힐끔 보며 문 앞을 지나가는데, 문틈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음악 바닥은 좁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넘쳐. 뜨고 안 뜨고의 승부가 어디서 갈리는지 알아?”

“…….”

“바로 간절함이야. 간절함에서 갈린다고! 너희 눈빛엔 아직도 그것이 부족해!”

기획사의 연습생들인가?

수철은 고개를 갸웃했다. 복도에 늘어선 많은 방에서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명석이 이렇게 많은 가수를 키울 리가 없는데 이상했다.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악물어! 간절함을 눈빛에 담아서 다시 시작해! 자, 고고!”

트레이너가 손뼉을 치면서 연습생들을 다그쳤다.

그때 등 뒤에서 김명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수철아! 언제 왔어?”

들어오다가 수철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수철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전 방금 왔어요.”

“잘 찾아왔네?”

“네, 잘 지내셨어요?”“그래, 난 잘 지냈지. 너도 잘 지냈어?”

“네, 저도요.”

“외국 공연은 재밌었고?”

“네, 좋았어요.”

“그래, 얼굴 좋아 보인다. 자, 이쪽으로 올라가자.”

김명석은 수철을 끌고 한 층을 더 올라갔다.

* * *

3층에는 김명석만이 사용하는 작업실이 꾸며져 있었다. 작업실이라기보다 전문 녹음실이었다.

“와!”

컨트롤 룸에 들어서자 수철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큰 부스와 마이크, 그리고 악기와 장비들은 웬만큼 좋은 녹음실을 능가했다.

대한민국 히트 작곡가의 작업실은 달랐다. 평범하지 않았다. 모든 게 최상급들이었다.

“정말 좋네요.”

수철이 신기한 얼굴로 녹음실을 둘러봤다.

김명석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마음에 들어?”

“네, 완전요. 작업실이 아니라, 녹음실인데요?”“요즘은 다 이렇게 해. 작업하고 바로 녹음도 할 수 있게 말이야.”

“아…….”

“지금은 디지털 시대라 여기서 믹싱까지 하고 마스터링만 넘기면 작업이 끝나. 굳이 외국까지 가지 않아도 이메일로 음원을 보내면 거기서 마스터링을 해서 보내오지.”“네, 얘기 들었어요.”“참 좋은 세상이야. 옛날처럼 힘들여서 앨범을 찍을 필요도 없이 음원만 넘기면 다 해결되니까 말이야. 어떻게 보면 이제 기획사도 필요 없는 세상이야. 그래서 홍보만 해 주는 회사가 생겨나고 있잖아.”

“아…….”

수철은 김명석의 작업 방식이 최적화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도 금방 이런 작업실이 생길 거야.”“네, 그랬으면 좋겠어요.”“여기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원하면 언제든지 와서 사용해. 넌 언제나 환영이야.”“네, 감사해요, 그런데 저도 곧 작업실이 생길 거예요.”

“그래?”

“네, 계약도 했어요.”“오! 축하해, 위치가 어디야? 여기서 가까워?”“아니에요, 여기선 좀 멀어요.”“아이고, 아쉽다. 진즉에 알았으면 내가 이 근처로 소개해 줬을 텐데. 아니면 너한테 아예 방 하나 내줄 수도 있는데. 평생 무료로 말이야.”“하하, 감사해요, 자주 놀러 올게요.”“그래, 우리 친하게 지내기로 했잖아.”

“네, 헤헤.”

김명석은 수철에게 녹음실 이곳저곳을 보여 줬다.

작업 공간과 보컬 연습실, 미팅룸까지 갖춰져 있었다. 기획사 같았다.

“커피부터 한 잔 할까?”

“네, 주세요.”

“참고로 내 작업실에선 그 커피 맛이 안 나, 일회용 커피의 중독적인 맛 말이야.”“아, 하하. 전 괜찮아요.”

김명석은 커피를 타서 수철에게 건넸다.

수철과 마주 앉더니 물었다.

“아까 복도에서 뭘 듣고 있었던 거야?”“지나가는데 무슨 소리가 들려서요.”“아, 그거? 노래하겠다고 연습생들이 들어와서 요즘 좀 시끄러워. 방음을 다시 해야 하는데,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아…….”

“지금 여기서 연습하고 있는 애들이 어떤 애들인지 알아?”

“아니요.”

“이런 얘기하긴 좀 그렇지만, 불쌍한 애들이야.”

“네? 왜요?”

“배우로 데뷔했다가 잘 안 풀린 애들이야. 부모들이 가수라도 데뷔시켜 달라고 하도 부탁하니까, 기획사에서 보컬 트레이너를 붙여서 여기서 연습시키는 거야. 나는 장소만 빌려주는 거고.”“아……. 그런데 왜 불쌍해요?”“외모 믿고 어떻게든 팀을 짜서 데뷔시키고 싶은데, 노래가 안 돼. 게다가 저 중에 절반은 몸치야. 춤도 안 된단 말이지.”

“아, 그렇군요.”

“5년째 저러고 있는 애들도 있어. 군대도 미루고 말이야. 나이는 먹어 가고, 데뷔는 안 되고, 그래서 안타깝지.”

“아…….”

“기획사는 나한테 부탁을 하는데, 내가 보기엔 더 늦기 전에 다른 길을 가는 게 맞거든.”

“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짠해. 정말 열심히 하거든.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노래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기획사에 몇 번 얘기를 해 줬는데도, 기획사도 어쩔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 계약 기간도 남았고, 부모들이 워낙 세게 밀어붙여서 말이야.”

김명석은 말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향이 잘못됐다는 뜻이었다. 수철도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았다. 김명석의 말대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김명석은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을 돌렸다.

“암튼 그건 그거고, 얼굴이 많이 탔네?”“네, 야외 공연도 하고 그래서요. 아 참, 이거 드릴게요.”

수철은 갑자기 생각나서 주머니에서 열쇠고리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거 뭐야? 선물이야?”“네, 공항에서 생각나서 하나 사 왔어요.”“와, 나한테까지 선물을 주다니 정말 고마워.”

김명석은 무슨 대단한 선물이라도 받은 듯 기뻐했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와이 트리오가 오디션에서 마지막에 불렀던 제 자작곡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 ‘Radiate’ 그 곡을 내가 어떻게 잊어?”“아, 기억하시는군요? 그 곡을 녹음해야 해서요.”“그래, 얘기 들었어. 녹음하기로 했다고.”

“네.”

“나도 그 음악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야.”“아, 네.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제가 그 곡을 프로듀싱하면 어떨까요? 제 곡이니까 직접 프로듀싱하고 싶어서요.”“음. 난 찬성이야. 그 곡은 당연히 네가 하는 게 맞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할 게 없거든.”“네, 그렇게 말해 주셔서 감사해요.”“감사하긴, 아무래도 네 곡은 네가 하는 게 좋지. 특히 ‘Radiate’는 당연히 네가 해야지. 난 괜히 손댔다가 욕먹고 싶지 않아. 하하.”“에이, 그럴 리가요. 그럼 제가 작가 누나에게 그렇게 전할게요.”

“그래.”

김명석은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 마신 커피잔을 치웠다.

그때 한 소녀가 빵긋 웃으며 컨트롤 룸에 얼굴을 내밀었다.

“대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소녀는 김명석을 대장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선생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다고, 날 대장 선생님이라고 불러.”

“아…….”

수철과 눈이 마주치자 김명석이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소녀를 봤다.

“어서 와, 하린아.”

김명석은 하린이가 귀여운지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그리고 수철을 소개했다.

“하린아, 와서 인사해. 네 보컬 연습을 도와주실 용수철 선생님이야.”“와! 오디션 스타다!”

하린이가 수철을 보더니 두 손을 들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디션 스타?

“하하, 오디션 스타 맞지.”

수철이 멍한 얼굴로 쳐다보자 김명석이 웃으며 수철의 어깨를 툭 쳤다.

하린이가 다가와 귀엽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주하린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수철이 인사하자 김명석이 몸을 기울이며 나지막이 한마디 덧붙였다.

“방송에서 너의 비주얼에 힘을 많이 실었더라고.”

에구.

수철의 입에서 불편함과 한숨이 섞여 나왔다.

김명석이 수철의 얼굴을 살피다 물었다.

“여기 올 때 뭐 타고 왔어?”

“지하철이요.”

“사람들이 안 알아봐?”“별로……. 못 느꼈는데요?”“얼굴이 좀 타서 그런가? 웬만하면 당분간은 택시 타고 다니는 게 좋을 거야.”

“…….”

수철은 고개를 저었다.

이놈의 오디션 꼬리표는 평생을 따라다닐 거 같다.

“오디션 스타를 여기서 만나게 돼서 영광이에요.”

하린이는 수철의 속도 모르고, 개구지게 두 손을 모으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햐.

수철은 웃음으로 넘겼다.

김명석이 손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하린이는 잘생긴 오빠랑 연습 열심히 해. 오빠 얼굴만 쳐다보고 있지 말고.”

“네.”

하린이는 뭐가 좋은지 해죽거렸다.

반면에 수철은 황당한 얼굴로 김명석을 쳐다봤다. 미간을 좁혔다.

“선생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 농담이 좀 지나쳤나? 아름다운 청춘들이 부러워서 그래.”

김명석은 미안했는지 뻘쭘한 얼굴로 쳐다봤다.

“근데 선생님, 어디 가세요?”“옆 방에 있을 거야. 편하게 연습하라고 자리를 피해 주는 거야.”“안 그러셔도 되는데…….”“내가 있으면 불편하지 않겠어?”

“전 괜찮아요.”

“그럼 나야 좋지. 나도 네가 연습시키는 거 보면서 배우고 말이야.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거든.”“배우시기는요, 전 그냥 듣기만 하는 건데요.”“알았어, 그럼 난 옆에서 조용히 지켜볼게.”

김명석은 수철이 잡아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의자를 당겨 털썩 앉았다.

“근데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죠?”“편하게 하린이라고 불러.”“처음 봤는데 그렇게 불러도 돼요?”“아니면 뭐라고 부르게? 하린 씨? 하린 학생?”

그 말에 하린이가 웃었다. 김명석의 말대로 하린 씨라고 부르는 건 이상할 거 같다. 하린 학생은 더더군다나 아니고.

“하린이라고 불러 주세용.”

하린이가 먼저 나섰다.

“그래, 알았어. 그럼 편하게 이름 부를게.”

수철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저도 오빠라고 해도 되죠?”

“뭐?”

하린이의 순간적인 도발에 수철이 멍하니 쳐다보자 김명석이 끼어들었다.

“넌 그렇게 부르면 안 되지. 선생님이라고 불러.”

김명석이 단호하게 말하자 하린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네, 대장 선생님.”

수철은 픽 웃음이 났다.

의자를 당겨 앉으며 김명석에게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볼게요.”

“그래.”

“먼저 하린이 노래부터 들어 볼게요.”

* * *

하린이가 부스 안에 들어가 헤드폰을 썼다.

마이크 앞에 서자, 조금 전 소녀의 모습은 사라졌다.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돌변했다.

“아하~ 워어우 워우―!”

소리를 쭉쭉 뽑아내며 양팔을 뻗었다. 연습한 동작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며 나오는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I have nothing, nothing, nothing. If I don’t have you, you―!”

손을 치켜들며 노래하는 모습이 뮤지컬 무대에 서 있는 배우 같았다. 아니, 오페라 가수 같았다.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의 어려운 노래를 편하게 소화해 냈다.

수철의 눈이 반짝였다.

“음…….”

수철은 김명석이 앨범을 만들려는 이유를 알았다. 하린이는 옥석이었다. 소위 말하는 대박 가수의 조짐이 보였다.

수철이 노래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자, 김명석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때?”

“평범하지 않네요.”

“남다르지?”

“네.”

“반짝반짝 빛나는 원석 같지 않아?”

수철이 자기 생각에 동의하자, 김명석은 신이 나서 계속 물었다.

수철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네, 맞아요. 장점과 단점이 섞여 있는데, 단점만 걷어 내면 대단한 보컬이 될 거 같아요.”

“그렇지?”

“네, 그런데 어떻게 만나게 된 거예요?”“이야기가 길어, 자세한 건 이따가 점심 먹으면서 얘기해 줄게.”

김명석은 뭔가 대단한 얘깃거리라도 있는지 묘한 미소를 띠며 답변을 뒤로 미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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