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보상과 변화의 시간(5)
“이거 뭐야? 열쇠고리야?”“네, 외국 공연 갔다 오면서 하나 샀어요.”“고마워, 작업실 만들고 있다고?”
“네.”
“내가 도와줄 거 없어?”
작업실 방음은 도어스 사장 형이 도와줬다. 열쇠고리 전해 주러 갔다가 작업실 방음 인건비를 줄이는 결과가 됐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됐다.
수철은 그동안 사 모은 기타와 신디사이저를 모두 작업실로 옮겼다. 그리고 컴퓨터와 작곡 프로그램도 새로 구매했다. 간단한 녹음을 위한 마이크와 몇몇 장비들도 샀다. 악기 녹음은 어려워도 보컬 데모 녹음 정도는 할 수 있게 갖췄다.
“쌤, 정말 감사해요.”
무엇보다 박 대표의 도움이 컸다. 직접 나서서 보증금도 깎고, 월세도 깎았다.
그리고 자신이 안 쓰는 녹음 장비도 선물했다. 존경을 안 할 수가 없는 분이다.
악기 세팅까지 다 마무리하고 나자 박 대표가 물었다.
“이제 네 계획이 어떻게 돼?”
“어떤 계획이요?”
“이 작업실에서 네가 작업할 계획을 묻는 거야.”“우선 쌤이 주신 작업을 먼저 마무리하고요.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드린 영국 친구들과 제시랑 같이하는 앨범을 먼저 준비하게 될 거 같아요.”
“결정이 난 거야?”
“네, 그쪽 음반사에서 오케이 했어요.”“잘됐네, 좋은 기회가 되겠어.”“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상황을 봐서 제시의 앨범도 만들어 볼 생각이에요.”“그 대단하다는 호주 보컬?”“네, 그런데 아직 확답은 못 받았어요. 아무래도 이번에 앨범 진행되는 걸 보고 결정을 할 생각인가 봐요.”“그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지. 어쨌든 외국에 한번 나갔다 오더니 시야가 확 트였네? 나가 보니까 한국이 많이 작지?”“네, 아무래도 음반은 외국에서 내는 게 좋은 거 같아요. 거기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요. 영국에서 내면 유럽은 당연하고, 미국까지 간다고 들었어요.”
그 말에 박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내가 잘 알지. 나 학교 다닐 때도 그런 말이 있었어. 음악은 영국에서 탄생하지만 흥행은 미국에서 이뤄진다고 말이야.”“네, 그런 거 같아요. 비틀스도 그랬잖아요.”“비틀스도 있고, 다른 뮤지션도 많아. 게다가 그곳은 음악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나라야. 실험적인 시도도 많이 하지. 한 나라의 문화가 커지려면 무엇보다 다양성이 뿌리를 내리는 게 중요한데, 우리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지.”
“아, 네…….”
수철은 박 대표가 우려하는 부분을 잘 알고 있다. 평소에도 많이 듣던 얘기다.
“그래서 제시라는 친구의 앨범을 만들면, 장르는 재즈?”“하게 된다면 퓨전 형태가 될 거 같아요. 허비 행콕 선생님처럼 재즈랑 다른 장르랑 섞어서요.”“좋은 생각이야. 여기서는 어렵지만 거기서는 충분히 가능하지.”“네, 그리고 그다음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해 볼 생각이에요.”“그다음? 제시의 앨범을 계속해 보겠다는 얘기야?”“네,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어떤 보컬인지 궁금하네. 네가 그 정도로 말할 정도면 굉장한 매력이 있다는 얘긴데…….”“곧 보시게 될 거예요. 다른 보컬에겐 없는 색깔을 갖고 있어요. 쌤도 만나 보시면 놀랄 거예요”
“그 정도야?”
“네.”
“음…… 어떤 인물일지 기대되네.”
박 대표는 수철이 이렇게 칭찬할 정도면 예사로운 보컬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수철은 박 대표를 보며 씨익 한번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전에 쌤이랑 합작으로 앨범을 한 장 만들어 볼 생각이에요.”
“나랑 한 장?”
“네.”
“허, 이 녀석 봐라? 내 허락도 받지 않고 그냥 네가 막 결정하는 거야?”“계획을 물어보셔서 말한 건데요? 같이하실 거잖아요.”“어쭈? 이제 막 앞서나가네? 허 참.”
박 대표가 헛웃음 소리를 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앨범 제작 좀 가르쳐 주세요. 헤헤.”“헐, 그 표정은 또 뭐야? 너도 그런 표정 할 줄 알아?”“제 표정이 어때서요?”“너, 상남자 아니었어?”“지금 상남자 스타일로 말한 거잖아요. ‘박 대표님, 나랑 같이 앨범 한 장 해 보지 않겠어요?’ 이런 뉘앙스였는데요?”
“허!”
박 대표의 말문이 막혔다.
“많이 컸다, 많이 컸어.”“쌤이 키워 주신 거잖아요.”“한 번을 안 지네.”
“언제부터 시작할까요?”“컥! 너, 이러다 조만간 날 비서로 부려 먹겠다? 이 분위기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데?”
“쌤.”
“뭐?”
“월급 얼마나 받고 싶으세요?”“근데, 이 녀석이!”
박 대표가 주먹을 쥐어 툭 쳤다.
잠시 후, 수철이 처음 타 주는 커피를 한잔 마신 박 대표는 진지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진짜 음반 제작을 배워 보고 싶어?”
“네.”
“처음부터 끝까지?”
“네.”
“제작은 음악 하는 것과는 달라. 피곤한 일이야.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래도 배우고 싶어?”“네, 쌤도 하시는 일이잖아요.”“알았어, 네 뜻은 알았으니까 접근법을 생각해 볼게.”
“감사해요, 쌤.”
* * *
수철은 작업실을 오픈하자마자 박 대표가 연결해 준 편곡과 CM송 작곡부터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오랜만에 작업에 집중하는 게 즐거웠다. 무엇보다 자기 작업실에서 편하게 작업한다는 게 좋았다.
오전 작업을 마치고, 하린이를 연습시키기 위해 김명석의 작업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수철이 왔다는 소식에 하린이가 연습하다가 위층으로 올라왔다.
“연습 많이 했어?”
“네, 선생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매일 했어요. 대장 선생님이 저 보러 많이 좋아졌대요.”
하린이의 말에 수철이 김명석을 쳐다봤다. 김명석은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놀라워. 하린이한테 네 연습법이 짝짝 붙어. 아무래도 나도 너한테 레슨을 좀 받아야겠어.”“에이, 무슨 말씀을…….”“농담이 아니야, 레슨비 두둑이 낼 테니까 날 제자로 한번 생각해 봐.”
“선생님!”
“응?”
“하린이 체크 좀 할게요.”
“……그래.”
김명석은 뻘쭘한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수철은 하린이를 봤다.
“하린아, 들어가서 노래 좀 불러 볼래? 곡은 휘트니 휴스턴 곡으로 해 봐.”
“네.”
하린이가 부스 안에 들어가 헤드폰을 썼다. 반주를 틀어 주자 노래를 시작했다.
“Share my life, Take me for what I am―!”
“음.”
김명석의 말이 맞았다. 성장이 빠르다. 단 며칠 만에 눈에 띌 정도로 연습법의 효과가 나타났다. 하린이는 선생들이 딱 좋아할 만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몇 번만 더 하면 제 손을 떠나도 되겠는데요?”“에이, 그래도 끝까지 신경 써 줘. 더 발전시킬 수 있잖아. 한참 약발 받고 있는데 손을 떼면 배신이지!”“네, 한 달은 채울게요. 성장이 빨라서 단점은 금방 잡겠어요.”“나도 매일 놀란다니까? 어려서 그런지 하루하루 달라지는 게 눈에 보여. 저것 봐, 발음 좋아진 거 봐.”
하린이는 수철이 지적했던 경음을 정확히 발음하고, 음을 잘 조이고 있었다. 테너 곡을 연습한 탓인지 소리에 힘도 붙었다. 수철이 기획사 사장이라도 이뻐할 거 같았다.
하린이의 노래가 끝나자 수철이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잘 들었어. 연습 열심히 했나 보네. 많이 좋아졌어.”“감사합니다, 호호호!”
수철의 칭찬에 하린이의 입이 벌어졌다.
“하린아, 잠시 나와 볼래?”
“네.”
하린이가 다시 컨트롤 룸으로 돌아왔다.
“연습법이 너랑 잘 맞으니까 2주 동안은 지금 방법으로 계속해 보자.”
“네.”
“다른 건 특별하게 말할 게 없고, 한 가지만 얘기할게.”
“네.”
“소리를 길게 내는 부분이 아직도 많이 약해. 최대한 긴 호흡으로 최대한 소리를 멀리 보낸다고 생각하며 연습해 봐. 소리가 거칠어지면 절대 안 되고.”
“네, 알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5일 후에 다시 보자.”“네, 수고하셨습니다.”
하린이가 꾸벅 인사하고 나갔다.
“오늘은 일찍 끝냈네?”“네, 앞으로 한두 번은 오늘처럼 모니터링하고 간단한 체크만 할 거예요. 그리고서 잘 안 잡히는 부분만 집중적으로 연습법을 붙여 볼 생각이에요.”“그래, 계획이 다 있구나.”
김명석과 대화하는데, 정장 차림의 낯선 사내가 컨트롤 룸에 발을 들였다.
사내를 발견하자 김명석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사내는 깍듯하게 인사하고 다가왔다.
“이쪽이 지난번에 말씀드린 용수철 씨입니다.”“안녕하세요, 최민준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김명석이 수철을 소개하자 사내는 영광이라는 말까지 써 가며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용수철입니다.”
수철이 인사하자, 사내는 명함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금별기획의 명함이었다. 사내의 직급은 팀장이었다.
김명석이 얘기한 엘진 그룹의 프로젝트는 금별기획이 주축이 돼서 진행하는 것 같았다.
“용수철 선생님께서 하린이를 잘 가르쳐 주셔서…….”
최 팀장은 수철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대화를 해 보니 엘리트 느낌이 물씬 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경쾌하고 밝았다. 딱딱하거나 어색함이 없었다. 김명석의 말대로 젠틀했다.
“드라마는 아직 기획 단계입니다. 하지만 스토리의 골격은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입니다. 산악에서 활강하는 장면이 많아서, 스위스나 캐나다에서 촬영을 많이 하게 될 겁니다.”“그렇군요. 음악은 언제까지 만들면 되나요?”“시간은 아직 넉넉합니다. 다음에 뵐 때 시놉시스를 먼저 보여 드리겠습니다. 구상만 하시고 계시다가 시간이 확정되면 작업을 시작하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마도 기획이 끝나고, 대본 만들고, 본격적으로 배우들 섭외하고, 장소 헌팅할 때쯤 시작하시게 될 겁니다.”
“아, 네.”
“그리고 그전에 음악 감독님과 미팅을 한두 차례 진행할 겁니다.”“알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최 팀장은 드라마 주제곡에 관한 얘기를 마치고도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할 말이 남아 있는데, 김명석을 의식하는지 얘기를 다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잠시만…….”
김명석이 눈치채고 자리를 비우자 최 팀장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드라마 주제곡뿐만 아니라 용수철 선생님께도 관심이 많습니다.”“저한테 관심이요?”
“네, 그래서 앞으로 선생님이 음악 활동하시는 것과 관련해서 좋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좋은 제안이라면 어떤…….”“자세한 얘기는 조만간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최 팀장은 수철의 물음엔 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만 남긴 채 밖으로 사라졌다.
* * *
첫 음원 정산 금액이 들어왔다.
‘와, 이렇게 많아?’
계좌에 찍힌 금액을 보니 제작진이 음원 수익에 신경 쓰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획사들이 음원 차트 상위권에 오르기 위해 목을 매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정산 수익은 달콤했다. 오디션에 대한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작업실을 하나 더 차리고도 남을 만한 돈이었다.
수철은 먼저 그동안 눈독을 들였던 스피커부터 주문했다.
“대박! 이것 봐 봐!”
며칠 후, 다혜가 차트 순위를 보내왔다.
수철의 자작곡이 노출되자마자 모두의 예상을 깨고 상위로 치솟았다. 하루 만에 10위권에 올라가더니, 3일 만에 1위를 찍었다.
“그 녀석 인기가 이 정도였어?”
예상외의 반응에 제작진도 놀랐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하지만 들뜬 분위기는 곧 사그라들었다. 영광의 시간은 며칠뿐이었다.
박 대표의 말대로 다음 방송에서 와이 트리오가 사라지고, 다른 진출자에게 포커스가 맞춰지자 순위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계속 상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지잉!
예외 없이 전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전화들은 예전과는 용건이 달랐다.
작업 의뢰가 많았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대부분 거절했지만 몇 개는 오케이 했다.
수철이 오케이 한 것은 알짜배기들이었다.
첫 번째는 유명 자동차 회사의 신상품 ‘유니버셜’에 대한 광고 음악이었다.
이들은 수철이 놀랄 만한 금액을 작곡료로 제시했다. 박 대표의 말로는 이 업계에서 최고 A급에게만 준다는 금액이었다. 한번 이 금액을 받기 시작하면 계속 몸값이 유지될 거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만큼 수철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얘기다.
제안한 사람은 수철의 순수 창작력을 높게 산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특별한 가이드라인 없이 알아서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수철에게 그런 부분을 기대했다. 수철의 자작곡이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철이 가장 좋아했던 제안은 따로 있었다.
-안녕하세요, 용수철 작곡가 선생님! 저는 영화감독 ‘필립 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