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영화감독 필립 윤
필립 윤은 재미 교포 2세였다.
한국어 발음이 유창한 그는 도자기공에 관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작업을 위해 자신을 낳아 준 부모의 나라, 한국에 와 있었다.
그는 직접 스토리를 만들고 감독, 제작까지 다 하는 사람이었다.
이번 영화는 한국에서 촬영해서 칸영화제(Cannes Film Festival)에 출품할 계획이라고 했다.
-괜찮으시면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필립 윤은 당장 만나자고 했다. 수철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네, 저도 좋아요.”
영화음악은 평소 하고 싶었던 장르다.
* * *
“여깁니다!”
수철이 커피숍에 들어서자 까까머리 사내가 벌떡 일어나서 손을 높이 들었다. 필립 윤이었다. 수철은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필립 윤은 한눈에 수철을 알아봤다.
수철이 다가가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제가 전화드린 필립 윤입니다.”
필립 윤이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수철도 악수하며 이름을 밝혔다.
“저는 용수철입니다.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일찍 오셨네요?”“네, 서두르다 보니까 일찍 왔습니다. 바쁘신데 제가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아니에요, 저도 만나 뵙고 싶었어요. 영화음악에 관심이 많거든요.”“그렇게 말씀하셔서 다행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제가 너무 일방적으로 뵙자고 해서 건방지게 생각하신 건 아닌지 걱정했거든요.”
그는 예의가 발랐다. 수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데도 존칭을 했다. 예술가로서의 존중이었다.
“제가 더 죄송하죠, 강원도에서 여기까지 오시게 했으니까요.”
그는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강원도 동해의 한 바닷가에 머물고 있었다. 수철을 만나기 위해 아침 버스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아닙니다, 제가 뵙고 싶어서 온 건데요. 시간을 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해요.”
수철은 그의 말이 진심인 걸 알 수 있었다. 예술가들은 좋고 싫음이 얼굴에 드러난다. 지금 그의 얼굴은 기분 좋은 긴장으로 차 있었다.
짧은 까까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버스 타면서 유리창으로 지나가는 한국의 모습을 보는 게 좋습니다. 여기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살았던 것 같은 기운이 느껴지거든요. 그리고 산과 바다를 보면서 글을 쓸 때는…….”
수철이 만난 필립 윤은 눈빛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쉽게 지나치는 사물 하나에도 시선을 두는 사람이었다. 예술가다웠다.
그가 꺼내는 단어 하나하나는 모두 작품과 연결되어 있었다. 창작욕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감성적이었다.
“저는 ‘Radiate’를 듣고 펑펑 울었습니다.”
그는 지인의 추천으로 수철의 음악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며칠 고민 끝에 전화한 거라고 했다.
거짓이 없는 사람이었다.
“저는 작곡가님 같은 분과 꼭 같이 작업을 해 보고 싶습니다. 허락하신다면 말입니다.”“네, 저도 관심이 있어요. 감독님의 작품에 제가 잘 맞을지는 의문이지만요.”“하하, 겸손이 지나치시군요. 저는 한눈에 작곡가님의 재능을 알아봤습니다. 깊이는 제가 알 수 없지만,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창작하는 작가이자 감독이니까요.”
예술가는 예술가를 알아본다는 뜻이었다.
“아시겠지만 영상도 소리를 빼면 시체거든요.”
영화에서 소리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너무 자꾸 얘기해서 작곡가님이 불편하시겠지만, 며칠 동안 ‘Radiate’는 제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작곡가님의 음악 세계에 빠져 있는 느낌이랄까요.”
“아, 네.”
수철은 필립 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기하고 의아했다. Radiate를 어떻게 해석했기에 극찬하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건 각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질문을 하다 보면 작곡가는 자연스레 창작 의도를 말하게 된다. 그러면 듣는 이의 머릿속 그림이 변질되어 버린다.
음악을 만드는 건 작곡가의 영역이지만 자신의 인생과 연결 지어 그림을 떠올리는 건 듣는 이의 영역이다. 아무리 작곡자라고 해도 그 영역을 침범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수철은 그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필립 윤은 자신의 소감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마치 음악을 통해 수철의 삶을 이해했다는 투로 말했다. 수철이 궁금증을 갖는 이유였다.
내 곡을 다 이해했다는 말인가? 어떻게?
궁금증이 커질 무렵, 필립 윤이 수철의 의문을 관통하는 말을 꺼냈다.
“저는 특히, 감정이 요동치는 부문이 아주 매력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저의 잊혔던 과거가 모두 들고 일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아…….”
필립 윤의 감정이 수철에게 확 전이됐다. 처음 음악을 만들 때의 느낌이 다시 느껴졌다.
수철은 또렷해진 눈으로 필립 윤을 주시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작곡가님과 똑같지는 않지만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
“초등학교 다닐 때 인종차별을 당해서, 오랫동안 그 트라우마에 갇혀 있었습니다.”
“……!”
수철의 눈 밑이 살짝 떨렸다.
차가운 기운이 몸을 훑고 지나가며 팔뚝 위로 소름이 올라왔다.
영화감독에겐 보통 사람과 다른 제3의 감각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필립 윤은 수철이 표현하려 했던 소리의 의미를 꿰뚫고 있었다.
“작곡가님은 소리로 해소했지만 저는 그림으로 해소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도 해소하는 중입니다. 어릴 때 트라우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트라우마를 말이죠.”
수철은 그의 말뜻을 알았다. 사람의 원초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계속 영화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계속 예술의 길을 간다는 말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글이나 영상이 아닌, 소리로 말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저에게 벌어진 거죠.”
“아, 네…….”
“그날은 저도 자극받아서 시나리오를 많이 썼습니다. 하하.”
그는 동해안의 한 모텔에 머물며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했다. 매일 바다에 나가 헤드폰을 쓰고 수철의 음악을 들으며 산책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확실히 그는 달랐다. 소리에 대한 이해가 보통 사람과 달랐다.
“지금도 매일 듣고 있습니다. 길이도 짧지 않아서 충분히 감상이 가능합니다.”
모두가 길다고 했던 음악이 필립 윤에게는 적당한 길이였다.
“저도 제 생각대로 영화를 디렉팅(Directing, 연출)하지만, 보는 사람은 자기 입장에 맞춰 받아들이거든요. 잘 아시잖아요.”
“……네”
전문가다운 멘트였다. 그러면서도 말속에 세심한 배려가 숨어 있었다. 자신이 지나치게 해석했으면 한 명의 청중이 하는 소견으로 받아달라는 말이었다.
“이 정도면 저, 왕팬 아닌가요? 하하!”“아……. 네, 하하.”
필립 윤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농담을 던지며 너스레를 떨었다. 수철도 같이 웃었다.
어쨌든 종합해 보면 수철의 자작곡이 필립 윤에게 그만큼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선생님의 음악은 제 작품이랑도 많이 겹쳐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와 수철의 곡을 연관 지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작품 얘기를 꺼냈다.
“제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의 제목은 ‘백자(白瓷)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내용은…….”
필립 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에 관해 얘기를 쭉 이어 갔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표현했다.
얘기하는 중간중간에 그의 눈에서 광기 같은 게 엿보였다. 그래서 수철은 그의 얘기를 듣는 게 더 재밌었다. 수철에겐 익숙한 에너지였다.
긴 시간의 이야기가 끝나고, 필립 윤이 돌아갈 시간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혼자만 떠들다 갑니다. 하하.”“아니에요. 좋은 얘기 잘 들었어요. 그리고 멀리까지 와 주셔서 감사해요.”“네, 긴 얘기 잘 들어 주셔서 저도 감사해요.”“시나리오 작업 잘 마무리 짓기를 바랄게요. 또 뵙겠습니다.”
수철은 멀리까지 찾아와 준 필립 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악수했다.
“같은 창작자로서 용수철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연락드리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네,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수철은 꾸벅 인사하고 얼른 계산서를 집어 계산했다. 마음 같아서는 터미널에 가서 배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사이까진 아니어서 참았다.
* * *
“필립 윤이라면 나도 기사를 본 적이 있어.”
수철의 얘기를 들은 박 대표가 필립 윤을 아는 눈치다.
“아시는군요?”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알걸? 몇 년 전에 꽤 이슈가 됐었어. 한인 교포 2세의 시각으로 본 이민자 사회와 주류사회의 갈등을 다룬 다큐멘터리였을 거야, 다큐멘터리는 못 봤지만 기사는 읽었어.”“네, 저도 찾아보니까 그런 기사가 있더라고요.”“필립 윤은 처음 데뷔할 때부터 언론의 조명을 많이 받았었어.”
“아…….”
“초창기 한인 이주민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그들이 비참한 삶을 살면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실화 기반으로 다뤘으니까 우리나라 언론도 관심 가질 수밖에.”
박 대표는 필립 윤의 기사가 인상 깊었었는지 꽤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단한 일을 하신 분이네요.”“대단한 일 한 거 맞지. 그전까지는 그런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미국에 정착한 한인과 멕시코에 정착한 한인을 비교한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그전엔 알려지지 않았던 쿠바 한인의 후손을 추적하며 만든 다큐멘터리여서 정부에서도 관심을 보였던 거로 기억해.”
박 대표의 말에 의하면 그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주목받는 감독이라고 했다. 흥행을 쫓는 감독은 아니지만, 작품의 깊이 때문에 마니아 층이 두껍다고 했다.
“이번엔 어떤 영화래?”“제목은 ‘백자의 눈물’이고 도자기공에 관한 얘기래요.”
“도자기공?”
“네,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일제 강점기와 6.25를 겪으면서 변해 가는 도자기공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는 내용이래요.”
“어려운 얘기네.”
“쉽게 풀어내는 게 감독님의 숙제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겠어.”
박 대표는 필립 윤이 말하는 숙제의 의미를 아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너한테 음악을 부탁한 거군. 네가 그 이야기를 주제로 음악을 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맞는 말이기도 하고.”“저는 아직 아무 생각이 없어요. 트리트먼트라는 것이 완성되면 같이 상의하면서 하자고 하시는데, 저한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요.”“OST만 만드는 게 아닌가 보지?”“네, 영화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음악적으로 풀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일이 커졌네?”
“네, 좀 그럴 거 같아요.”“필립 윤이 제작하는 영화라면 저예산 영화일 텐데. 그러면 당연히 작곡비도 적을 거야. 부담되지 않겠어?”
“전 괜찮아요.”
“너한테 도움 되는 작업도 밀려 있잖아. 그것까지 거절하면서 하고 싶어?”“네, 하고 싶어요. 벌써 하겠다고 했고요. 돈이랑 상관없이 흥미로운 작업이 될 거 같아요.”
수철이 강한 의지를 내보이자, 박 대표는 잠시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칸영화제에 출품한다면 많은 사람이 보게 될 테니까 말이야.”“네, 그렇게 되면 좋죠.”“서로 윈윈하는 그림이 나오는 게 제일 좋아. 필립 윤 감독도 제작자니까 그걸 염두에 두고 있을 거야.”
“아…….”
“그런 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할 만한 작곡가는 많지 않아, 클래식 쪽으로 손을 대면 한도 끝도 없이 돈이 들어가니까. 널 만난 건 그에게 행운이었을 거야.”“아……. 그런가요?”“당연히 그렇지! 그래도 누굴 이용할 사람은 아니라서 다행이야.”
박 대표는 수철이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서도 필립 윤을 나쁘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건 수철도 같은 생각이었다.
“네, 제가 보기에도 좋은 분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미리 음악을 간단히 스케치해 뒀고요.”
“하하, 벌써?”
“생각난 김에 살짝 해 본 거예요. 시대가 계속 변하니까 악기의 음색으로 변화를 줘 보려고요. 처음 등장하는 악기를 퉁소로 생각하고 멜로디 라인만 대충 잡아 놨어요.”“햐, 대단하다, 대단해.”“아직 손만 댄 거예요. 시나리오 나오면 그때 제대로 스케치해 보려고요. 그리고 목소리 없이 악기 소리로만 해 볼 생각이에요.”“그래, 좋은 생각이야.”
박 대표는 수철의 말을 들으면서 수철과 필립 윤이 칸의 무대에 서는 모습을 상상했다.
* * *
“하실 말씀이…….”
수철은 작업실 근처의 한 카페에 금별기획의 최 팀장과 마주 앉았다. 최 팀장이 호텔에서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을 수철은 극구 거절했다.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최 팀장이 작업실 근처로 직접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