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가 돌아왔다-70화 (70/239)

#70. 달콤한 제안

“김명석 선생님께서 좋은 말씀을 하셔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최 팀장은 말을 하며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철은 동요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물었다.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요?”“하린이가 용수철 선생님을 만나서 노래가 팍팍 늘고 있다고요. 그래서 감사함에 좋은 식사 자리로 모시려고 한 건데, 거절하시다니 섭섭합니다.”

최 팀장은 김명석의 핑계를 대며 말했지만, 수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 팀장이 초대한 식사 자리도 엘진 그룹의 호텔이었다.

“죄송해요, 그런 데서 밥 먹는 게 불편해서요.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식사 자리를 거절했는데도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하린이를 가르치는 것은 김명석에게 부탁받은 일이다. 그래서 하린이와 관련된 일은 김명석과 상의하면 된다. 지난번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다른 목적으로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불편했다.

수철이 대뜸 찾아온 이유를 묻자 최 팀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용수철 선생님은 제가 싫으신가 봅니다. 제가 어쩌다 선생님께 미운털이 박힌 걸까요? 이유를 알려 주시면 고치고 싶습니다.”

최 팀장은 농담처럼 말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수철이 점심 대접도 거절하고, 멀리까지 찾아왔는데 바로 본론을 말하라고 하니까 섭섭하다는 얘기였다.

“전 팀장님 싫어하지 않아요. 단지 멀리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하린이 일이라면 김명석 선생님 작업실에서 얘기하면 되잖아요? 지난번에 좋은 제안을 하겠다는 말도 그렇고 여기까지 오신 것도 그렇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 같아서 물어본 거예요.”

최 팀장은 잠시 수철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최 팀장은 반짝이는 크리스털 안경을 매만졌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서론을 건너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엘진 그룹에서 만드는 영상사업단이 올해 안에 출범할 계획입니다. 그 영상사업단의 구성과 기획을 우리 금별기획에서 맡고 있습니다.”

최 팀장은 이미 김명석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얘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수철은 대꾸 없이 묵묵히 들었다.

“영상사업단은 영상에 관한 모든 콘텐츠를 제작하게 됩니다. 작게는 30초 광고에서부터 크게는 영화까지 제작합니다. 배급하고 유통하는 일도 직접 하게 됩니다. 물론 뮤직비디오와 드라마도 제작합니다.”

30초 광고부터 영화 제작이라니. 대기업이니까 가능한 얘기였다.

수철의 머릿속엔 많은 사람이 모여서 바쁘게 일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렇게 모여서 일하면 한꺼번에 많을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팀장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희는 효율적인 영상 사업과 나아가서 우리나라 문화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자, 재능 있는 아티스트분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 긍정적인 기여라니.

이야기가 너무 거창했다.

재능 있는 아티스트를 모아서 조직을 만들겠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그 조직으로 문화를 이끌겠다는 얘기. 문화를 이끌어서 엘진 그룹이 수익을 독점하겠다는 얘기. 수철에겐 그렇게 들렸다.

수철이 침묵을 깨고 질문을 던졌다.

“재능 있는 아티스트분들을 모셔서 어떻게 한다는 얘긴가요?”

최 팀장은 수철이 던진 질문의 의도를 눈치챘다. 미리 준비한 답변을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아티스트분들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티스트분들이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멀리 보고, 길게 투자합니다.”“투자한다는 것은 뭔가 기대한다는 것 아닌가요?”

수철의 물음에 최 팀장은 잠시 당황했다. 보통의 아티스트들은 이렇게 예리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 시스템적인 부분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저희는 아티스트분들께 지속해서 영상 콘텐츠를 소개할 겁니다. 그러면 아티스트분들께서는 자신과 관련한 분야의 영상 콘텐츠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이건 선택입니다, 강요 같은 건 없습니다.”“그럼, 하나도 참여하지 않아도 계속 지원을 한다는 얘긴가요?”“맞습니다, 하지만 참여하시는 것이 수익에 도움이 됩니다.”

대기업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리가 없다. 소속돼서 일을 많이 하면 수익을 주겠다는 것. 결국 기획사 시스템과 비슷했다. 단지 강제성이 없다는 것과 아티스트를 존중하겠다는 것만 달랐다.

연습생을 키우는 게 아니라 최고의 아티스트들을 모시는 것이니까 존중은 당연한 얘기다.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떤 지원을 받게 되는지 여쭤봐도 돼요?”

순간, 최 팀장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좋은 뜻은 알아주지 않고 수철이 계속 냉소적으로 불편한 질문만 던지고 있다.

큼!

최 팀장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표정을 바꿨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 어떤 부분을 우려하시는지 잘 압니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시지 않길 부탁드립니다. 우선 하신 질문에 답하자면 이렇습니다. 회사에 오셔서 아무것도 안 하시면 당연히 지원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아티스트께서 작품 활동을 안 하신다는 것은 아티스트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소멸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저희는 처음부터 신중하게 컨택을 합니다. 아무리 유명하고 재능 있는 분이라고 해도 함부로 손을 내밀지는 않습니다. 제가 용수철 선생님을 찾아온 이유도 그렇습니다.”

수철을 찾아온 건 신중한 결정이라는 뜻이었다.

최 팀장은 슬쩍 수철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희는 한번 선택하면 그 선택에 책임을 집니다. 아티스트분들을 끝까지 서포트합니다. 하지만 아무 활동도 안 하시면 지원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걸 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최 팀장은 단호하게 얘기했다. 말하는 자세가 허투루 볼 사람은 아니었다.

최 팀장은 수철의 시선을 의식해 말을 덧붙였다.

“저희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기획사 같은 곳이 아닙니다. 아티스트를 통해 수익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아티스트분들과 협업하여 더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것이 영상사업단이 출범하는 이유입니다.”

최 팀장은 수철을 만나기 전에 답변을 충분히 준비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여러 아티스트를 만나 본 경험자답게 전개가 탄탄했다.

“저희가 모시는 아티스트분들은 다양합니다. 배우, 음악가, 무용가, 행위 예술가까지 다양하게 컨택하고 있습니다. 음악가 중에서 가수 파트는 하린이가 저희의 첫 아티스트입니다.”“하린이 말고 다른 음악가는 어떤 분이 있나요?”“아직 확답을 받진 못했지만, 클래식 피아니스트와 첼리스트, 그리고 팝페라 가수분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시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저희가 용수철 선생님께 제안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창작과 관련한 부분입니다. 그 안에 작, 편곡과 음반 프로듀싱, 그리고 기획에 참여하시는 부분까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

수철이 대꾸가 없자, 최 팀장은 설명을 덧붙였다.

“제안의 핵심은 이겁니다. 선생님께서 작품 활동에만 집중하실 수 있도록 저희가 돕겠다는 뜻입니다. 몇 년 계약이니 그런 것은 없습니다. 계약서도 없습니다.”

계약서가 없다고?

수철은 고개를 갸웃했다. 기획사가 아니라 에이전시의 형태로 들렸다. 아니면, 계약하지 않아도 자신들의 시스템에 확신이 있다는 얘기였다. 한번 접하면 빠져나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

“계약서가 없어도 괜찮나요?”

수철의 물음에 최 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했다.

“저희는 작품으로 제안드릴 겁니다. 아티스트께 어울리는 작품을 소개하면 선택은 아티스트께서 하시는 겁니다. 거절하셔도 그것으로 인한 제재도, 불이익도 없습니다. 대신 일 년에 몇 작품 정도 해 주시면 좋다는 가이드는 드리고 있습니다.”“그럼 저한테는 어떤 기대를 하시나요?”“기대보다는 서포트를 하고자 합니다. 물론 기대를 하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선생님께서 오직 작품에만 몰두하실 수 있도록 돕는 게 저희한테 더 중요한 일입니다.”“어쨌든요, 말씀해 보세요.”

수철이 단호하게 묻자, 최 팀장은 잠시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

“음악은 영상사업단에서 하는 모든 콘텐츠에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만드는 영상에 작곡과 음악 감독을 맡아 주셨으면 하는 기대는 있습니다.”“아까 영상사업단에서 많은 영상을 만들 거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맞습니다.”

“그럼 그 많은 영상에 음악을 만들라고 하는 건 저한테 노예 작곡가를 하라는 말씀인가요?”

“네?”

최 팀장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노예 작곡가라니요? 그건 오해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선택입니다. 강요가 아닙니다.”“말을 안 한다고 해도 강요처럼 느껴지지 않을까요? 지원을 받는데 일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

“그리고 저는 음악 감독 같은 건 관심이 없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뿐이죠. 그런데 거기 들어가서 영상 음악을 만들라고 하면, 저나 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리지 않겠어요?”

수철의 물음에 최 팀장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까 거침없이 답변할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최 팀장은 회사의 입장에서 설명했지만, 수철은 계속 아티스트의 눈높이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처음부터 꼬인 느낌이었다.

최 팀장은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호기롭게 대화를 이끌어 갈 때와 달리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무엇을 우려하시는지 압니다. 그런데 저희 제안의 핵심은 아티스트분들의 창착을 지원하는 겁니다. 음악을 예로 들면, 음악가분들은 작품 활동에만 집중하시고. 나머지 녹음하고 음반 찍고 홍보하는 부분은 저희가 다 맡겠다는 겁니다.”

“…….”

뻔한 말이었지만 수철은 대꾸하지 않고 들었다.

“영상 음악을 작곡하는 것도 음악 감독을 하는 것도 선택입니다. 수익을 많이 내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

“저희는 오랫동안 엘진 그룹의 홍보를 담당해서 홍보에 대한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영상에 음악을 노출할 방법은 많습니다. 앨범 수록곡을 편집해서 사용해도 되고, 처음부터 음악의 컨셉에 맞춰 영상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작품으로서 사람들의 좋은 반응을 끌어낸다면 거기에만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것이 일 순위입니다.”

이 말은 그럴듯한 말이다. 아니, 일리가 있다. 최 팀장의 말대로 일이 벌어진다면 거절할 아티스트들은 없다.

수철은 잠시 최 팀장을 빤히 쳐다봤다. 최 팀장도 수철과 눈을 맞추며 계속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 작품 활동을 하시면, 저희는 거기에 맞춰 홍보와 확장력에 관해 제안을 드릴 겁니다. 광고, 드라마, 영화. 모두 다 활용 가능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하시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창작하시면 됩니다. 저희를 의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는 지켜보고 제안만 드릴 거니까요.”

꿀같이 듣기 좋은 말이다. 딱 수철에게 맞춤형 답변이다.

진즉에 이렇게 얘기하지.

이제 대화는 할 만큼 했고, 무슨 말을 하려고 멀리까지 왔는지도 알았으니까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때가 됐다.

수철이 입을 열었다.

“멀리까지 오셔서 좋은 제안을 해 주신 거 감사해요, 작품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다 지원해 주신다는 말은 모든 아티스트분들이 바랄 거예요. 그런데 전 한동안 작업 계획이 다 잡혀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요.”“괜찮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네?”

“용수철 선생님은 저희가 꼭 같이하고 싶은 아티스트입니다. 생각이 정해지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기다리는 건 자유지만…….”“지난번에 제안을 드린 드라마 주제곡을 진행하면서 저희의 분위기를 보시면 선택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최 팀장은 자신의 말을 먼저 마무리 지었다. 시간이 지나면 수철의 생각도 변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다음에 뵐 땐 드라마 자료를 갖고 오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최 팀장은 아무 확정도 짓지 않고 돌아갔다. 수철을 아는 사람들을 통해, 수철의 성향에 대해 파악하고 온 자리였기에 처음부터 시간을 두고 접근할 계획이었다.

수철은 처음 생각과 달리 고민해 볼 부분이 생겼다. 최 팀장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소속은 아니더라도 협업은 제안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만 하면 나머지는 대기업에서 다 알아서 한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계약서도 없다. 최 팀장의 말대로 결정은 드라마 음악을 진행하면서 해도 될 거 같았다.

* * *

―수철아, 잘 지냈어? 네 작업실에 한번 가 봐야 하는데 내가 바빠서…….

영준이 형이 몇 주 만에 전화를 해 왔다. 특강을 요청해 오는 학교가 많아서 정신없이 지내고 있었다.

“괜찮아요, 형. 제 작업실은 천천히 오시면 되죠.”―다음 주면 갈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좋고요.”

―메일은 확인했어?

샘, 데이비드, 알베트로. 그리고 제시와 함께하는 앨범의 녹음 일정이 잡혔다. 그래서 일주일 후 한국으로 온다.

녹음에 앞서 제시가 가사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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